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아, 네가 옆에 있어 좋아. 뭔지 든든해.”
“가시네. 남편도 자식도 있으면서. 뭘, 날 의지해?”
해맑게 깔깔 웃으며 눈 가장자리를 훔치던 혜목의 아리송했던 표정이 영 개운치 않았다.
“한 겨울에 바닷가라니. 참 아직도 사춘기를 벗어나지 못했어. 응”
기어이 바다를 보자며 끌고 온 송림해수욕장에서 혜목은 말을 아꼈다. 아마도 이곳까지 내려왔을 때 뭔가 하고 싶었던 말들이 있었던 듯싶은데 그 무렵의 나 또한 혼돈 속에 있었을 때였기에 혜목 대신 주저리주저리 넘치는 내 말을 뱉었다.
“그냥 옆에서 지켜봐주는 것만도 사랑의 한 방법이야.”
혜목은 언니처럼 나에게 충고를 했다. 내 애정전선에 이상이 있을 때면 혜목은 기꺼이 내 상담자를 자처했고 나 또한 그쪽 방면에선 혜목의 일목요연하면서도 이성적인 판단을 얼마간 믿고 의지해왔다.
“내 지상과제는 지고지순한 사랑이었고 지금까지 한순간도 가족을 벗어난 나를 상상하기도 싫었어.”
혜목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어련하시겠어?”
늘 완벽한 모양새로 살고 있었던 혜목에게 부러움을 넘어선 질투심마저 일었던 것일까, 나도 모르게 빈정대는 말투가 배어 나왔다.
“만약 남편이 죽는다면 따라 죽을 것 같아.”
결혼한 지 2년이 지났을 때 혜목은 그렇게 말한 적이 있었고 난 웃었다.
“너도 그런 사랑을 해봤음 좋겠어.”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혜목은 내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난 시선을 돌렸고 그 후 혜목의 가정생활에 대한 어떤 것도 묻지 않았다.
“지금도 그래? 지금도 남편을 따라 죽을 수 있어?”
불현듯 20년 전 그때가 생각났다. 혜목은 대답하지 않았다. 갯내와 함께 몰려든 겨울 칼바람이 혜목의 몸을 휘청거리게 했다. 곧 무섭게 눈이 쏟아졌다. 시야가 보이지 않을 정도의 폭설이었고 우리는 서둘러 헤어졌다. 3년 전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