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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다반사

3. 그녀의 수기 3 - 아버지의 김밥

by thetraveleroftheuniverse 2009. 9. 20.

가을입니다.

9월의 산들바람이 살랑 살랑 꼬리치며 나부끼는 날엔

그놈들을 따라 마실가고 싶은게 우리네 마음입니다. 

색색으로 예쁜 김밥도 싸고 후식으로 먹을 커피까지

발 걸음도 가볍게

9월 산들바람을 따라 가는 마음은 마냥 부풀어 오릅니다.

그녀는 원래 김밥 싸는 것을 참 좋아합니다.

고슬 고슬 냄비밥을 하고 참기름 과 소금을 살짝 뿌려 주걱으로 살살 섞어 한켵에 놓고,

달걀, 단무지,햄 ,게맛살,우엉에 당근데친것을 준비합니다.

김발에 김을 놓고 식혀놓은 하얀 쌀밥을 얻고  깻잎몇장을 깐다음

나머지 재료들을 색색이 배치해 꼭꼭 눌러가며

두껍께 말아 놓은 김밥을 얄싹하게 썰어 

색색맞춰 그릇에 담는 순간이 김밥싸는 재미중에 으뜸입니다.

요즈음은 값도 싸고 편리한 1000원 2000원 짜리 김밥이 골목 골목마다 팔리고 있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손맛이 느껴지는 손수김밥은 별미 입니다.

가끔씩 김밥이 먹고 싶어지면

그날은 여전히

아버지가 그리운 날 입니다. 

목까지 타고 오르는 긴 그리움입니다.

 

아버지는 오랫동안 소작농사를 지으시다

때마침 군산에 생긴 영진주철에 입사하셨습니다.

워낙 성실하고 우직하셨고 손재주도 많으셨던 분이라서 금새 일을 익히셔셔

남들보다 빠르게 작업 반장까지 진급하셨다 합니다.

소소한 권력도 생기시고 인정도 받으시니

동네의 송씨아저씨. 박씨아저씨, 말더듬이 최씨아저씨까지 너뎃명쯤 입사시켜

가끔 추석이나 설날엔 돼지고기 몇 근쯤의 뇌물도 받으신것 같습니다.

집에서 군산 팔마재에 있는 공장까지 20리,

버스도 다니지 않는 길을

자전거를 끌고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녁에 나가셔서

우리가 잠이 들고 만 늦은 시간에 들어 오시곤 하셨습니다.

가끔은 야간작업을 하셔서 며칠 씩 못 들어 오신날도 다반사였습니다.

아마 그때가 영진주철이 가장 돈을 많이 벌 때 였나 봅니다.

이웃집 초등학교 선생님 월급이 그때 겨우 20만원 이짝 저짝이었는데

아버지는 28만원 30만원을 월급으로 가져오신다고

그녀의 엄마가 동네 아줌마들에게 자랑하시던 소리를 듣고

은근히 어깨에 힘이 들어가던 시절입니다.

큰딸인 그녀, 남동생 둘, 여동생하나  3년 터울로 올망 졸망 4남매를 거느리시고

뽀얋고 야무진 살짝 사납고 부지런하던 아내와

해마다 쌓이는 논 밭문서에

하루에 10시간 12시간 하는 주물 일 쯤은

행복의 열쇠였을 것 입니다.

그런 엄마 아빠의 행복한 시간이

그녀와 동생들에게 어쩜 가장 풍요했던 시간이 아니었나

지금에사 그렇게 생각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시골이라서

남들이 못 먹던 삽립 카스테라를

일주일에 두서너번 반쪽이라도 먹을 수 있었던 행운이 아이들에게 있었습니다.

아버지 공장에서 새참으로 나누어줬던 카스테라를

아버지는 새끼들 줄 욕심으로 드시지 않고

집으로 하나씩 둘씩 가져오시면

어머니는 똑 같이 네 등분해서

참새새끼들 마냥 쪽쪽 받아먹었던 아이들 입으로 가져다 주고

네등분으로 나누던 중 부서진 카스테라 가루만 어머니 몫이었던 그런 시절이었습니다.

그럼 아버지의 새참은 무엇이었을까요 ?

그녀의 아버지의 최고의 식단은

수북한 흰쌀밥과 구수한 누룽지었습니다.

출근하시기위해

새벽녁 밥상머리에서 오손도손이야기를 나누던

아버지 어머니의 이야기를

자는 척 깨여 있으며 듣는 재미 또한 솔솔 하던 시절입니다.

그 새벽녁에 어머니는 도시락을 두개씩 싸곤 했답니다.

귀하디 귀한 김에 고슬 고슬 하얀 쌀밥을 담고

그 위에 오직 하나 새우젖만 넣었던 김밥이었습니다.

그 김밥이 그렇게 그 시절엔 먹고 싶더니...

그런 김밥이 유난히 그리운 날

색색 예쁜 김밥을 싸서

아버지 산소로 소풍을 가고 싶습니다.

아버지,

당신 덕분에

건강하고 풍요로운 삶을 살았습니다라고

전해드리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