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해 마지막 의식
박 민 정
K는 어느 날 돌연, 자신의 직업을 잃어버렸다.
동네 사람들이 비로소 그를 정직하게 불렀기 때문이었다. K 또는 K 새끼, K 자식으로. K는 자신의 그런 이름이 사무치게 낯설었다. 그는 오랫동안 직업으로 불리던 사내였다. 그러나 이제는 J를 제외한 누구도, 그의 직업을 불러 주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잃은 것 같기도 했다. 술에 거나하게 취한 형제가 “어이, 좆만한 K!"라고 그를 부르기 시작했을 때부터.
사실은 한동안 모두가 그를 이름으로 부르고 있었는데 K혼자만 몰랐다. 어느 날 슈퍼 주인 여자가 동네에서 최초로, 용기 있게 일갈했던 것이다.
“님은 무슨, 니미. 님 자 빼.”
그때 그는 그냥 ‘신부(神父)’가 되었다.
어차피 동네에 신부는 한 사람뿐이라 굳이 그렇게 부르지 않아도 된다는 의견이 덧붙여진 이후, 그는 마침내 온전히 이름으로만 불렸다. K가 직업까지 잃는 동안 소문은 열심히 성장했다. 그는 더 이상 사제도 신부도 아닐 때 자신이 무엇이 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J의 말대로 그는 ‘텔레비전도 볼 줄 모르는 바보’였다.
“신부님, 엄청 웃기지 않아요?”
J가 그렇게 말할 때 K는 함께 웃을 수 없었다. J는 K에게 왜 술 담배는 좋아하면서 텔레비전은 좋아하지 않느냐고 묻기도 했다. 그런 건 원래 다 같은 종류의 취미가 아니냐고 J는 따졌다. K는 변명할 말이 없었다. J의 얼굴이 떠오르자 K는 문득 두려워졌다. J는 곧 알게 될 것이다. K가 얼마나 많은 것들을 모른지에 대해서.
끼이익, 하고 하필이면 그런 소리를 내면서 문이 열렸다. 모든 절차를 마친 K가 자신의 직장이자 집이었던 성당을 나서는 중이었다. 텔레비전을 안 보는 바보인 그도 이런 장면을 알고 있었다. 이런 건 이른바 ‘출소’에 걸맞는 풍경이었다. 문은 천천히 열렸고 햇빛 한 줄기가 그의 눈을 찔렀다. 무엇으로 보나 그것은 출소의 모양새였다. 젠장! K는 갑자기 자유로워진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의 삶에서 쫓겨난 것이었다.
K는 길바닥에 트렁크를 죽죽 끌었다. J의 아비가 박박 찢어 버린 원고마저 없으니, 챙겨 나올 짐이랄 것도 없었다. 며칠 전 J는 전화를 걸어 꼼꼼하게 K의 신체 사이즈를 체크했다. J는 속옷은 자신이 전부 마련해 놓을 테니 자주 입는 옷, 아끼는 옷가지만 챙겨 나오라고 당부했다. 수단을 제외한 자주 입는 옷, 아끼는 옷이라면 K가 가진 옷의 전부였다. 그것들을 전부 챙겨도 남들 한철 입는 옷보다 훨씬 적었다. K는 아무 때나 그 몇 개 안 되는 사복을 입고, 신부의 이미지와는 전혀 걸맞지 않는 차림새로 돌아다녔다. 정육점 남자는 늘 혀를 차며 한 마디 했다.
“우리 신부님, 모르는 사람이 보면 신부님인 줄 알겠어요? 동네 건달이 아닌가 하겠네.”
동네 건달로 살다가 이토록 청빈한 신부님으로 출소하다니, 생각하며 K는 텅 빈 동네를 둘러봤다. 본래가 그렇듯, 동네는 고요했다. K는 딸이 없는 곳으로 도망친 J의 아비를 생각하니 문득 가슴이 아팠다.
신부가 되지 않았다면 K에게도 지금쯤, J와 비슷한 나이의 딸이 있을지도 몰랐다. 그것은 동네 사람들이 K의 귀가 따갑도록 일러 준 말이었다. K와 J를 둘러싼 그 소문의 내용은 사실이 아니었다. 그러나 진실을 아는 사람은 J와 K 당사자들뿐이었다. 성장하기 시작한 소문은 막을 수는 없었다. J으 아비는 언젠가 쓸쓸하게 말했다.
“자식도 그렇고 소문도 그렇고 참 당혹스러울 정도로 무럭무럭 자라지요.”
출소한 K는 이제 자신을 ‘신부님’으로 불러 줄 유일한 사람인 J를 만나러 가는 중이었다.
K는 맹세컨대 동네 사람들의 비밀을 관리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고해소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다만 고해일 뿐, 거래 비슷한 그 무엇도 아니었다. 고해란 고백과 화해가 아니던가. K는 고해소에서만큼은 자신이 온전히 쓰이고 있다고 믿었다. 고해소에서만큼은, 그들의 목소리도 구분할 줄 몰랐다. 그것이 K의 철저한 윤리였다. 어떤 직업인에게나 있는 ‘직업윤리’ 같은 것이었다고, K는 생각했다. 동네 사람들은 매일 밤 같이 어울려 술을 마셨는데 목소리를 모른다니, 말이 되냐고 따졌다. 하지만 K에게 고해소 벽 저쪽에서 들려오는 음성은 그저 나약하고 몰개성한 한 인간의 것일 뿐이었다.
K의 생각에 몇 가지 사례를 제외한. 이 소읍의 비밀들은 대개 별것도 아니었다. 신부는 세상의 사각지대에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기는커녕 언제나 특정한 ‘동네 사람들’ 가운데에 있었다. 오래전 K는 살인 경험도 들은 적이 있었다. 죄를 사하기 위해 그 죄의 내용에 순진하게 놀라서는 안 된다. K는 스스로를 단련했다. 누군가 웃으며 농 비슷하게 말했듯, 사제는 죄의 선수가 되어야했다. 그런 K에게 이 동네 사람들의 몇 차례 불륜, 때때로 살의, 간혹 절도, 그런 것들은 놀랍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때로는 흐느끼기까지 하며 자신의 죄를, 또는 죄라고 믿는 무엇을 털어놓았다. 그들은 자신의 죄에 대해 그토록 엄숙한 사람들이었다.
동네 사람들은 대부분 성당에 다녔다. 그것은 그들의 알뜰한 주말 소비행위였다. 모두가 K를 알아봤고, 그는 일종의 상징이었다. 요건대 멀지 않은 과거, K는 이 동네 사람들의 마지막 도덕이었다.
슈퍼, 약국, 정육점, 몇 개의 술집, 내과 병원 하나, 유치원, 학원 몇 개, 그리고 성당, 몊균 다섯 가구가 모여 사는 연립주택 여남은 채. 몇 채의 단독주택. 과장을 조금 보태서 그것이 동네의 전부였다. 자영업자들 외에는 모두 도심으로 일을 나갔고, 아이들도 도심의 학교에 다녔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서울 강남이었으나, 실체는 그냥 버려진 동네나 다름없었다. 심지어 고속도로변에 위치한 동네의 이름은 ‘소실부락’이었다. 몇 년 전, 처음 동네 사람들과 술을 마실 때 거나하게 취한 K는 말했다.
“잃어버린 마을인가요, 언제부터죠?”
그때 제 아비 곁에서 안주를 얻어먹던 중학생 J가 대답했다.
“신부님, 바보 아니에요?”
동네에 하나뿐인 약국을 운영하는 남자는 얼굴을 붉히며 제 딸을 꾸짖었다. 마치 저 혼자 힘으로만 수태해서 낳은 아이를 길러왔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어 보이는 남자였다. 아내는 어디에 있을까 같은 궁금증은 생기지도 않았다. 그는 오래전 영세를 받은 사람이었다. 어딜 감히 신부님께, 그는 송구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J의 아비는 곧 표도 안 나는 돈과 잡다할 것도 없는 서무를 관리하는 성당의 집사가 되었다. 오직 어린 J의 되바라진 행동 때문에 그 일을 자처한 것 같았다. 그는 K보다 대여섯 살 많았지만 언제나 깍듯한 경어를 사용했다. 자신이 보는 앞에서 J가 K보다 대여섯 살 많았지만 언제나 깍듯한 경어를 사용했다. 자신이 보는 앞에서 J가 K에게 까불거리면 무섭게 눈을 치뜨며 딸을 야단쳤다. 그러나 J는 조금도 기죽지 않았다. 오히려 제 아비가 귀여워 죽겠다는 듯 웃곤 했다. K는 동네 사람들에게 수시로 J를 칭찬했다. 그런 딸내미라면 혼자된 제 아버지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겠느냐고. 내게도 그런 딸이 있었다면, 술에 잔뜩 취한 날은 간혹 그렇게 말을 맺기도 했다.
그것이 전부였다. J에게, 뿐만 아니라 지금껏 살아오며 어떤 여자에게도 욕정 비슷한 것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K는 그것이 무엇인지 잘 몰랐다. 그러므로 제법 나이가 든 후로는 탐도 나지 않았다. 그러나 K가 종국에 ‘좆 같은 새끼’가 된 이유는 그가 딸 같은 J를 건드렸으며, 그것도 오랫동안 그래 왔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K는 자신이 왜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5년간 어린 J와 그의 아비를 가까이에서 봐 왔고 그들은 K의 가족과도 같았다. J는 학교에서는 걸핏하면 담배 피우다 걸리고, 패싸움하다 걸리는 문제아였다. 공부에도 별 관심이 없었다. 발랑 자빠진 강아지처럼 앙앙대며 아무에게나 덤벼 대는 까닭에 혀를 차며 욕하는 어른들도 많았다. 하지만 K가 보기에는 동네의 어떤 아이보다 똑똑하고 속도 깊은 아이였다. 아무리 제 아비 속 썩이는 짓거리를 즐겨 한다지만, 그를 생각하는 마음만큼은 보통 아이의 것이 아니었다. J의 아비는 사생활을 거의 말하지 않았고, 딸에 관한 사적인 이야기도 결코 하는 법이 없었다. 그러나 J가 마음을 다해 제 아비를 극진하게 챙긴다는 것을 K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의 관계는 K가 평생 봐 온 부녀 관계 중 가장 애틋한 관계였다고도 말할 수 있었다.
자신과 J를 둘러싼 소문의 내용을 알게 되었을 때 K가 제일 먼저 걱정한 것도 J의 아비였다. J의 아비는 과묵한 사람이었다. K와 나란히 길을 걸을 때 호프집 여자가 어마! 소리를 내며 뒷걸음질을 쳐도, 그는 침묵했다. K는 그의 침묵이 공포스러웠다. 차라리 그가 먼저 말을 꺼내길 바랐다. 그래야 그 소문은 사실이 아니라고 말해 볼 기회라도 얻을 거였다. J의 아비는 끝내 침묵하며 K에게 해명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심지어 동네 사람들의 경멸을 견디다 못한 K가 사제직에서 물러나겠다고 하자 그를 말리기까지 했다.
“신부님, 조그마한 동네의 감수성이라는 것이 본디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게 말했던 J의 아비는 어느 날, 방문을 박차고 들어와 K의 원고를 전부 찢어 버렸다. J와 관련된 소문과 더불어 K에게 한 가지 죄목이 더 추가된 후였다. 도심으로 일하러 나가는 젊은 남자가 K의 멱살을 잡고 소리쳤다.
“너 이 개자식, 우리 동네 비밀 다 팔아먹으려고 했다면서?”
K는 그간 동네 사람들과 너무 많은 술을 마셨고, 너무 많은 이야기를 했다고 생각했다. 술에 취해 누구에게 그 책에 대해 말했는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K는 오래전부터 자신의 기도 경험을 픽션으로 만든 <리얼 타임 - 비밀>이란 책을 쓰고 있었다.
K는 ‘비밀’이란 부제를 들은 누군가가 악의를 품고 J와 관련된 엉뚱한 소문을 퍼뜨린 것이라고 확신했다. 누군가는 반드시, 별로 도발적이지도 않은 자신의 비밀이 그 책을 통해 폭로될 것으로 오해한 것이었다.
K는 J가 전화로 불러 준 주소를 찾아갔다. 경기 모처의 소도시였다. 허름한 건물들이 누군가 장난으로 세워 놓은 담뱃갑들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J는 그중 한 건물 앞에 쭈그리고 앉아 담재를 피우고 있었다. 아비의 가출 이후 J는 실제의 몇 배가 되는 시간을 살아 버린 것 같았다. 중학교, 고등학교에 다닐 적에는 어울리지도 않게 진한 화장을 하고 다니더니, 지금 화장기 없이 초췌한 J의 얼굴은 난데없이 남편과 사별한 여자처럼 그늘져 있었다. K가 다다가자 J는 땅바닥에 담배를 비벼 끄며 일어섰다. J는 K의 트렁크를 잡아채며 말했다.
“이 동네는 그 동네보다 더 한심한가 봐요. 어디서 사람 죽이고 도망 온 사람들 천지래요. 계약할 때 아무것도 안 물어봐요. 방세 낼 때 계좌 이체 같은 것도 안 한 대요. 그래서 나도 쉽게 방 얻기는 했어요.”
스무 살이 된 J는 예전보다는 훨씬 의젓한 말투를 썼다. 파리한 얼굴에 웃음기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몇 달 사이에 이렇게 변할 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J는 변해 있었다.
몇 달 전, K의 원고늘 찢은 다음 날 J의 아비는 가출했다. J는 K를 찾아와 엉엉 울었다.
“아빠가 날 완전히 버렸어요. 나한테는 신부님밖에 아무도 없어요.”
J는 K와 자신이 등장하는 소문에 대해서는 신경도 쓰지 않던 아이였다. 소문이 1년 가까이 지속되고 있는데도, 과거와 다름없이 K에게 웃으며 인사를 했고 찬거리를 들고 찾아왔다. 어느 날인가부터는 J의 가족 외에 아무도 미사에 오지 않았다. 당현히 아무도 K와 술을 마셔 주지 않았다. J의 아비는 술을 한 방울도 마시지 않는 사람이었다. 차라리 같이 술 한잔했으면, 터놓고 이야기하며 대책이라도 마련해 볼 텐데, K는 그런 생각도 여러 번 했다. K는 고해소 뒤에 조그맣게 붙은 자신의 방에서 하염없이 소주를 마셨다. 가끔은 J가 찬거리를 들고 와서 아무렇지 않은 듯 떠들어 댔다.
“신부님, 나 금방 학교 졸업해요. 좋겠죠?”
K는 피식 웃으며 대답하곤 했다.
“오랫동안 금방이구나.”
그 순간 K는, 자신에게 웃어 주고 자신이 웃어 줄 수 있는 유일한 아이가 파멸의 원인이 되어야 하는 까닭이 사무치게 궁금했다.
두 손으로 트렁크를 들고 낑낑대며 계단을 오르는 성장한 J의 뒷모습이 낯설었다. 언제 자랐는지, 늘 깡총하던 머리카락이 허리께에 내려와 있었다. 찰랑거리는 길고 검은 머리카락이 다 자란 여자의 그것 같았다. K는 자식의 성장이 소문의 성장만큼이나 당혹스럽다던 J의 아비를 생각했다. 생때같은 자식을 버리고 그는 어디로 간 것일까.
K는 앞으로의 일을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몇 달 전 J는 엉엉 울면서 신부님은 원래 아버지가 아니냐고 따졌다. 이제 자신의 아버지가 되어 달라는 것이었다. 자신은 성인이 되었으니 돌봐줄 필요는 없고 곁에 있어 주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 J는 아빠가 없어진 다음 날부터 밥도 안 먹고 있으며, 이렇게 살다가는 곧 죽어 버릴 것 같다고도 했다. K는 울고 있는 아이에게 죄책감을 느꼈다. 자신도 피해자였으므로, 이런 종류의 죄책감이 온당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이 두 가지 있었다. 분명한 것은 그 두 가지뿐이었다. 제 아비에게 버림받은 J가 가여웠고, 자신은 너무나도 무기력했다. 앞으로의 삶이야 어떻게 흘러가도 좋았다. 저 아이가 나를 필요로 하고 있다면. 그것이 J와 함께 살기로 마음먹은 까닭이었다. 그 자신 역시 갈 곳이 없었다.
*
기대할 여유도 없었지만, J가 안내한 방은 유난히도 좁고 궁상스러웠다. 구석에 있는 이층 침대를 제외하고는 둘이 같이 쓸 만한 물건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J는 트렁크를 열어 짐을 풀어 놓으며 저도 이런 경험은 없어 봐서, 운을 뗐다. 어떻게 하다 보니 대충 살 만한 방을 골랐다는 것이었다. 아빠가 대책 없이 자신을 버리는 바람에 돈이라고 가진 것은 별로 없다고, 금액에 맞추다 보니 이런 방밖에 없었다는 둥 이런저런 변명을 늘어놓았다. 이런 식의 경험이 없는 것은 K도 마찬가지였다. J는 K의 수단을 벽 한가운데에 걸었다.
“같이 사는 사람들에게는 여러 가지 규칙이 필요해요. 신부님은 오래 혼자 살아서 그런 것에 익숙하지 않겠죠. 이제 적응하셔야 해요.”
“저걸 뭣하러 저렇게 걸어 놓는다는 거니. 장식도 아니고 말이야.”
J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어느덧 K의 짐을 모두 정리해 놓고 밥을 짓고 있었다. 새삼 허기를 불러일으키는 들큼한 밥 냄새를 맡으며 K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J는 익숙한 솜씨로 요리를 했다. 어미 없이 자란 아이답게 행동하는 품마다 의젓했다.
“신부님, 아까 보니까 묵주고 있던데. 왜 챙겼어요?”
J는 설마 매일 밤 기도하시려는 건 아니겠죠, 덧붙였다. K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짐이랄 것이 하도 없어서, 있는 대로 주워 담다 보니 그렇게 됐어.”
“나랑 같이 사는 동안에는 절대로 기도 따위 하지 마세요.”
그렇게 말하는 아이의 말투가 전에 없이 단호해서 K는 잠시 놀랐다. K와 J는 어느덧 정갈하게 차려진 밥상 앞에 마주 앉았다. J는 K에게 수저 한 벌을 건넸다.
“이건 신부님 걸로 새로 샀어요.”
J가 건네준 숟가락으로 밥을 뜨며, K는 걷잡을 수 없이 목이 메었다. K는 콜록콜록 기침을 했다. J는 찬물을 따라 주었다.
“난 유치원 때부터 밥을 했어요. 밥 말고 다른 건 다 신부님이 하셔야 해요. ㅅㄹ기지나 청소, 이런 것들요.”
K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런 것은 같이 사는 사람들 사이의 당연한 규칙이지. 얘야, 나도 사람이거든. 그런 건 굳이 적응기를 두지 않아도 되는데.”
J는 K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제가 말한 규칙은 그런 게 아니에요.”
제몫의 밥을 비운 J가 담배에 불을 붙이며 말을 이었다.
“규칙을 깨는 것이 규칙이에요. 단, 이건 신부님에게만 해당돼요. 전 나름대로 편리한 방법들을 익혀 왔으니 그것들을 지킬 거예요.”
요컨대 J의 제안은 이랬다. K은 이제 성당에서 지켰던 규칙들을 하나씩 깨는 것이다. J의 말에 따르면, K는 하느님에게도 성당에게도 배신당한 것이었다.
“배신당한 인간들은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어요. 믿었던 그것을 끝까지 경멸하고, 생각날 때마다 함부로 조롱하는 수밖에.”
J는 벽 한가운데에 걸어 둔 수단을 가리켰다.
“저런 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커튼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세요. 우린 이제 그런 훈련을 ㅎ는 거예요.”
그래, 무엇으로든 이 삶을 견뎌 낼 수만 있다면. K는 J가 무슨 엉뚱한 제안을 하든, 그녀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어려서부터 제 아비를 위해 밥을 지었던 아이가 하는 말이라면 머든 믿을 수도 있을 걱 같았다. 자식뻘인 J는 K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K 자신이 소실부락의 성당 바깥에서 한 일이라고는 그저 술을 마신 것밖에 없었다.
“신부님, 우리는 소실부락, 그 한심한 동네에서 배신당한 사람들이에요. 오늘부터 하나씩, 그 천박한 인간들의 비밀을 알려 주세요. 최대한 상세하게, 그들이 말한 그대로요.”
그것이 J가 말한 규칙의 본론이었다.
*
K는 그 인간들의 음성이 한꺼번에 몰려오는 꿈에 시달렸다. 나약하고 몰개성한 인간들의 음성, 그들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K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그것이 K의 직업윤리였다. 하지만 고해소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구분하지 못했던 것은 이상한 일이기는 했다. 몇 년간 시도 때도 없이 마주친 빤한 인간들이었다. 신부님 술자리가 있다, 하면 모여드는 인간들도 거기에서 거기였다. 거기에서 거기인 인간들 모두 성당에 온다는 것을 K는 알았다.
게다가 그럴 생각도 없었지만 만약 K가 세상에 그들의 비밀을 폭로했을 때 가정생활에 치명적인 위협을 입을 만한 인간들이라면 더욱 뻔했다. 그들이야말로 K와 밤마다 주거니 받거니 했던 인간들 이었으니까. K는 J의 이마를 콩 치며 말했다. 너도 나를, 아이들의 비밀을 죄다 알고 있는 담임선생님쯤으로 생각했던 거니. 내가 하는 일은 보속을 주는 것뿐이었어. 자신의 죄에 구속당하지 말라고. 난 그 동네 누가 무슨 비밀을 가졌는지 모른다.
J의 제안이 발칙해서가 아니라, K가 기억하는 바가 없어서 그런 규칙은 지킬 수 없다고 생각했다. 누가 어떤 죄를 저질렀던 것인지, 행위 주체를 명확하게 구분할 수 없었다. 어렴풋이 기억나는 바로 누군가는 제 마누라가 등을 돌린 사이 다른 동네 여자의 치마 속에 손을 집어넣었고, 누군가는 제 아들이 막노동해서 벌어 온 돈을 다방 아가씨 품에 죄다 넣어 줬다. 더욱이 그런 한심한 인간들이 스스로 죄를 용서받고자 K를 찾아왔다. 어쩌면 그것은 죄도 용서도 아니었는지 몰랐다. 그건, 어쩌면 게임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게임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K는 꿈속에서 돌연 어린 시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귄 여자애가 제안했던 고백 놀이를 떠올렸다.
……아니, 아무것도 하지 마, 그냥 들어 줘.
K는 고해소 너머 인간들의 음성, 특별히 소실부락의 비밀들과 함께 또렷하게 기억나는 한 소녀의 음서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열여섯의 K는 아무렇게나 내던져진 지저분한 매트리스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마. 여자애는 자꾸 속삭였다. 여자애가 어린 K의 귓볼에 자꾸만 뜨거운 김을 불어넣었다. 이렇게 들어준 것만으로 됐어. 여자애는 K의 몸을 멋대로 더듬었다. K는 몸을 꿈틀거리며 여자애를 떼어 내려고 했다. 잠깐만, 잠깐만. 여자애는 제 아비가 밤마다 자신을 강간한다며 울었다. 온몸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 같아. 지네나 꼽등이 같은 게 으악, 막 내 팬티 속으로 들어와. 여자애는 엉엉 울었다. K는 여자애의 볼을 쓰다듬으며 함께 울었다. 너희 아빠, 그 개 같은 자식 내가 경찰에 신고할거야. 다시는 널 만지지 못하게 해 줄게. 여자애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안 돼. 그러지마, 아빠가 날 죽일 거야, 소리를 지르며 K의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K는 지저분한 매트리스 위에 혼자 누워 있었다. 대체 날더러 뭘 어쩌란 거지? 그것이 K 인생 최초의 고해성사였다.
결국 다들 내 입을 틀어막았던 거였군. 직업윤리라고 생각했던 것은 강요된 규칙일 뿐이었다. 오래전 살인 경험부터, 학급의 아이를 강간했다는 젊은 교사의 흐느낌가지. K는 어디까지 진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분명한 죄들을 떠올렸다. 그 죄들을 듣고도 모른 척했던 것이 나의 윤리였던가. K는 자꾸만 되뇌었다. 비밀이라고 할 만한 것이 있고, 죄라고 할 만한 것이 있었다. 그것들은 서로 별개의 것이었다.
그 소녀는 어떻게 되었을까, K는 몇 번의 유혹에도 결코 여자애를 안아 주지 않았다. k는 그것이 무엇인지 잘 몰랐다. 그저 여자애가 가엾을 뿐이었다. K는 퉁퉁한 생선의 흰 살을 닮은 허벅지를 떠올렸다. 비늘을 깨끗하게 벗겨 놓은 듯 매끄럽고 하얗던 소녀의 허벅지, 여자애가 치마를 들추었을 때 그곳에는 누군가 함부로 젓가락질을 한 듯 깊숙하게 패인 모양의 흉터가 있었다. 우리 아빠란 미친 자식이 담뱃불로 지져 놓은 거야. 내가 안 한다고 하니까. 여자애는 어린 K에게 안겨 눈물을 뚝뚝 흘렸다. K의 가슴이 흠뻑 젖었다. 차갑다, K는 생각했다.
잊고 있던 감각들이 한꺼번에 되살아나는 듯했다. 차갑고, 뜨겁고, 하염없이 아프고 가여운 느낌, 이 어린아이가, 그 개 같은 자식에게……? K는 눈을 떴다. J가 그의 가슴에 안겨 몸을 떨며 울고 있었다. 지독한 꿈이었다.
K는 J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언제 이 좁은 자리를 비집고 들어왔던 걸까. 낮에 봤던 다 자란 여자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덜덜 떨며 흐느끼는 J는 그저 아비의 품에 안긴 어린아이 같았다. 간혹 어떤 개자식들은 자기 딸에게 그런 더러운 욕정을 품는지도 몰랐다. 몇 년 전 K를 찾아와 흐느끼던, 소실부락의 또 한 명의 개자식처럼.
*
J는 명랑하게 떠들며 요리를 했다. 신부님이 좋아하는 반찬이 뭔지 다 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이에요. K는 희미하게 웃었다. 네가 해주는 것은 ㅁ엇이든 다 맛있어. 예전에 아빠 심부름 올 때는 굳이 네가 한 음식들이라고 생각지는 않았는데. 압 이야기가 나오자 J는 입을 다물었다. 도마에 칼을 부딪는 소리가 커졌다. J는 목소리를 낯추며 말했다.
“저기 신부님, 나한테 아빠는 벽에 걸린 저 흉측한 커튼 같은 거예요. 날 버렸으니까.”
K는 벽 한가운데에 걸린 수단을 바라봤다. 맥없이 달린 로만칼라는 K의 떨어져 나간 수족 같았다. K는 생각했다. 갑자기 아찔한 상실감이 온몸을 훑고 지나가는 듯했다.
K는 마음을 다잡았다. 세상에 하나뿐인 제 아비를 잃은 아이도 있는 마당에, K는 간밤에 자신의 품에 안겨 울던 J를 생각했다. 내게도 딸이 있었다면 지금쯤 저만큼 자랐을지도 모르지. K는 한 번도 가져 보지 못한 것이 그리울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J의 아비는 어디쯤에 수태된 아이를 데려왔던 걸까. 그는 단 한 번도 J의 어미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J의 어미에 대해 전혀 아 바가 없는지도 몰랐다.
K가 막 사제 서품을 받고 보좌 신부로 부임했을 무렵, 고해소너머 익명의 남자는 자신이 사랑하지 않는 여자가 임신을 해서 그녀와 결혼을 해야 한다고 흐느꼈다.
“신부님, 그거 아십니까. 세상 모든 아비는 자기 친자식을 모른다고 합니다. 그녀가 가진 애가 제 애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겠습니까. 그녀는 자기 몸에 있는 아이니까 자기 아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겠지요. 저는 모릅니다. 아이 때문에 결혼을 해야 한다는데, 대체 그 애는 지금 어딨습니까.”
J와 그녀의 아비는, 언제쯤부터 서로를 아비와 딸로 믿고 의지하며 살았던 것일까. J가 요리를 하는 동안 K는 열심히 방을 쓸고 닦았다. 좁고 궁상스러운 방이 하루 만에 환하게 살아나는 듯했다. J는 반짝반짝 윤이 나도록 잘 닦은 숟가락을 K에게 내밀었다.
“자, 신부님. 오늘부터 하나씩 말해 주세요. 소실부락 사람들의 비밀을.”
K는 숟가락을 받아 들며 지난 꿈에 또렷하게 등장한 죄의 내용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것은 분명히 정육점 주인 남자의 음성이었다. K가 부임하자마자 고해소를 찾아온 그는 자기 죄를 고백하면서도, 마치 제3자의 그것을 일러바치는 양 혀를 찼다.
“그러니까, 어떻게 그런 것이 인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것이 인간이면 우리 신부님은 아마 인간이 아닌 다른 뭔가가 되어야 할지도 모르겠네요.”
인간이 아닌 그런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그는 자신이 동네의 모든 부녀자를 건드렸다고 했다. 그놈의 개 같은 버릇을 죽을 때까지 고칠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하며, 그는 혀를 찼다.
“그런데 이걸 어떡합니까. 나란 놈도 한심한 놈이지만 쿡 찌르면 죄다 넘어오는 그 여자들은 또 뭐냐구요. 어떨 땐 여자들이 먼저 원했다니까요. 사내 된 도리로, 하기사 이런 말씀 신부님께는 죄송하지만, 여자들이 옷 벗고 달려드는데 거절하면 그건 또 예의가 아니잖습니까.”
미친 새끼, J는 뇌까렸다.
“뭐, 자랑하러 왔대요? 비밀도 아니네. 그 아저씨 그런 거 원래 유명했어요.”
그도 한 아이의 아버지였으니까, 란 말을 삼키고 K는 말했다.
“유부남이었으니까, 죄라고 생각한 거지. 딴에는 용서받으려고 한 거였어.”
흥, J는 코웃음을 쳤다.
“죄는 그렇다 치고, 진짜 비밀이라고 할 만한 거 없어요? 신부님과 당사자만 알고 있는 것, 그 밖에 사람들은 알래야 알 수가 없었을 만한 뭐 그런 거요.”
자신을 그 동네 초등학교 교사라고 소개한 젊은 남자였다. 그는 고해소에 들어서자마자 흐느꼈다. 할 수만 있다면, 그 몹쓸 물건을 없애 버리고 싶다고 했다. 그는 대체 하느님은 왜 이런 물건을 만들어 주셨는지, 하느님이 원망스럽다고도 했다.
“그…… 저희 반 아이 중, 유독 성숙해 보이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그의 고백은 다시금 몹쓸 물건 타령으로 끝이 났다. J는 더할 나위 없이 한심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묵묵히 밥을 먹었다.
“인간들이 진짜, 다 거기에서 거기네요. 왜 다 그런 종류야?”
K도 항상 그것이 궁금했다고 말했다. J는 숨이 넘어가도록 웃어 댔다. K도 활짝 웃었다.
*
K와 J는 매일 즐겁게 식사를 했다. K는 그렇게 하루하루 지내며 과거의 모든 것을 잊어버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들이 어떻게 이 방에 함께 머무르게 되었는지, J는 어떻게 아비를 잃었으며 K는 어떻게 직업을 잃었는지, 그들이 잃은 것이 얼마나 큰 상실인지. 지금도 소실부락의 사람들은 K와 J를 두고 제멋대로 찧고 까불 것이었다. 다름 아닌 K와 J가 자신들의 비밀을 사육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어느 날 K와 J는 서로 도와 가며 이불 빨래를 했다. 건물 앞 담벼락에 빨랫줄을 걸어 이불을 널고 들어온 K는 바닥에 아무렇게나 누워, 자신을 둘러싼 소문을 처음 들었을 때를 떠올렸다.
“신부님, 그런 뻔한 말씀 말고요. ㅅㄹ직하게 말 좀 해 주십시오. 신부님은 아시지 않습니까, 딸 같은 여자를 보고도 그런 추악한 마음이 드는 것이 수컷이란 걸. 다른 사람은 몰라도 우리 신부님은 저를 이해해 주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다 동네 대학생 처녀를 짝사랑하게 되었다는 중년의 수컷은 보속을 받고 난 후에도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늘어놓았다. K는 그의 말을 애써 무시하며 언제나처럼 말했다.
“인자하신 천주 성부께서 성자의 죽음과 부활로 세상을 당신과 화해시켜 주시고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 성령을 보내 주셨으니, 교회의 직무 수행으로 몸소 이 ;교우에게 용서와 평화를 주소서. 나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이 교우의 죄를 사하나이다.”
“그딴 소리는그만 집어치우라고!”
그것은 음성으로만 머무르지 않고 주먹이 되어 K의 턱으로 날아왔다. 그는 내과 병원 원장이었다. 뭄을 박차고 들어와 K에게 주먹을 날린 그는 감당할 수 없5는 스스로의 기행에 놀라 숨을 헐떡였다. 그는 무릎을 꿇고 울기 시작했다.
“신부님…… 아니, ㅇ 양반아, 우리 다 같은 인간이잖아요.”
K는 직업을 잃게 된 내력을 떠올리며, 문득 J가 아비를 잃게 된 내력이 궁금했다. 1년 가까이 지속된 그따위 소문에도 아랑곳하지 않던 J의 아비가, 왜 어느 날 갑자기 딸을 버렸을까, J는 컴퓨터로 게임을 하고 있었다. 어깨를 들썩이며 피식피식 웃는 모양새를 보니 마음이 아팠다. 아직 어린애일 뿐인데. 아니, 언제까지고 아비에게 딸은 그런 존재가 아닌가.
“다 자란 척하지만 내 눈에는 그저 강보에 싸인 대학교 졸업반 아기지요.”
과거 어느 교우의 말이었다. 그런 것이 바로 아비의 마음일 것이라고 K는 언제나 생각했다.
J가 워낙 되바라진 구석이 있는 데다, 남들의 시선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 아이인 줄은 K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그러나 동네 사람들의 경멸 어린 시선에 마음을 다친 적이 정말 한 번도 없었을까, 혹시나 제가 다니는 학교에까지 소문이 번져 들어가지는 않았을까. 또래 아이가 그 소눔을 두고 J를 괴롭히지는 않았을까. 단 한 번도 해 보지 않았던 걱정이 K를 아프게 사로잡았다. K는 문득 큰 소리로 울고 싶었다. 그때 J가 몸을 돌려, 컴퓨터 화면 속 무언가를 가리키며 말했다.
“신부님, 이것 좀 봐요. 엄청 웃기지 않아요?”
K는 그것이 무엇이든 큰 소리로 웃고 싶기도 했다. 알 수 없는 감정이었다. K는 정말 큰 소리로 웃었다. 야, 그거 엄청 웃기는구나. J는 신부님이 웬일이래요, 나랑 같은 걸 보고 웃게, 하면서 웃었다. K는 언제까지고 웃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날 밤, 그들은 오랜만에 함께 누워 잠을 청했다. K는 J의 머리카락을 가만가만 쓰다듬었다. 딸의 기원은 어디일까, K는 한 번도 보지 못한 J의 어린 시절이 그리웠다. 문득 이런 모양새 역시 동네 사람들이 끊임없이 입에 올린 그런 종류의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 어떤 개자식들이 있는 것쯤은 K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Jㅘ 나누고 있는 순간은, 그런 것이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K는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죄인지, 문득 모호해졌다.
“신부님, 이제 나한테 비밀 없죠?”
J가 갑자기 물었다. 비밀이라는 단어는 그들이 언제나 갖고 노는 것이었고, K는 그 마레 거부감이 없었다. K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애야, 내가 너에게 무슨 비밀이 있겠니?”
“그럼 신부님, 그 책 어디 있는지 말해 줄래요? 왜 안 가지고 왔어요?”
“무슨 책?”
“그 비밀이란 부제가 붙은 책 말이에요.”
그것이라면 J의 아비가 남김 없이 찢어 버린 원고를 말하는 것이었다. J으 아비는 어느 날 갑자기 방문을 박차고 들어와 책상 서랍에 담긴 원고를 모두 꺼내서 박박 찢었다. 컴퓨터는 쓸 줄도 모른 K였으니, 그렇게 원고는 모두 없어져 버린 거였다. K는 J 역시 동네에 떠도는 소문을 대강 알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며 말했다.
“그건 누가 다 찢어 버려서 없어. 넏 그 소문을 들었니?”
“아뇨. 아빠가 말해 줬어요. 신부님이 동네를 배신하려고 한다고요.”
*
소실부락의 여러 잡다한 비밀들 가운데, K의 생각에 그것은 분명히 죄였으며, 그러나 어떻게든 모른 척하고 싶은 죄였다. 그것은 K를 무력하게 만드는 죄들 가운데서도 가장 몹쓸 죄였다. 그 역시 자신이 몹쓸 아비라고 말했다. 하루가 다르게 놀랍도록 성장하는 자식을, 그렇게 말하는 순간 K는 그가 J의 아비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몹시 흐느꼈다. 친자식이었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라고, 그 아이가 친자식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것은 맹세코 아니라고, 그는 거듭 말했다.
“아니는 내게 그냥 이렇게 살자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분명 있을 거라고, 우리만 그런 것은 아닐 거라고, 남들과 조금 다르지만, 우린 언제까지나 아비와 딸로 그렇게 오래도록 살아가면 된다고. 하지만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냔 겁니다. 몹쓸 아비지만 그래도 아비는 아비이지 않습니까?”
그것이 J가 그토록 듣고 싶어했던 소실부락의 비밀이었다. 벌써 몇 년 전, 이란 말을 듣자마자 J는 울부짖었다.
“아빠는 그때 날 버린 거예요. 어떻게 나랑 있었던 일을, 함부로 이야기할 수가 있죠? 아무리 신부님이라지만, 그렇게 까발려도 되는 거냐구요.”
J는 전부 다 개자식들, 신부님도 마찬가지야 중얼거리며 뛰쳐나갔다. K는 망연하게 주저앉아 있었다.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비겁하게 흐느끼며 대체 날더러 뭘 어쩌란 거지?
K는 오랫동안 기도를 하면 한 순간에 응답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기도라는 행위 자체가 속죄를 해 준다고 여기는 것과 다름없었다. 아편과 같은 속임수였다. 다도 그자들과 다를 바가 없구나, K는 생각했다. 죄를 뉘우치고 기도하라, 는 어리석은 보속은 필요 없었다. 그자들은 죄를 고백한 것만으로 이미 속죄받았다고
여긴 것이었다. K는 고해소 너머에서 울고 있는 개자식의 목소리를 잊기 위해 노력했던 자신을 떠올렸다. 그의 죄를 감히 사하겠노라고, 말한 것은 바로 자신이었다.
J는 동ㅇ 틀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고해소에서 이루어진 것은 다만 고해일 뿐이었으나, 이 누추한 방에서 이루어진 것은 다만 거래일 뿐이었다. J는 제 아비가 자신과의 삶을 한낱 비밀로 여겼다는 것에 더한 배신감을 느낀 듯했다. K는 하염없이 담배를 피웠다.
이제는 또다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K는 생각했다. 살아가려면 그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는지도 몰랐다. 반드시 죄라고 명명되는 무엇인가가 존재해야만 세상이 유지된다는 것을. 그걸 몰랐던 자신은 결국 사각지대에 있는 존재였다. 동네 사람들과 어울려 술을 마셔 댔다고 한들.
K는 쌀을 씻어 밥을 지었다. 그ㄷㄹ의 죄로 유지된 삶이었구나, K는 반짝반짝 윤이 나게 닦아 놓은 수저를 꺼냈다. 자신을 배신한 아비의 진실이 ㅁ엇인지 알고 싶어 이토록 노력했다니, K는 입술을 깨물었다.
뜨거운 맨밥을 꾸역꾸역 입안에 밀어 넣으며 K는 자신이 삼키고 있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알고 지내는 몇 년간 K는 그의 이름을 불러 준 적 없었다. 언제나, 그는 그저 J의 아비였다. 새삼 그 사실이 미안했다. J의 아비가 아니었다면, 그는 J의 연인일 수도 있었다. 그들의 관계는 그런 종류의 것이었을지도 몰랐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진실이 너무 많았다. 그런 오해 때문에 J의 아비는 지레 겁을 먹고 달아난 것이었다. K는 흑흑, 흐느꼈다.
“신부님, 밥 먹다 말고 울긴 왜 울어요."
J의 숨결에서 찬바람이 묻어났다. J는 외투도 벗지 않고 냉장고에서 밑반찬과 찬물을 꺼냈다. 그것들을 K의 앞으로 밀어주며 J는 말했다.
“신부님, 우리에게는 아무도 없어. 우리에게 서로가 있다고 말하면 죽여 버릴 거야.”
J와 K는 같이 사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여러 규칙을 다시 정했다. 그들은 쓸데없는 비밀 같은 것은 더는 가지고 놀지 않기로 했다. 함께 살면서 즐거울 수 있는 종류의 규칙이라면 무엇이든 좋았다.
그들 모두가 남의 비밀을 멋대로 사육했으며, 꾸며 낸 비밀로 한 인간의 가족이든 직업이든 잃게 만들 수가 있었다. K가 겪어 본 바 그것이 모든 동네의 감수성이었다. 소실부락과 같은 상상의 공동체는 어디에나 있고 너무나 많은지도 몰랐다. K와 J는 함께 그렇게 생각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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