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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

자존을 위해...

by thetraveleroftheuniverse 2015. 2. 21.

닭이 먼저일까? 달걀이 먼저일까?

며칠을 한껏 게으름을 피우며 편치 않은 마음으로 답을 찾으려 애쓴다.

게으르기 때문에 우울할까? 우울하기 때문에 게을러지는 것일까?

닭과 달걀에 대한 답을 찾지 못했지만 우울함과 게으름에 대한 답을 찾는다.

내 경우엔 게으름이 우울을 동반했다.

오랫동안 컴퓨터 자판을 들여다보지 못했더니 게을러지고 또 게을러졌다.  온갖 잡생각에 한없는 우울이 몰려오는 형국이다.

늪처럼 빠져드는 상황을 탈출해야 한다고 분연히 일어선다.

내가 살아있다는 느낌을 주는 유일한 것은 잡 글들이나마 그저 쓰는 것이었다.

쓰면서 사고하게 되고 사고하면서 깊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 중에 다소 위안을 얻는 것은 일종의 관념적 사치이겠지만 그 사치마저 없다면 자존마저 위협을 받는다는 사실을 통렬히 깨달았던 몇 달이었다.

 

어느 날,

그레고리우스처럼 모든 일상을 뒤로 한 채 어딘가로 떠날 수 있는 그날을 꿈꾸며…….

 

 

 

 

 

 

독일 김나지움에서 고전문헌학을 가르치는 교사인 주인공 라이문트 그레고리우스. 이순을 코앞에 둔 그의 삶은 단조롭고 경직되어 있다. 그런 그가 생애 최초로 일탈을 감행한다. 출근길에 만난 낯선 여인이 자살을 감행하려들자 그는 몸을 던져 막는다. 놀랍게도 여인은 그레고리우스의 이마에 숫자를 적고, 모국어를 묻자 그녀는 '포르투게스'라고만 대답한다.

 

 

그 단어의 독특한 울림에 이끌린 주인공은 우연히 손에 넣은 포르투갈 작가, 아마데우 드 프라두의 <언어의 연금술사>를 들고서 일정도, 기한도 정하지 않고 여행을 떠난다. 존경받는 의사이자 은유에 능한 시인이며 고귀한 정신의 귀족이자 저항운동가였고, 격정적인 사랑에 몸부림쳤던 프라두. 주인공은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프라두의 인생을 조합해나가면서 자신을 비춰본다.

 

 

 

그레고리우스가 읽어가는 가상인물인 아마데우 드 프라두의 <언어의 연금술사> 인용문들...

 

 

우리는 많은 경험 가운데 기껏해야 하나만 이야기한다. 그것조차도 우연히 이야기할 뿐, 그 경험이 지닌 세심함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 침묵하고 있는 경험 가운데,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삶에 형태와 색채와 멜로디를 주는 경험들은 숨어 있어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다가 우리가 영혼의 고고학자가 되어 이 보물로 눈을 돌리면, 이들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알게 된다. 관찰의 대상은 그 자리에 서 있지 않고, 말은 경험한 것에서 미끄러져 결국 종이 위에는 모순만 가득하게 남는다. 나는 이것을 극복해야 할 단점이라고 오랫동안 믿어왔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혼란스러움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익숙하면서도 수수께끼 같은 경험들을 이해하기 위한 왕도라고 생각한다. 이 말이 이상하고 묘하게 들린다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을 하고 나서야 깨어 있다는 느낌, 정말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든다. <28쪽>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 <28쪽>

 

 

뚜렷하지 않은 심연, 인간 행위의 표현 아래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비밀이 있을까? 아니면 인간은 자신이 만천하에 드러내는 행동과 완벽하게 일치할까?

아주 이상하게 들리지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 도시와 타호 강을 비추는 햇빛처럼 내 마음속에서 늘 변한다. 뚜렷하고 예리한 그림자를 만드는, 반짝이는 8월의 매력적인 햇빛은 인간에게 숨겨진 심연이 있다는 나의 생각을 터무니없는 것으로 느끼게 만든다. 신기루와 비슷한, 햇빛에 반짝이는 물결을 너무 오랫동안 바라보면 나타나는 진기하면서도 약간은 감동적인 환상처럼, 그러나 흐린 1월에 도시와 강이 그림자도 없는 희미한 빛과 지루한 잿빛 지붕에 덮이면 인간의 모든 행위는 알 수 없는 심연에 숨겨진 내적인 삶이 겉으로 드러내는 표현, 그것도 심연에는 전혀 가깝지 않으며 아주 불완전하고 거의 우스꽝스러우리만큼 약한 표현일 뿐이라는 것이 확실해진다.

이렇듯 기이하고 걱정스러운 내 판단의 불확실성에 더하여 내  삶을 계속 당혹스럽고 뒤숭숭하게 만드는 경험도 하게 된다. 내 자신에 관한 일인 경우에도, 그러니까 우리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자기 자신의 일에서도 다른 일에서와 마찬가지로 똑같이 흔들린다는 것이다. 즐겨 찾는 카페에 앉아 햇빛을 쬐면서 지나가는 아가씨들의 방울 소리 같은 웃음을 듣고 있노라면 내 모든 내면세계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충만하게 차오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 내면세계는 이렇듯 편안한 느낌에 푹 젖어 점점 더 뚜렷해진다. 그러나 마법을 깨뜨리는 구름이 햇빛을 가리면, 내가 모르는 일들을 불러일으키고 나를 휩쓸어갈 수 있는 감추어진 심연과 나락이 내 안에 있음을 갑자기 확연하게 느끼게 된다. 그러면 나는 해가 얼른 다시 나와서 표면화된 안온한 타당성을 부여해주길 기대하면서, 급하게 계산을 하고 기분을 전환해줄 소일거리를 찾아 허겁지겁 나선다. <37쪽>

 

황금 같은 침묵 속의 언어. 신문을 읽거나 라디오를 듣거나 카페에 앉아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듣다 보면 쓰인 글과 하는 말에서 보고 듣는 늘 똑같은 언어 때문에-어법이든 말장난이든 은유든-혐오감과 구역질을 자주 느끼게 된다. 그중에서도 가장 끔찍한 것은, 내 말에 귀를 기울여 보면 나 역시 끊임없이 똑같은 말을 한다는 사실이다. 이 말들은 소름이 끼치도록 낡았고 평범하며, 수백만 번 사용하여 닳고 닳은 것들이다. 이런 말들에도 과연 의미가 있을까? 물론 말은 나누는 기능을 한다. 사람들은 이 말에 따라 행동하고 웃고 울며,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가고, 종업원은 커피나 차를 가지고 온다. 하지만 내가 묻고 싶은 것은 그것이 아니다. 문제는 "그 말이 생각을 표현하고 있는가?"라는 점이다. 이런 말이란 그저 쓸데없는 수다가 새겨진 흔적으로써 사람들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효과음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

그럴 때면 나는 해변으로 가서 목을 길게 늘여 바람에 머리를 맡기고, 우리에게 익숙한 것보다 훨씬 더 차가운 바람이 불기를 바란다. 낡은 단어들과 진부한 언어 습관을 내 머릿속에서 날아가게 하고, 늘 똑같은 잡담의 찌꺼기를 묻히고 사는 나를 씻겨 깨끗한 정신으로 돌아오게 해줄 바람. 그러나 그런 다음에도 뭔가 할 말이 생기면, 예전과 조금도 달라진 바 없는 나를 보게 된다. 내가 원하는 정화는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난 이를 위해 무엇인가를, 언어로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 하지만 무엇을? 내가 나의 언어에서 탈출하여 다른 언어로 가고 싶다는 뜻은 아니다. 문제는 언어에서 도피하는 게 아니다. 언어를 새로 발명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내가 원하는 건 도대체 무엇인가?

난 아마 포르투칼어 단어들을 새로 만들고 싶은 모양이다. 새로운 문장들은 낡고 진부하다거나 흥분하여 기교를 부린다거나 의도적이지 않을 것이다. 이들은 포르투갈어로 된 문장의 중심을 이루는 원형이라서, 에움길이나 오염이 없이 다이아몬드와 같은 투명한 본질에서 바로 나온다는 느낌을 사람들에게 주어야 한다. 단어들은 윤을 낸 대리석처럼 흠이 없고, 자기 자신이 아닌 것은 모두 완벽한 침묵으로 변화시키는 바하의 변주곡 음색처럼 맑아야 한다. 가끔 언어의 진흙 구덩이와 타협하려는 마음이 내 안에 약간 남아 있다면, 그 마음은 화기애애한 거실의 부드러운 고요함이나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느긋한 평온함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끈적거리는 언어 습관에 대한 분노가 나를 에워싸면, 그 분노는 빛이 없는 우주의 맑고 서늘한 적막함 이상이어야 한ㄷ. 내가 포르투갈어로 말하는 유일한 사람이 되어, 소리 없는 열차를 끌고 가는 우주……. 종업원이나 이발사나 승무원은 새로운 조어를 들으면서 그 문장의 빛나는 간결함, 그 아름다움에서 놀랄 것이다. 내 생각에 이런 문장들은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 같다. 어쩌면 엄격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청렴하고 확고부동하게 서 있다는 점에서 이들은 신의 말과 비슷하고, 또한 과장이나 격정이 없이 정확하고 간결하여 단 하나의 단어나 쉼표도 뺄 수 없다는 점에서 언어의 연금술사가 엮은 시에 비견할 수 있을 것이다. <40쪽>

 

 

소리 없는 우아함. 익숙한 방향을 완전히 바꾸는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이 격렬한 내적 동요를 동반하는 요란하고 시끄러운 드라마일 것이라는 생각은 오류다. 이런 생각은 술 취한 저널리스트와 요란하게 눈길을 끌려는 영화제작자, 혹은 머리에 황색 기사 정도만 들어 있는 작가들이 만들어낸 유치한 동화일 뿐이다. 인생을 결정하는 경험의 드라마는 사실 믿을 수 없을 만큼 조용할 때가 많다. 이런 경험은 폭음이나 불꽃이나 화산 폭발과는 아주 거리가 멀어서 경험을 하는 당시에는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다.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고, 인생에 완전히 새로운 빛과 멜로디를 부여하는 경험은 소리 없이 이루어진다. 이 아름다운 무음에 특별한 우아함이 있다. <5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