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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

불필요한 문장들과 다시 서사하기 /박인성

by thetraveleroftheuniverse 2014. 7. 17.

[2011 경향 신춘문예]평론부문/ 박인성-불필요한 문장들과 다시 서사하기 - 경향신문

 

단 하나의 문장을 위해 수많은 문장들을 버릴 것을 요구받은 적이 있다. 심지어 이 문장을 서술하기 위해 고민을 거듭하다가 결국 ‘나’라는 주어를 발화하는 순간 버려지는 그 이면의 수많은 ‘나’의 그림자들에 대하여 생각해 본 일이 있다. 그런 것을 생각하지 않았다면, 혹은 그 모든 ‘나’들이 처음부터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면 아예 소설 같은 건 쓰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사람들 또한 있다. 이 글은 굳이 쓰지 않았어도 좋았을 그러한 문장들에 대한 것이다.1)

하나의 완결된 세계로 향하는 내러티브의 방향성 속에서 제 스스로 방향을 잃은 이 문장들은 기존의 소설 문법이라는 잘 만들어진 항아리로부터 넘쳐흐르는 과잉에 다름 아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완결지향의 서사에 있어서 불필요한 이 문장들이 그 스스로 넘치는 과잉에 의해 형성하는 ‘이상한 가역반응’이다.모든 근대적 서사가 에덴동산으로부터의 추방, 몰락 이후의 문장들이라면(폴 드 만), 이미 하나의 결말로부터 소급적으로 재구성되는 소설의 문장이란 ‘서술하고 있다’는 감각 혹은 서술되는 ‘현실’reality)이라는 기만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서사 없이는 ‘나’또한 없다는 이 몰락 이후의 위기의식 속에서 모든 주체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며 위장 속에서부터 서사화한다. 이처럼 현실에서 요구되는 삶의 감각으로 그저 서사화할 뿐인 자동기계들이 형성하는 것이 현실의 소문이자 곧 소문의 현실이라면, 그 배후에는 소문조차 되지 못하는 이야기들이 있다. 그 이야기들이 녹아들어 있는 이면의 세계가 있다. 에덴동산의 대리보충으로서의 구성된 현실이 아니라, 몰락한 자들이 애써 무시하고 싶었던 잡동사니가 되어버린 삶의 풍경으로서, 우리는 그러한 모든 실패한 시도들을 가리켜 하나의 현실 구성에는 ‘불필요한 문장들’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중세 회화에서 직선 원근법의 탄생이 바로 그것을 ‘바라보는 주체’의 위치를 고정시켜 줌으로써 소실점 너머의 영역을 그림으로부터 추방했다면, 바로 근대 소설의 리얼리즘적 작법 또한 바로 이러한 문장들을 그 자신의 영역 바깥으로 배제했다. 그러나 굳이 읽지 않았어도 상관없었을 그 문장들이 어느 순간 소실점으로부터 불쑥 튀어나오며 불길한 예언마냥 우리를 응시한다. 좀비라는 형상으로, 구경꾼들의 엿보기로, 혹은 무의미한 전생의 기억으로. 그 가장 순수한 이야기들이 되돌아오면서 소문들이 횡행하던 현실에 균열을 내고, 그 모든 ‘나’에게서 탕! 하고 천둥 같은 총소리가 울린다. 그러한 총소리와 함께 그 불필요한 문장들을 전면에 내세운 장편소설들의 본격적인 등장 속에서, 각기 다른 세 명의 소설가가 집중적으로 우리 내부의 서사-기계와 그 회로를 교란한다. 김중혁의 <좀비들>, 윤성희의 <구경꾼들>, 박형서의 <새벽의 나나>2)는 이러한 문장들을 대변하고 있으며, 그들이 모종의 방법으로 공모하고 있는 이야기 세계는 각기 조금씩은 다른 방식으로 이러한 서술 불가능하고, 동시에 불가피하며, 더욱이 현실에는 불필요한 문장들과 관계를 맺고 있다. 이 글은 바로 그 이야기들에 대해 굳이 부연하게 될 또 다른 불필요한 문장들이 될 것이다.

되돌아오는 좀비들(김중혁의 <좀비들>)

 

21세기의 대중문화를 향유하는 중요한 키워드 가운데 하나는 바로 ‘좀비’zombie)다.3) 좀비는 더 이상 음지 속의 B급 영화가 아니라 대형 블록버스터 영화의 소재로 떠올랐으며, 우리나라에서도 특히 인터넷 웹툰을 중심으로 하여 좀비를 대상으로 하는 이야기들이 대중문화의 중심으로 육박해 가고 있다. 바야흐로 오랫동안 지하에 묻혀 있던 좀비들이 지상으로 기어 올라오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완전히 낯선 사건이 아니다. 좀비들의 존재가 처음에는 기괴함(uncanny)으로 다가오지만, 어느 순간 그들이 우리의 이웃, 가족, 혹은 아주 낯익은 존재였음이 밝혀지듯이, 그들은 더 이상 신비주의나 초자연으로 치부되지 않으며, 이미 과학적 상상력의 범주 안으로 편입되었다. ‘이질적’인 타자와의 ‘친밀한’조우라니! 이러한 역설 속에서 그들의 ‘재’등장은 어디까지나 ‘귀환’이라 부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그들의 귀환을 단순히 ‘실재’The Real)의 귀환만으로 정의 내리기를 주저하게 될 것인데, 우리의 대중문화에 대한 향유와 소비의 과정에서 그들은 한편으로는 여전히 상상계적인 존재이자, 돌연한 실재의 귀환이면서, 동시에 상징계로 편입되는 고정되지 않는 속성을 지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불확실한 토대 위에서 좀비가 단순히 애매성의 존재라는 설명만으로는 부족하다. 주목할 만한 것은 그들의 지속적인 등장 자체가 죽음을 반복재생산하고 과잉 소비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죽음에 대한 모종의 공모의식을 만들어 내고 있다는 것이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언급처럼, 죽음의 공포를 완전히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다만 가능한 것은 그러한 죽음 자체를 현실의 흔한 사건으로 만듦으로써 그것에 익숙해졌다고 자신을 위안하는 것 정도인데, 좀비 영화만큼이나 부각되고 있는 고어 영화나 슬래셔 영화 등에서 대량으로 반복되는 잔인한 신체 절단과 살해 행각들은 바로 이러한 죽음의 보편화 속에서 죽음조차도 과잉 소비하는 대중들이 그 진부함에 익숙해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 시체를 좀비로 만들어버리는 순간 존엄이 사라져버려. 좀비에게 총을 쏘면서 절대 인간을 향해 쏜다고 생각하지 않지. 나무토막을 쏘는 것과 다를 게 없어. 좀비들이 움직이는 물체라는 것 말고 무슨 차이가 있겠어. 왜 좀비들을 계속 만들어내는지 알아? 그건 군인들을 훈련시키기 위해서야. 인간도 아니고 무생물도 아닌 좀비들을 쏘게 해서 군인들의 죄책감을 없애려는 거야. 죄책감 없이 쾌감만으로 누군가를 쏠 수 있게 하는 거지.”332~333쪽)

장장군의 입장을 반영하는 케겔의 위와 같은 언술이 이러한 진부한 죽음의 반복과 과잉 소비의 경향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김중혁의 서술은 이제 정반대로 그러한 ‘대상’으로서의 좀비들에 대한 서술로서는 전혀 불필요한 문장들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설정을 바꾸면 뭐가 보이는데요?”채지훈의 물음에 이경무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많은 것들이 보이죠, 아주 많은 것들. 우리가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들.”204쪽) 인간에게 필요한 일정 범위의 주파수로서만 표시되는 상징적 신호로서는 도저히 포착되지 않는 ‘무신호의 블랙홀.’과잉된 존재들, 그리고 그들의 기괴한 외관 혹은 그 허울 너머에 있는 불필요한 문장들. 그들의 존재의 깊은 곳으로부터 솟구쳐 나오는 저 목소리들. 죽음과 직면하는 일은 인간이 어떤 기만도 없이 자기 삶의 진실과 마주치는 유일한 순간 이다. 따라서 죽음은 삶에 있어 그 자체로 불필요한 것이다. 이 불필요한 것과의 대면이 우리를 경악하게 하고 떨게 한다.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죽음을 삶의 대극으로서 파악하여 그 영역 바깥으로 몰아내거나, 혹은 죽음 자체를 삶 내부의 흔하디흔한 현상으로 받아들이는 것 둘 중 하나이다. 종교가 첫 번째 방법의 가장 확실한 믿음을 제공해준다면, 고리오 마을의 사람들은 두 번째 방법을 선택한 셈이고 이러한 입장에서만 죽음 자체를 무의미한 것, 비천한 것으로 만들어버린 장장군과의 공모적인 관계를 형성하기도 한다. 고리오 마을 사람들이 벌이는 다이토 게임이란 바로 죽음을 보편화하는 그들의 삶의 태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들이 유희의 대상으로서 시험하는 것은 그들 자신의 목숨 그 자체이며, 이 유희 속에서 그들은 죽음을 다시 삶의 일부받아들인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해서 장장군은 죽음 자체를 삶의 영역으로 받아들였다기보다, 죽음을 삶의 하녀로 봉사하게 한다. 그에게 있어 죽음은 철저하게 삶에게 굴복해야 할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니체에게 있어서 소크라테스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철저하게 삶을 죽음보다 고귀한 것으로 고양시킨 것처럼, 그러한 방식으로 장장군은 죽음의 공포까지도 그의 현실을 위해 이용할 것이다. 바로 그러한 마신(魔神)적 현실논리에는 현실에서 온전하게 재현될 수 없는 반(半)조형물인 ‘좀비’의 형상으로 죽은 자들을 되살리는 힘이 담겨 있다.4) 그리하여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죽음이라는 저 압도적인 실재의 이미지마저도 “좀비”라는 표상 속으로, 그리고 하나의 소비적 대상으로 격하될 때, 그것은 대상을 죽음도 삶도 아닌 영원한 마지막 순간의 반복 속에, 애도 불가능한 현존의 고통 속에 위치시킬 뿐이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다시 이 세계로 불려나와 저렇게 살고있다는 게, 아니 저렇게 지내고 있다는 게, 안쓰러웠다. 누군가 죽은 나를 좀비로 되살린다면, 좀비로 되살린 다음 다시 죽이려고 든다면, 나는 그의 목덜미를 물어뜯고 뼈를 비틀어 부숴버리고 창자를 꼭꼭 씹어 먹고, 먹고 먹어서 음식쓰레기조차 남지 않게 해치워버릴 것이다.(334쪽)

위의 언술은 채지훈의 생각일 뿐만이 아니라, 애도 받지 못한 좀비들 그 자체가 지니는 ‘충동’그 자체라 할 만하다. 그 충동 아래 이제 우리는 우리가 되살려낸 그 죽음의 형상들에게 오히려 잡아먹힐 운명으로, 그들의 텅 빈 눈구멍5)에 비친 한낱 살덩이에 불과한 대상의 위치로 격하될 것이다. “좀비와 대면한다는 건 허공을 들여다보는 일이고, 깊은구멍을 들여다보는 일이고, 죽음과 마주하는 일이다.”105쪽)

우리가 그들을 움직이는 목석 정도로 생각했던 것이 하나의 착각에 불과하며, 이제 진정한 죽음 그 자체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인간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러한 진실의 울림이 다시 그들의 “우, 웨, 우, 우, 웨”107쪽)하는 기괴한 울음소리에 섞여 있는 멜로디처럼 솟구쳐 오를 것이다. 좀비들, 그리고 무차별적인 죽음의 진실에 의해 겨냥당하는 대상이 되는 한에서 현실의 논리에 의해 움직이는 “스마트 블릿”같은 것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좀비들에게서 들려오는 현상계의 언어가 되지 못하는 멜로디에 귀를 기울이는 것처럼, 김중혁의 불필요한 문장들이란 이제 하나의 거대한 줄거리를 형성하지 못하는 작은 조각들에 말을 거는 것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중심의 이야기와 어울리지 못하는 작은 이야기들이 세상에는 있게 마련이고, 그걸 억지로 연결하려 들면 주변의 작은 이야기가 틀어지고 만다.”343쪽) 이 작은 이야기들을 돌조각에 비유할 수 있다면, 돌에 말을 거는 것은 비어있는 그들의 표면에 그들의 올바른 이름을 새겨 넣는 것이다. 죽어버린 시체, 군사실험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그 마지막 순간만큼 우리와 같은 진실(죽음)을 공유하는 사람으로서. 이러

한 작은 이야기들을 새롭게 바라보는 하나의 태도가 존재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애도’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이를테면 그것은 단순히 죽음을 돌덩이로 만드느냐, 거기에 다시 이름을 새겨 넣느냐의 차이이기도 하다. “단순한 차이가 때로는 중요한 차이가 되기도 한다. 이름 하나가 많은 것을 바꾸기도 한다.”75쪽)

 

이러한 애도에 대한 김중혁의 표현은 바로 ‘허그 쇼크’라는 제품의 이름이다. “충격이라는 건 말이죠, 받아들이는 쪽에서 마음만 먹으면 아무 일도 아닌 게 될 수 있는 겁니다. 우리는 새로운 물건을 발명한 게 아니라 충격을 받아들이는 자세를 개발한 겁니다.”12쪽)

 

 더 나아가 이제 우리는 충격을 받아들이는 것뿐만 아니라, 죽음 자체를 기만하지 않는 태도를 배워야만 하는 시대에 있다. 이 이야기에서 뚱보 130이 좀비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단순히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아직까지도 전체 이야기 속에서 온전히 이해될 수 없는 작은 파편이자 좀비라는 이름이 되어버린 그 형상 너머에 있는 그의 여분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다시 말을 거는 노력 속에서만, 우리는 김중혁의 이 소설을 일종의 묘비문학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경계에 선 구경꾼들(윤성희의 <구경꾼들>)

 

윤성희의 소설이 ‘세계에 대한 자아의 특수한 태도’복도훈)와 연관된다면, 그 태도란 세계나 타자에 대한 원한감정이라기보다도 현실로부터 밀려난 사물들, 그리고 삶의 잊혀진 문장들을 새롭게 읽어내려는 노력이다. 김중혁이 보편화되는 좀비의 형상에 새롭게 대화를 시도한다면, 윤성희의 구체적인 화법은 쉽게 발화될 수 없는 ‘나’자신의 불가능한 이야기를 어쨌든 시작하는 것으로부터 발생한다. 객관적으로 ‘나’를 서술하는 것은 과연 가능한가? <구경꾼들>에서 ‘서술하는 주체’narrating subject)로서의 ‘나’는 확고부동한 1인칭의 서술자로서 발화하지 않는다. 이 소설은 ‘나’가 발화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혹은 우연적으로 ‘나’의 부분이나 파편들과 연결되어 있는 불가해한 집합체를 보여주고 있다. 그것 중 어떤 부분을 빠뜨린다고 해서 이 구성체는 전혀 달라지지 않을 것처럼 보이면서, 동시에 그것이 얼마나 사소한 조각이든 하나라도 빠져버리는 순간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릴 것처럼 위험스럽게 보이기도 한다.

아주 단순하게 가정해보자. 거의 3대에 걸친 이야기를 ‘나’의 서술에만 의지해서 서술하고 있는 이 소설 속에서 아버지가 계속해서 사대독자인 채로 남아있었다면, 혹은 그 이전에 아이스박스에 이틀이나 갇혀 있다가 발견되지 않았다면, 또 ‘나’를 임신한 상태에서 어머니가 옆집 꼬마의 피아노 소리를 듣지 않았다면, 그리하여 ‘나’가 탄생하지 않았다면 이 이야기는 시작되지도 못했을 것이다. 가정법 ‘라면’if)으로 시작하는 이 문장들은 명시화된 인과관계의 고리를 약화시키고 기원(origin)이 아닌 ‘흔적’으로서의 원인을 상상하는 작업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러한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원인에 대한 재구성만으로 이해될 수 있는 이야기란 존재하지 않는다. 천의무봉(天衣無縫)이라 생각되는 그 어떤 직조물도 조금만 각도를 기울여 보는 순간 보이지 않았던 왜상적(歪像的) 구멍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러한 과정에서 이 소설은 원근법의 탄생에 비견할 만한 기존의 소설 문법의 형성과 서사 공간의 구도로부터 잊혀진, 바로 그러한 불필요한 구경꾼의 시선의 위치, 새로운 서사적 공간을 창출한다.그러므로 이 ‘나’는 ‘전지(全知)’라는 말로는 설명되지 않는 서술의 시도이다. 이 ‘나’는 모든 서술의 배후에 존재하는 사후적인 존재라기보다도, 매 순간 소격화되며 그때마다 갱신하는 존재가 된다. ‘나’가 자꾸만 ‘엿보게’되는 중핵 사건 배후의 인물들에 대한 문장들은 엄밀하게는 서사가 필요로 하는 적재적소의 배치로부터 이탈한 과잉된 문장들로서, 정보에 대한 배후탐색을 넘어서서 원인을 ‘아는’것이 아니라 타자를 ‘이해하기’위한 노력으로서 비약한다. 큰삼촌의 일기장을 두고 “내 자식이라고 모든 걸 다 알 수 있는 건 아니야”89쪽)라는 할머니의 말처럼, 그리고 “너만의 큰삼촌은 이 일기장에 없을지도 몰라”90쪽)라는 경고처럼, 사실 그 작은 조각이 ‘죽음’이라는 명백하게 뚫린 불가해한 형상의 구멍을 메우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불가능성을 알면서도 이 모든 문장들을 통해 다시금 충격을 받아들이는 것은 결국 윤성희에게 있어 세계에 대한 대응 ‘태도’의 문제가 된다.

“잊지 마세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최선을 다해 기억하는 거예요.”88쪽) 이 문장에서 윤성희에게 있어 보다 강조되는 것은 단순히 ‘기억하는 것’보다는 ‘최선을 다해’의 측면이 아닐까? ‘나’의 서술은 자꾸만 사건 그 자체에 대한 묘사보다는 그 배후의 존재들과 그 내력을 향해 흘러가고 그 사이에 많은 문장들이 그 불가해한 지점으로 떨어져 내린다. 큰삼촌의 죽음 이후에 세계를 여행하며 처음 만난 사람들로부터 그들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하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여행처럼, 윤성희의 이 소설은 바로 그러한 삶의 구멍 뚫린 부분을 이해하기 위해 말조차 통하지 않을 것 같은 타인의 이야기를 듣는 것으로 나아간다. 전혀 다른 삶, 전혀 다른 언어로부터 공유될 수 있는 공통점이란 그 공백으로부터 드러나는 삶(죽음)의 불가해성이다. 온전한 형태의 문장보다는 그 채워질 수 없는 공백들을 최선을 다해 이해하려 할 때 거기에서는 그 자체로 순수한 이야기가 들려온다.

아버지가 대답했다. “그냥 단어들을 머릿속에 펼쳐놓아요. 그리고 가만히 있어요. 그러면 그 단어들이 알아서 저절로 이리저리 연결되는 순간이 찾아와요. 일곱 개의 단어로 한 이야기가 탄생되기도 하죠.”그런 식으로 부모님은 일 년 동안이나 여행을 다닐 수 있었다.(112쪽)

 

<좀비들>에서 좀비의 구멍 뚫린 눈구멍을 마주하는 것은 우리에게 불안과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일이었지만, 그 불가해한 구멍을 통해서만 우리는 그들을(그들을 투사함으로써 내부의 결여를 메우려 했던 우리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할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때로는 그러한 결여를 온전히 보는 것보다는 ‘엿보는’방식으로, 그리고 더 나아가 비딱하게 보는 방식으로 등장하는 그 온갖 이야기들을 만나게 된다. 그 구멍 뚫린 삶을 그 자체로 온전히 보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어디까지나 ‘최선을 다해’그것을 보려고 노력하는 한에서 우리는 그것의 주변만을 엿보는 ‘구경꾼들(spectators)’이 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우리는 배우(actor)이면서 구경

꾼으로서, ‘세상’이라는 무대 위에 상연되고 있는 완전한 하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무대 배후에서 들려오는 소곤거리는 이야기들을, 동시에 우리 자신의 맹점을, 결여를 본다. 이제 나의 이야기보다 타인의 목소리에 보다 귀를 기울임으로써, 윤성희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비극적 인식을 하나의 공감대로서 확대해 나간다.

이러한 지점에서 ‘나’는 바로 필연적으로 일인칭 단수로 귀결되지 않는다. 이 소설은 주체의 완결된 서술 불가능성을 알고 있으면서도 적어도 망각이라는 기만이 아니라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하나의 태도에서만 성립한다. 그렇기에 이 윤성희에게 있어 기억하는 한 모든 것들은 중핵 사건과 위성 사건으로 나뉘어 구분되지 않는다. ‘나’를 구성하는 그 모든 것은 우연적이지만 동시에 불가피한 것이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마당에 묻었던 그 항아리를 나와 작은삼촌이 함께 파내는 것처럼, 묻었다고 생각한 존재를 다시 파내면서 그들은 그것을 묻었던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기억함과 동시에 그것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항아리 내부의 구멍을 다시 접하게 될 것이다. 물론 상실된 대상에 대한 영원한 애도는 불가능한 것이다. 애도가 종결되는 순간 그것들은 잊혀서 사라질 운명에 있다. 그러나 망각이 아니라 애도 속에서 우리는 출구를 찾는다. 또한 ‘현실’reality)의 추상과 그 논리는 여전히 유효하다. 아니, 오히려 죽음 자체를 평범하게 만들어 버리는 과잉된 논리는 이미 자동기계의 회로처럼 우리에게 각인되어 있다. 윤성희의 노력이란 바로 이 현실의 논리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작동할 수는 없지만, 그 경계선에서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고 있는 ‘구경꾼들’의 충동을 통해 다시금 실재와 마주치며 그 구멍 뚫린 현실을, 그리고 그 현실‘들’에 얽혀 있는 다면체로서의 ‘나’를 갱신해 나간다. 헛기침만으로 갈비뼈가 부러질 수 있다면, 부러진 갈비뼈가 영원히 붙지 않는 일도 가능할 것이다. 혹은 작은삼촌이7번이나 깁스를 해야 했듯이 갈비뼈는 혹은 다른 어떤 뼈라도 다시 부러지게 될 것이다. 이런 문장들은 완결된 세계의 서사에 있어서는 불필요한 것들에 불과하다. 그러나 하나의 애도가 끝나도 그러한 불필요한 문장들은 이미 육체에 각인된 균열로 우리를 다시 이끌어간다. 그 균열을 통해 현실을 들여다보는 구경꾼들이 다시 ‘나’를 엿보고 있다.

그리고 그저 이야기들(박형서의 <새벽의 나나>)

 

그곳에 먼저 이야기가 있었다. 치앙마이에서 와서 이제는 사라진 ‘지아’라는 한 창녀에 대한 이야기. 이 이야기를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암시적으로 이 원형적인 이야기는 소이 식스틴의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기억됨으로써 모든 이야기들이 모이는 집결지가 된다. 그리고 바로 그 환상적인 이야기가 발생시키는 괴물 같은 흡입력이 외국 남성의 타액과 자본을 끌어들임으로써, 소이 식스틴의 그 모든 이야기들은 길 주변의 판자촌들처럼 그곳에 달라붙기 시작한다. 바로 거기에 소이 식스틴과 그 모든 창녀들이 살아가기 위한 가장 확실한 본능이 있다. ‘거기엔 고립을 두려워하는 본능만 있을 뿐 별다른 의지나 계획이 없었으니’23쪽)

 

어쩌면 모든 이야기는 이 단편적 문장으로부터 발생한다. 그리하여 다시 이 소설의 이야기는 2009년 마흔한 살의 레오가 다시 ‘나나’를 방문하여 15 년 전 그가 소모해버린 그 과거의 이야기를 되살림으로써 시작된다. 15년 전의 소이 식스틴을 구성했던 하나의 이야기의 이름이 ‘플로이’라면, 이방인이자 구경꾼으로서 레오의 이야기는 그 주변부 어느쯤을 배회하는 작은 파편에 불과하다. 원래대로라면 그것은 손쉽게 ‘플로이’라는 이야기의 배후로 밀려나 금세 잊혀질 운명이었다. 소이 식스틴의 본능은 그러한 것

이므로. 소이 식스틴 그 자체의 생리가 설명될 수 없는 한에서, 그 삶의 어두운 구멍들은 다시금 지아를, 플로이를, 라다를 필요로 하여 새로운 이야기를 탄생시킬 것이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결국 레오의 기억을 통해 이루어지는 서술에 의지하고 있지 않은가? 모종의 선택으로 인해 모든 것은 이 이야기를 전달하는 하나의 의식으로 귀결되지 않는가를 질문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정반대의 질문이 튀어나온다.

정말 이 모든 서술은 정말 모종의 선택에 의하여 이루어지는가? “그게 이 질문의 핵심이야. 네가 누구를 구할 것인지, 누구를 희생할 것인지 선택하는 것보다 선택을 할 것인지, 하지 않을 것인지가 더 중요하다고.”60쪽) 이미 쓰러져 내리고 있는 몸뚱이의 본능 앞에서 찡쪽의 이러한 언술은 선택 자체의 가능성을 상정하는 것이 곧 선택 불가능성에 대한 인식을 가리는 하나의 덮개임을 보여준다. 정말로 우리가 우리의 운명을 선택할 수 있다면, 서사의 운명 또한 그 모든 선택과 배열 속에서 정해질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운명을 결정할 수 없으며, 심지어 사후적으로 어떤 선택의 결과에 대한 원인과 그 구멍을 이해하는 일조차도 불가능하다. 서사화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이 ‘서술하는 나’란 ‘이 순간 사유하고 있는 존재’가 아니라 ‘조금 전에 사유했던 기억을 가진 존재’228쪽)일 따름이므로. 그리하여 모든 순간의 선택이란 이 모든 결과에 대해 사후적으로 형성된 원인의 한 환상에 불과하지 않은가? 근대적 서사는 바로 이러한 선택의 환상에 의하여 성립된다. 그와는 반대로 레오가 플로이를 떠날 수 있었던 그 모든 순간에 그가 선택할 수 있었다면, 이 이야기는 시작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만약 선택의 순간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우리에게 있어 그것이 불가피하면서 동시에 불가능하다는 아이러니에 의해서만 그러하다. 이러한 방식으로 박형서가 드러내고자 했던 이 이야기의 운명이란 결국 레오가 소이 식스틴 사람들의 전생을 보는 능력과 닮아 있다.

하지만 깁스를 벗고 나서도 배낭을 꾸리지 못해 하릴없이 매트리스 위를 뒹굴던 어느 날, 한 시간 간격으로 열대성 강우가 쏟아지던 그 눅눅한 오후에 레오가 본 건 꿈도 환상도 아니었으며 정지된 이미지의 연속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건 레오가 자기 취향에 따라 멋대로 편집하도록 허락지 않았다. 그 자체로 이미 완벽한 이야기였다.(92쪽)

 

다시 그 이야기들이 레오의 전체 서술에서 하나의 이야기로 귀결되지 않는 한에서 그 모든 이야기들은 이야기의 완전한 결말에는 불필요한 문장들, 일종의 여담(餘談)에 불과하지만, 박형서의 말처럼 이미 그 자체로 완벽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물론 이러한 이야기들을 늘어놓는다고 해도 여전히 레오는 고작 한 명의 이방인, 그리고 구경꾼(餘談)에 불과하다. 그가 수많은 전생을 보았을지라도, 그것을 타인에게 전달한다고 할지라도, 그 이야기들은 다시 언어를 경유하고 재맥락화되며, 이국의 돈 많은 남성인 레오가 소이 식스틴과는 전혀 다른 운명을 살고 있는 한에서 그의 이야기가 소이 식스틴의 창녀들을 구원해줄 수는 없는 것이다. 거기에 새삼스러운 선택의 여지는 없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박형서는 다시 그 모든 것이 선택이었다고 바꿔 말한다. “서른두 살의 레오는 선택하지 않는 것 역시 선택의 한 방식이라는 걸 모를 정도로 순진한 청년이 아니다. 될 대로 내버려두는 것, 눈을 감고 운명을 기다리는 것 또한 엄연히 선택이다. 좋든 싫든 우리는 선택을 하지 않고선 한순간도 살아 있을 수 없다.”332쪽) 버스 사고를 통해 자기 자신의 죽음과 직면했던 레오가 그 모든 것이 다시 선택이라 말함으로써, 이제 우연과 운명은 그 자신의 죽음이라는 비극적 인식 속에서 그들이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단어였음을 확인한다.

“우연과 운명은 거의 정반대의 의미를 가진 단어지만, 레오가 소이 식스틴에서 욘을 만난 건 우연이자 동시에 운명이었다.”45쪽) 처음에는 우연으로 그러나 다시 운명으로 수쿰빗 소이 식스틴을 향하게 되는 레오에게 있어 그 두 가지 단어가 조화를 이루는 순간은 바로 그가 플로이를, 소이 식스틴을, 그리고 라다를 그리워하게 되는 순간이다.

레오는 주위에 행인이 없는 틈을 타 한 번에 한 명씩, 조심스럽게 그들의 이름을 중얼거려 보았다. 그러자 묘하게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 많은 사연이 세월에 의해 마모되고 떠나가더라도, 어쨌든 그리움이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19쪽)

선택의 불가능성, 그리고 이미 선택했다고 하는 환상에 의해 구성된 이야기 자체의 구멍 뚫린 틈과 마주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을 다시 선택으로 받아들이는 이 과정에서 결국 모든 문제는 ‘고작 이야기’그 자체로 귀결된다. 레오가 보는 전생이란 바로 ‘이해할 수 없는 기억들’ 불필요한 문장들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그리움을 통해 기억하는 힘이란 의식이 아니라 본능에 의한 것이다. 동시에 이제 그것은 선택 자체의 불가능성마저도 넘어서는 또 하나의 선택이기도 하다. 그리워하는 한에서 소이 식스틴에서 모든 것은 이야기의 형태로서만 남는다. 레오가 설령 이 마지막 순간까지 플로이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할지라도, 그의 실패가 성립되는 것은 레오에게 플로이의 이야기가, 그리고 레오를 그리워하게 된 소이 식스틴 사람들에게서 그의 이야기가 잊혀지는 순간부터일 것이다. 그래서 박형서는 차츰 옅어질 그리움 때문에 너무나 많은 불필요한 문장들을 이 소설 안에 집어넣었다. 그것이 그에게 있어 우연이면서 운명인 것처럼. 충동과 비극적 인식 사이에서 가장 간단한 질문은 무엇보다도 “그들은 왜 그런 이야기를 써야만 했는가?”하는 것이다. 윤성희의 경우, 그녀는 “일어나는 일마다 이름을 붙여 부를 수 있다면 이야기를 한다는 일은 불필요한 행위가 될 것”)이라는 존 버거의 말을 인용했다. 모든 것에 대하여 이름 붙일 수 있

다면, 그리고 이름표를 붙인 모든 사건의 기록부를 하나의 인과관계 속에서 일직선의 연표로 정리할 수 있다면, 이 모든 문장들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그러나 그 거대한 명명행위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고작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연표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은 타인에 대하여, 사물에 대하여 상상하는 일 정도이다. 그것은 박형서의 말마따나 우리가 해석할 수 있을 뿐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 비밀을 알고 있는 소설가들은 단 하나의 문장에 있어서도 예비적인 편집증자가 된다. ‘서사적 과거’라는 마술적인 언어가 머뭇거리며 그 자신을 되돌아보는 것은 언제나 해석밖에 할 수 없는 우리가 비로소 이해

하기 위한 노력 속으로 들어갈 때인 것이다.

현실과 서술의 세계에서 순수한 우연은 순수한 필연만큼이나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각기 다른 세 편의 소설이 그 내부에서 나름의 우연과 조화의 소통에 대하여 말할 때, 우리는 그 이야기들이 기존의 소설들이 불필요하게 생각했던 문장들의 세계로 돌입했음을 깨닫게 된다. 하나의 도미노가 합리적 거리를 뛰어넘어 다른 하나의 도미노에 도달하는 일, 하나의 사건 이면에 또 다른 진실이 숨겨져 있음을 짐작하는 일, 그리고 우리의 모든 선택의 순간에 거기에서 모종의 불가해함을 느끼는 일. 이 모든 문장들은 일련의 결론적 서사로부터 가감 없이 사라져도 좋은 것들이다. 그러나 동시에 완결된 서사의 소실점 너머에서 출현하기 시작한 바로 그 문장이 우리의 약동하는 심장을 겨냥한다. 그것은 여전히 그저 이야기 그 자체일 뿐이다.

그렇다면 <새벽의 나나>에서 레오가 들려준 그 많은 전생들처럼 이제 우리에게는 그것들과 어떻게 대화해야 하는가 하는 해결되지 않은 질문이 남아 있다.

한편으로 이 세 편의 이야기는 포스트모던의 원심적 유희로부터 다시금 구심적인 응집의 운동을 만들어낸다. 물론 그것은 단순히 ‘삶은 그래도 살 만한 것’이라는 위로를 남발하는 방식의 이야기가 아니다. ‘부러진 갈비뼈는 영원히 붙지 않을지도 모른다.’그리고 거기에서 이야기가 끝나지도 않는다. 우리는 다시 미끄러져 내려간다. 그렇게 그 모든 불필요한 문장들은 우리를 이 운동의 중심에 있는 어두운 실재의 구멍을 들여다보는 충동으로 이끌어 간다. 이제 다시 그러한 충동과 동시에 참을 수 없는 비극적 인식 사이에서 소설이 제시해야 할 새로운 서술의 미학이 요구된다. 되돌아오는 10년도인지, 혹은 전혀 새로운 2010년도인지 확언 할 수 없는 현실인식 속에서도 물론 여전히 우리는 서사하고 있다. 문제는 현실의 서술이 아니라 서술의 현실이다. 그 전도를 통해 김중혁, 윤성희, 박형서가 제시하는 서술의 자기-(재) 인식은 그래도 ‘최대한 노력하는’하에서 서사의 운명이 맞닥뜨리게 된 불길한 예언들에 대하여 응답하는 것이 아닌가.

 

각주

1) 그러한 문장들을 여전히 우리가 ‘서술’이라고 부른다면, 이러한 서술의 문제는 더 이상 서술 그 자체에 대한 자기성찰의 입장에서 머물러 있는 것만은 아니다. 메타적인 서술의 자기성찰이 결국 하나의 초월적인 입장을 벗어날 수 없다면, 그와는 반대로 이 문장들이 향하는 것은 상승적 초월이 아니라 일종의 하강적인 흐름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2) 이 글에서 대상으로 하는 작품과 이후의 본문 인용은 모두 다음의 서지사항을 기준으로 한다 : 김중혁, <좀비들>(창비, 2010); 윤성희, <구경꾼들>(문학동네, 2010); 박형서 <새벽의 나나>(문학과지성사, 2010)

 

3) ‘ 좀비’가 어째서 다른 어떤 ‘언데드’undead)보다도 가장 압도적인 형상으로 대중문화에 근접해 왔는지에 대해서는 보다 부연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최근의 우리 문학에서 undead 가 현실로부터 배제된 불법체류자, 노숙자, 난민, 유맹(流氓) 등 예외적 존재에 대한 비유형상(figuration)이라면, 좀비는 그러한 정의에 속하는 존재들보다도 훨씬 더 무분별한 충동 속에서 현실 속의 우리 자신을 겨냥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우리는 그들을 불완전하게나마 재현할 수 있지만, 반대로 그들의 눈에는 아무것도 비치지 않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현실의 모든 것을 겨냥하며, 집어 삼킨다. 참고 : 복도훈, ‘언데드(undead)’ <문학과 사회> 2007년 가을호

 

4) 좀비의 그로테스크함이란 현실에서는 온전한 형태의 조형물로서 되살아날 수 없는 그들의 불가능성 자체의 현시이다. 그것은 피그말리온이 갈라테아에게 생명을 부여하는 것과는 달리, 재현할 수 없는 죽음 그 자체를 일시적으로나마 상징적 표상으로 붙잡아놓는 변신이자 일종의 ‘저주’로밖에 설명할 수 없다. 이처럼 대상에게 얼굴을 만들고 목소리를 부여하는 프로소포페이아(prosopopeia)의 힘은 부분대상을 향유하는 주체의 강력한 힘 가운데 하나이지만, 장장군의 파괴적인 현실 논리에 의해 되살아나는 좀비의 형상은 현실에 속하는 부정성의 재현이 아니라, 현실 자체의 부정성으로서 도출된다.

 

5) 좀비의 텅 빈 눈구멍을 보는 것은, 순간 라캉이 활용하고 있는 전지전능한 ‘암사마귀의 홑눈’의 응시에 포획되는 것과 같다. 이러한 타자의 응시를 통해, 욕망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주체는 그 자신이 타자의 향유의 대상이 되는 것으로부터 불안을 느끼게 된다. 참고 : Roberto Harari, Lacan’ Seminar on “nxiety” Introduction, Other Press, 2001, p. 251.

 

6) 윤성희, 앞의 책의 ‘작가의 말’ 309쪽 참고.[2011 경향 신춘문예]평론 심사평 “서사의 본질, 새롭게 문제 삼는 뚝심 신선”- 경향신문

 

총 27편이 응모된 평론 분야에서는 ‘사건’이라는 시의적 개념을 통해 2000년대 한국문학을 ‘타자’와 ‘정치’의 측면에서 주로 접근하고 있다. 고통받는 타자를 통해 환대나 연대를 강조하고, 본질적 정치 개념을 통해 문학의 특성이나 문단 정치까지 아우르는 문제 제기 능력이 돋보이는 글들이 대세였기 때문이다. 텍스트 선정 능력과 이론-분석의 균형 감각에 허점을 보이는 글들도 여전했다. 검증이 끝나지 않은 젊은 작가들을 선택하려면 논리가 더 탄탄해야 하고, 추상적 이론을 설득시키려면 텍스트가 희생되는 위험을 감수해야 함을 잊지 말기 바란다. 심사 과정에서 최종적으로 3편이 논의의 대상으로 압축되었다.

 

201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 심사를 맡은 평론가 이광호씨(왼쪽)와 김미현씨가 응모작들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있다. 김기남 기자 kknphoto@kyunghyang.com

 

‘상처받은 마녀의 귀환:최승자론’은 시 평론 중에서 가장 안정적이었고, 대상 시인에 대한 전체적이고 통시적인 안목이 돋보였다. 최승자의 시가 초기부터 최근 시집 <쓸쓸해서 머나먼>으로 이행되면서 어떻게 상처를 치유하는 마녀가 쓰는 ‘시간의 시’로 돌아오게 되는지 면밀하게 보여줬다.  그러나 이런 발생론적이고 환원론적인 접근이 오히려 시인의 개별성을 약화시켰고, 시인에 대한 지나친 몰입이 공감을 강요하는 측면이 강했다.

‘눈감기로 복원되는 비트의 세계:김중혁과 이기호의 소설’은 기호와 이미지가 강조되는 21세기적 환경에서 통감각적 사유를 지향하는 김중혁과 이기호의 소설을 통해 문학적 상상력이 어떻게 확장되고 소통되는지를 정치하게 읽어냈다. 하지만 두 작가를 교차 분석하는 형식이 오히려 글의 전체적 논리에 부담으로 작용했고, 분석의 최종 결론이 기존 논의들에서 멀리 나아가지 않는 한계를 보였다.

최종 당선작으로 결정된 ‘불필요한 문장들과 다시 서사하기’는 서사의 개념이 소설 속 불필요한 잉여의 문장들로 구성되는 실패한 시도들을 통해 어떻게 완결지향적인 서사를 교란시키면서도 구심적인 응집력을 만들어내는지 진지하게 고찰하고 있다. 김중혁의 <좀비들> 과 윤성희의 <구경꾼들>, 박형서의 <새벽의 나나>를 통해 불가능하면서도 불가피한 서사의 이런 본질 자체를 새롭게 문제 삼는 뚝심이 신선했다. 박형서 소설에 대한 논의에서는 다소 논리적 비약이 보이고, 이와 연관되어 어느 한 대상에 논의를 집중하면 더욱 탄탄한 글이 되었을 거라는 아쉬움이 있지만, 패기 넘치면서도 진중한 접근방식이 신뢰감을 주었다. 앞으로

의 발전 가능성과 활동이 더욱 기대되는 당선작이다.

[2011 경향 신춘문예]평론 당선 소감 “현실에 응전하는 문학

의 힘 느껴”- 경향신문

신춘문예 평론부문 당선자 박인성씨(25)는 서강대 국문학과 03학번. 그가 대학에 막 입학한 시기는 바로 가라타니 고진이 선언한 ‘근대문학의 종언’이 한국 문단에 충격을 던진 때였다. 평론가들에게 ‘종언’에 반박하는 것은 풀어야 할 숙제와 같았다. 박씨에게도 마찬가지였다.

“000년대 화두가 근대문학의 종언이었는데 종언 이후에 죽었다고 생각했던 문학이 돌아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새로운 경향의 작품들이 현실을 응시하는 힘을 보여주고 문학이 새롭게 가져야 할 윤리를 제시하고 있다고 느꼈고 그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박씨는 올해 출간된 세 편의 장편소설인 김중혁의 <좀비들>, 윤성희의 <구경꾼들>, 박형서의 <새벽의 나나>를 ‘불필요한 문장들’이라는 개념으로 묶어서 풀어냈다. 하나의 작품으로 평론을 쓰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닌데, 세 편의 소설을 대상으로 완성도 있는 평론을 쓰기는 더욱 힘들다.

그러나 2010년 나온 장편들 가운데 공통적 경향이 존재한다는 생각에 세 편의 작품으로 하나의 평론을 쓰는 모험을 감행했다. 박씨는 “현실에 응전할 수 있게 하는 힘을 가지게 하는 것은 소설의 내용이라기보다는 어떻게 서술할 것인가에 대한 작가적 의식”이라며 “세 작품이 취하는 서사 전략이 자본주의 현실논리 이면에 감춰진 새로운 영역을 보여주고 있다고 봤다”고 말했다. 박씨는 “저를 포함한 동시대 젊은이들은 불안한 사회경제적 상황 아래서 내면화된 불안과 싸우고 있다”며 “불안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젊은이들이 자기 내부로 깊이 침잠하고 은둔하는 경우가 많은데 문학이 불안을 건강하게 이겨낼 수 있는 해법을 제시해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박씨는 “문학에 관심을 갖게 해주고 방향을 제시해준 우찬제 선생님에게 감사하고, 글을 쓸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써야만 한다고 말해준 이대성 형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며 “무엇보다 저를 믿고 문학 공부를 계속할 수 있게 지원해준 어머니께 감사드린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