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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

달에 울다/마루야마 겐지

by thetraveleroftheuniverse 2016. 1. 4.

 

 

 

 

 

시의 함축성과 소설의 서사성을 갖춘 천 개의 시어詩語가 빚어낸 한 편의 아름다운 소설<출판사 제공>

 

  봄 병풍에 그려진 그림은 중천에 걸려 있는 흐릿한 달, 동풍에 흔들리는 강변의 갈대, 그리고 걸식하는 법사(法師)다. 휘늘어진 버드나무 둥치에 털썩 주저앉은 법사는 달을 향해 쩌렁쩌렁한 목소리를 내며 격렬하게 비파를 타고 있다. 두 눈이 멀어 광대한 강변 일대에 쏟아지는 푸른 달빛을 보지 못한다. 그러나 때가 꼬질꼬질한 그의 오체는 삼라만상을 그대로 포착하고 무궁한 시간과 공간에 녹아들어있다. 팽팽한 현의 떨림은 미적지근한 밤기운을 자극하여 봄을 증폭시키고, 병풍 옆의 초라한 이불 속에 기어들어가 있는 소년(막 열 살)의 아직 두부처럼 여린 영혼에도 깊이 스며든다.<9쪽>

 

 

  소년은 산으로 겹겹이 둘러싸인 마을, 여기저기 실개울 소리, 안개처럼 아래에서 피어올라오는 몇만 마리의 누에가 쉬지 않고 뽕잎을 뜯어먹는 소리, 하얗고 통통하게 살진 그 벌레들이 짧은 일생을 충실하게 이어가는 소리를 들으며 자란다.

 

 

“사과꽃 냄새다,

그 향기는 반쯤 열린 창을 통해 스며들어온다. 며칠 사이 온 마을 나무가 한꺼번에 꽃을 피웠다. 내 후각은 특별난 데가 있다. 나는 적어도 두 종류의 사과꽃 향기를 가릴 수 있다. 하나는 야에코네 집 사과꽃 향기, 또 하나는 병풍 속을 구불거리며 흐르는 강 건너 상류에서 봄바람이 실어오는 향기다.”<15-16쪽>

 

 

  이제 소년은 꼭대기에는 풀이 자라고 모초로 지붕을 이은 집, 사과나무 아래 풀어놓고 기르는 여러 색깔의 닭,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연꽃과 민들레꽃, 날아다니는 하루살이……. 그곳에 살고 있는 소녀, 소년의 아버지가 죽인 남자의 딸인 야에코를 사랑하게 된다.

 

 

  여름 병풍에 그려진 그림은 산기슭에 걸린 초승달, 천지에 무성한 초록 풀, 그리고 거지 법사다. 높다란 바위 머리에 앉은 법사는 흠집 많은 비파를 여인처럼 끌어안고 격렬하게 술대를 치며 은은한 목소리로 노래하고 있다. 그 음향은 후텁지근한 밤기운에 눌리어 멀리까지 가닿지는 못한다. 눈곱이 잔뜩 낀 법사의 눈은 앞이 보이지 않기에 오히려 여러 쌍의 남녀가 교합하는 모습을 한꺼번에 여기저기서 생생하게 포착한다. 바짝 마른 몸은 강렬한 기운을 쏟아내고 시든 뇌로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환영을 차례차례 만들어낸다. 그 힘은 가늠하지 못할 만큼 커서 병풍 밖까지 미친다. 얇은 이불 속에 드러누운 젊은 남자의 가슴속 깊이 스며들어 피보다 더 뜨거운 영혼을 크게 동요시킨다.<34쪽>

 

 

  소년은 20대가 되었다. 야에코와 사랑을 나누게 된다.

 

  가을 병풍에 그려져 있는 그림은 그림자 하나 없는 명월, 가을바람에 굽이치는 초원, 그리고 거지 법사다. 흠집투성이 비파를 등에 멘 장님 법사는 회오리바람에 휘청이며 삭막한 황야를 헤매고 있다. 어디에도 사람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짐승의 기척조차 없다. 그러나 비쩍 마른 그의 몸은 추억으로 가득 차,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행복했던 나날들을 생생하게 기억해낸다. 교교한 보름달의 독기 서린 빛이 등골까지 스며들어 골수를 파먹고 있지만 법사는 그 사실을 전혀 모른다. 강풍이 쏟아내는 대지의 비통한 절규는 어딘지 비파 소리를 닮았다. 그 소리는 병풍 옆에 깔린 호사스러운 이불 속에 들어가 있는 청년을 압도하고 영혼까지 마비시킨다.<67쪽>

 

 

  소년은 30대가 되었고 다른 남자의 아이를 낳은 야에코를 여전히 사랑하지만 야에코가 마을을 떠난다.

 

 

  가을 병풍에 그려져 있는 그림은 잘 닦인 겨울 달, 얼음과 가누눈에 갇힌 산정호수, 그리고 거지 법사다. 자신이 파낸 볼품없는 눈 동굴 속에 앉아 있는 법사는 얇은 누더기를 걸친 채 미동도 하지 않고 낮에도 여전히 팽창를 계속하는 얼음의 비명 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다. 비파를 타고 싶어도 손이 곱았고, 노래를 부르고 싶어도 열 때문에 목이 부어 있다. 그러나 얄팍한 늑골과 마른 살에 덮인 빈약한 가슴 속에서는 풍요로운 선율과 끝없는 낱말이 끓어올라, 파도처럼 바람처럼 되풀이되고 있다. 흐느낌 같기도 한, 호수의 얼음이 삐걱거리는 소리는 맑디맑은 한기를 자극하여 시간의 흐름까지도 얼어붙게 하고, 병풀 곁의 낡은 이불에 기어들어가 있는 중년 남자의 패기 한 조각 없는 회색빛 영혼을 마비시키고 있다. 전기담요와 전기요 사이에 끼어 있는 그 사내는 40년하고 10개월을 산, 현재의 소년이다.<92쪽>

 

 

  마을을 떠난 야에코가 다시 마을로 돌아올 때까지 소년은 사과농사를 지으며 여전히 그녀에 대한 그리움으로 고통스러워한다. 병풍 속의 법사는 소년을 대신해 이 지방 저 지방을 정처 없이 떠돈다.

 

  “아아.”법사는 한 숨을 쉰다.

  긴긴 잠에서 깨어났다고 착각한 법사는 천천히 이렇게 중얼거린다. “아아, 좋은 꿈을 꾸었어.” 그 말이 마지막이었다.<114쪽>

 

  이제 법사도 아버지와 어머니도 야에코마저 숨을 거두었다. 이제 소년은 또 10년후 쯤 지점에서 만개한 꽃을 단 사나과무 한 그루가, 또는 대여섯 그루가, 또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사과나무가 보이기 시작한다.

 

  병풍 속 법사와 소년, 사과나무와 야에코 등으로 이루어진 서사도 놀라웠지만 읽는 내내 병풍 속 그림과 대비된 실제의 배경들을 이미지화 할 수 있어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했다. 마루야마 겐지의 다른 소설들이 무척 궁금하다. 흉내라도 내 보고 싶은 열망이 부끄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