고등학교 시절
난 청마 유치환을 사랑했다.
특히 “바위”라는 시를 종종 낭송하며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愛憐)에 물들지 않고
희로(喜怒)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억년(億年) 비정(非精)의
함묵(緘默)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드디어 생명(生命)도
망각(忘却) 하고
흐르는 구름
머언 원뢰(遠雷)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애정과 연민 희로애락에서 완전히 벗어나겠다는 굳은 선언처럼
내 삶도 그렇게 의연했으면 좋겠다 생각했는데
난 또 내 호를 유치환님의 청마(靑馬)를 따,
청파(靑波)라고 지으며
이승의 소풍을 마감할 때까지
푸른 파도처럼 한 곳(의식과 공간 모두)에 머물지 않고
늘 출렁거리며 살아가야지, 라는
모순적인 다짐을 했다.
대학 때
내 친구 문정선은
청파라는 나의 호를 듣더니
새끼 고양이를 바라보듯
말간 눈동자로 나를 보며 웃었다.
그리고 이제 수십 년이 흘러
내 미래를 예언이라도 했듯
정말 나는 푸른 파도처럼 출렁거리며 살았다.
때론 파도보다 더 힘이 센
해일을 겪어내고
그 질곡의 시간들을 건너며
한때 뱃놈의 애인이었다가
지금은 뱃사람의 아내가 되었다.
그런데 말이다
참 신기하게도
바다의 소리와 냄새와
정답고 때론 새초롬한 그 풍경들에
나는 또 한없이 매혹될까?
혹시 전생에 듀공은 아니었을까?
바다의 얼굴을 어루만지고
옆구리를 더듬고
햇살을 나누자고
애교를 부리며
나는 오늘도 오랫동안 바닷가를 어슬렁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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