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처럼 나풀거리던 눈송이가 급기야 우수수 쏟아 붓기 시작한다. 폭설에 몸을 옹송그리며 걷던 사람들마저 자취를 감추자 고요가 찾아온다. 세상과의 단절감이 주는 은밀한 즐거움, 음악의 볼륨을 높이자 sting의 목소리는 더 깊어간다.
"It may not be the romance that you had in mind
But you could learn to love me given time"
당신이 꿈꾸어 오던 로맨스는 비록 아닐 수 있지만 시간이 흐른 후 언젠가는 당신이 나를 사랑하게 될 수도 있겠지……<Sting/ Practical Arrangement>
한껏 고조된 그의 호소가 폭설을 뚫고나오는 햇살처럼 온 몸을 시리게 한다.
"비록 지상낙원을 약속할 수 없지만 고독한 삶에 대처하기 위해 나는 실제적인, 지극히 현실적인 합의를 제안하겠다."
는 그의 청혼가에 대답하지 않을 자 누가 있을까? 10년 전, 아니 5년 전에 지금의 "나" 였더라면…… 물밀듯 밀려드는 회환으로 멍한 시선을 창밖에 두고 있을 때, 그녀가 쭈뼛거리며 문을 연다.
"따뜻한 차 한 잔"
우울을 금지 당한 아쉬움도 있지만 익숙한 듯 낯선 여인네의 발걸음에 호기심이 치솟는다.
"커피 말고 허브차로."
묻기도 전에 주문을 한다. 빨개진 양 볼에 하얀 눈을 소복이 인 그녀의 머리는 새치인지 눈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녀가 몰고 온 찬 기운이 머뭇거리더니 이내 사라진다. 금세 그녀의 머리에서 엷은 수증기가 피어 올라온다.
"민트?"
"네."
잔 두 개를 꺼내 나란히 놓으며 엷은 미소를 흘린다.
"이심전심이네요."
웃는 듯, 찡그린 듯 분간할 수 없는 표정이었지만 어쩐지 그녀 앞에 앉지 않을 수 없는 어떤 끌림이 있다.
"산책하는 내내 팟캐스트를 들었어요."
뜬금없는 말에 민트향을 음미하던 고개를 들어 그녀를 건너다본다.
"간이식당에서 저녁을 사 먹었습니다
늦고 헐한 저녁이 옵니다
낯선 바람이 부는 거리는 미끄럽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여, 당신이 맞은편 골목에서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는 정처 없습니다
당신이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는 정처 없습니다
사방에서 새소리 번쩍이며 흘러내리고
어두워가며 몸 뒤트는 풀밭,
당신을 부르는 내 목소리
키 큰 미루나무 사이로 잎잎이 춤춥니다
스마트폰을 뒤적이던 그녀는 동의도 구하지 않고 한껏 가라앉은 목소리로 낭독을 해댄다.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감추려 고개를 숙이며 올라오는 민트향과 그녀가 내뿜는 시향을 맘껏 들이마신다.
"제가 웃기죠?"
쑥스러운 그녀의 표정에 무심코 입 꼬리가 올라간다.
"이런 날은 이러지 않을 수 없어서."
그저 그녀의 시선을 오롯이 받는다.
"제가 좋아하는 이성복 시인의 서시예요."
고개를 끄덕인다. 처음 듣는 시였지만 "당신을 부르는 내 목소리 키 큰 미루나무 사이로 잎잎이 춤춥니다." 라는 싯구가 긴 여운을 남긴다.
"양페이같은 남자를 기다려요."
수수께끼 같은 말을 덧붙인다.
"허기사, 난 리칭처럼 예쁘지 않으니까."
그녀는 헛헛한 듯 웃는다. 도시 모를 이야기였던지라 가만 듣는 게 상책이다.
"혹시 위화라는 중국 소설가 알아요?"
"허삼관 매혈기?"
"네, 맞아요."
활짝 핀 꽃처럼 그녀가 웃는다. 덩달아 입 꼬리를 올려보지만 어쩐지 불안하다. 모르는 이야기에 가락을 맞출 수 없어 영 어색하기만 하다.
"기차가 낳은 아이 양페이가 불의의 사고로 죽고 나서 7일 동안 연옥에서 이승의 인연들을 만나 그동안의 앙금도 풀고 사랑을 재확인하는 과정이 담겨 있어요."
"책 제목이?"
"아, 제 7일요."
그녀가 쑥스럽게 웃는다. 그녀의 양 볼이 다시 빨개져있다. 자글거리는 눈주름위로 흘러내린 새치에 시선을 두며 그녀의 세월을 가늠해 본다. 속마음을 들킬까 시선을 돌린다.
"주인공 양페이와 리칭은 애인 사이였나요?"
무엇인가 물어야했다.
"우담바라처럼 반짝했다 사라진 사랑과 우담바라처럼 반짝했다 사라진 결혼을 했던 관계였어요."
"행복한 관계였네요."
"그렇죠. 행복했지만 쓸쓸해요. 결국 리칭은 진짜 사랑을 알면서도 떠나죠. 부를 쫒아 인생을 낭비하고 결국 자살하고 말지요."
가만 고개를 끄덕여본다. 흔한 이야기 아닌가?
"여전히 당신을 사랑해. 양페이를 떠나며 리칭이 말해요."
3류 연애이야기군요, 라는 말을 할 뻔했다.
"나는 영원히 당신을 사랑해. 리칭의 말에 양페이가 대답해요. 이 대목에서 너무 울었어요."
순식간에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모른 척 그녀로부터 시선을 거두며 창밖을 본다. 그녀의 시선도 움직였다. 그저 창밖을 응시하며 모른 척 했지만 그녀의 훌쩍이는 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바람이 크게 울었다. 세찬 바람을 따라 이리저리 눈송이들이 마구 흩날렸다. 볼륨을 높였던 음악도 사라졌다. 바람소리와 그녀의 낮은 목소리가 함께 윙윙거렸다.
"아직 순수하시네요."
자꾸 삐져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며 눈을 맞춘다.
"제가요?"
눈가의 주름을 접으며 그녀가 빤히 쳐다본다. 고개를 끄덕인다.
"이튼 날에 양페이와 리칭은 서로 만나요. 둘은 방 한 칸 셋집으로 돌아가 서로를 안아요."
어서 빨리 3류 신파조 사랑이야기가 끝나길 기다린다. '새치가 더덕더덕 앉은 나이에 아직도 사랑타령이라니, 참' 자꾸 짜증이 몰려온다.
"변해가는 세상에 적응하지 못해 그늘이 되고 만 사람들을 이야기해요. 작가의 따뜻한 시선이 느껴지기도 하고. 중국 사회의 부조리마저 유머러스하게 풀어놓았어요."
뜨거운 물을 붓자 민트향이 서성인다. 다시 음악의 볼륨을 높여 바람소리를 죽인다. 여전히sting은 속삭인다. 시를 읊듯 그의 목소리가 둘 사이의 침묵을 파고든다. '그래, 그거였지, 인생. 장예모.' 기뻐 소리라도 지를 판국이었지만 가만 찻잔을 내려놓는다. 장예모의 인생이란 영화의 원작가가 위화였으니 충분히... 그녀는 줄기차게 "제 7일" 속에 나오는 이야기들을 주절거렸다. 선물이리리. 선물이었다. 한 치 앞도 분간치 못할 그 날, 그렇게 그녀는 선물 보따리를 풀어 놓더니 또 홀연히 자리를 턴다. 눈보라가 좀 그쳐주길 기다려보자 했지만 사양했다.꾸부정한 어깨를 늘어뜨리며 그녀는 문을 나섰다. 눈보라를 뚫고 걷는, 낯설었지만 익숙했던 그녀의 뒷모습이 오래도록 마음가를 떠나지 않는다.
'일상다반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인의 첫 소설집 (0) | 2016.01.27 |
---|---|
그대들에게, 2016년을 시작하며 (0) | 2016.01.09 |
자요? 잘자요. (0) | 2015.12.21 |
세계문학 엿보기 모임 풍경 (0) | 2015.12.19 |
그가 낭독하고 나는 듣는다. (0) | 2015.12.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