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김초엽 작가를 처음 접했던 것은 2020 젊은 작가상 수상집 ‘인지 공간’이었다. SF 소설의 감동서사는 다분 내 취향이었기에 끌리지 않을 수 없었는데 최근에야 그녀의 장편 “지구 끝의 온실”을 읽게 되었다.
헐, 천재 아닌가? 서사 속의 재미와 감동, SF 소설의 한계를 무한 확장하는 그녀가 신처럼 보인다. 지구 끝의 온실 하나만으로도 그녀의 무한가치를 수천, 수만 명에게 떠들고 싶다. 부러워서 질투가 나고, 멋있어서 우러르고 싶고, 다정해서 빙긋 웃고 싶은 문장들...
돔을 없애는 거야. 그냥 모두가 밖에서 살아가게 하는 거지. 불완전한 채로. 그럼 그게 진짜 대안인가? 물론 그렇지는 않겠지. 똑같은 문제가 다시 생길 거야. 그래도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어. 뭔가를 해야 해. 현상 유지란 없어. 예정된 종말뿐이지. 말도 안 되는 일을 계속해서 벌이는 것 자체가 우리를 그나마 나은 곳으로 이동시키는 거야.(227쪽)
당신이 여기까지 온 이유를 알겠습니다. 우리가 결국 만나게 된 이유도요. 저는 운명을 믿지는 않지만, 같은 것을 쫓는 사람들이 하나의 길에서 만나게 되어 있다고 믿거든요. 우리는 그 기이한 푸른빛에 이끌렸고, 또 같은 사람을 통해 연결되어 있네요.(254쪽)
어떤 학자들은 가설을 세우고 실험을 하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결론을 내린다. 혹은 관측으로부터 데이터를 축적하고, 정확한 분석을 거쳐 귀납적으로 하나의 이론을 이끌어낸다. 그것이 일반적으로 과학이 수행되는 방식이다. 하지만 어떤 기묘하고 아름다운 현상을 발견하고, 그 현상의 근거를 끈질기게 쫓아가보는 것 역시 하나의 유효한 과학적 방법론일지 모른다. 실패할 수도 있지만, 어쩌면 대부분은 실패하겠지만, 그래도 일단 가보지 않으면 발견하지 못할 놀라운 진실을 그 길에서 찾게 될지도 모른다고, 아영은 그렇게 생각했다.(257쪽)
그리움과 고통은 언제나 함께 오고, 모두가 그것을 견뎌낼 필요는 없으니까요. 그래도 당신을 만나서, 아마라와 그 이야기를 다시 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어요.(346쪽)
인간은 언제나 지구라는 생태에 잠시 초대된 손님에 불과했습니다. 그마저도 언제든 쫓겨날 수 있는 위태로운 지위였지요.(365쪽)
어쩌면 우리는 서로의 내면을 평생 궁금해 하기만 하다 끝나버린 것인지도 모릅니다.(378쪽)
문득 아영은 레이첼의 눈빛이 어릴 적 정원에서 보았던 지수의 눈빛과 닮아 있다고 생각했다. 후회와 그리움이 섞인, 하지만 고통이라고만은 단언할 수 없는 어떤 복잡한 감정이 그 시선 속에 있었다. 생의 어떤 한순간이 평생을 견디게 하고, 살아가게 하고, 동시에 아프게 만드는 것인지도 몰랐다.(378쪽)
마음도 감정도 물질적인 것이고, 시간의 물줄기를 맞다보면 그 표면이 점차 깍여나가지만, 그래도 마지막에는 어떤 핵심이 남잖아요. 그렇게 남은 건 정말로 당신이 가졌던 마음이라고요. 시간조차 그 마음을 지우지 못한 거예요.(379쪽)
이제 아영은 이곳에 있었을 누군가의 안식처를 그러볼 수 있었다. 해지는 저녁, 하나둘 불을 밝히는 노란 창문과 우산처럼 드리운 식물들. 허공을 채우는 푸른빛의 먼지. 지구의 끝도 우주의 끝도 아닌, 단지 어느 숲속의 유리 온실. 그리고 그곳에서 밤이 깊도록 유리벽 사이를 오갔을 어떤 온기 어린 이야기들을.( 385쪽)
마지막 문장을 읽으며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눈물이 찔끔 나왔을 뿐더러, 웃고 있지 않은가? 가슴이 뛰는 이 설렘은 또 뭐란 말인가? 한 달 여 만에 읽었다. 책을 펼칠 때마다 가슴이 벅차 쉬 읽을 수가 없었다. 해서 앞장을 몇 번씩 더 뒤적여보며.
그녀의 한계를 마주할 수 있을까? 내일의 작품을 기대하는 설렘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이 가을, 내가 읽은 서사 중, 최고중의 최고다.
세삼 내 식물들에 마음이 더 가게되는 시간이며,
따뜻한 밥 한 끼라도 사주고 싶은 작가이다.
출판사 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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