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순간 예상치 않았던 낯선 곳에 당도하는 것이 삶이고, 그곳이 어디든 뿌리를 내려야만 닥쳐오는 시간을 흘려보낼 수 있어. 그리고, 어딘가로 떠나고 싶다는 꿈만이 가까스로 그 뿌리를 지탱해준다고 한들 그것이 무슨 대단한 비밀이라도 되는 건 아닐 테지.<66쪽/프랑스어 초급과정>
자신의 경우처럼 어떤 뜻밖의 순간에 끊어버리기도 하지만 세상이라는 천을 짜는 여신은 무늬를 만들기 위해서 처음 타래에서 풀었던 실을 반드시 남겨둔다. 헝클어진 실 중에서 어떤 것을 서로 이을지 모르지만 처음부터 무늬를 정해놓았을 것이다. 사람은 자기 운명을 짜고 있는 베틀을 엿볼 수 없다. 예측할 수 없을 때는 순리를 따르는 편이 나을 것이다. <111쪽/스페인도둑>
완은 초기 안전 길이를 계산하는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번지점프의 줄을 얼마의 길이로 설정할 것인가. 스릴을 즐기기 위해서는 길게 뻗고 싶겠지만 그러나 안전해야 한다. 화분 속의 식물도 비슷한 계산을 할 것이다. 과학자들은 MRI 기술을 이용해 화분 속 식물이 뿌리를 내리는 과정을 촬영했다. 식물은 화분의 안쪽 공간은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가장자리를 향해 뿌리를 뻗어나가다가 화분이라는 벽에 부딪히면 성장을 중단했다. 화분 크기만큼만 뿌리를 내리는 것이다. 번지점프에서처럼 화분 속의 식물에게도 안전한 초기 설계가 필요할지도 모른다.<111쪽/스페인도둑>
이따금 고양이와 소년의 이야기를 생각한다. 소년은 높이 쌓아올린 장작더미 안의 비밀 은신처에 들어가 울고 있다. 그에게 주어진 세상은 수치심과 절망뿐이다. 소년은 머리 위의 커다란 더미를 버티고 있는 장작 하나를 빼내 무너뜨림으로써 그 자리에서 모드 걸 끝내버리기로 결심한다. 주머니 속의 과자가 기억났으므로 일단 그것을 꺼내서 먹는다. 그런 다음 장작을 향해 손을 뻗으려는 순간 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난다. 고양이가 다가와 젖은 뺨을 핥기 시작했을 때 소년은 그 축축하고 까끌까끌한 감촉에 스르르 눈을 감고 만다. 그것은 소년의 비통한 계획을 철회할 만큼 충분히 따뜻하다. 소년은 알고 있다. 고양이가 핥는 것은 소년의 눈물이 아니라 입가에 붙어 있는 과자 부스러기다. 훗날 소년은 이렇게 쓴다. ‘진정 순수하게 사랑받고 싶거든 주머니 안에 과자 부스러기를 조금씩 갖고 있는 편이 좋다.’ 이것은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이다. 사랑의 외피 위에 무슨 일이 개입하고 있는지 캐내려 하지 말고 그 순간의 온기에 온몸을 맡기라는 충고 때문만은 아니다. 나는 알고 있다. 이 이야기는 배고픈 고양이와 슬픔에 빠진 소년의 이야기이다. 허기와 절망, 그런 감정들은 행복의 변방에서 서로를 알아본 순간 경계를 넘어 조용히 연대한다. 서로 이용하지만 거짓은 끼어들지 않는다. 스치듯 짧은 포옹을 끝낸 뒤 영원히 다시 만나지 않기를 바란다는 점에서 아마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연대일 것이다.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날씨로만 이루어졌던 열세 살의 그 여름 날, 어떤 고독과 죽음도 그렇게 만났다.<116/T아일랜드의 여름 잔디밭>
엄마는 인생에 대단한 것은 없고 모두가 고독 속에서 죽어갈 거라고 생각하면 행복하지 않다는 사실이 조금은 견디기 쉬워진다고 한다. 아마 그런 식으로 사라의 죽음이라는 목차에다 자신의 고독을 슬쩍 끼워 넣었을 것이다. 죽음같이 센 쪽에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낸다면 그 앞에 잠시 고독을 내려놓는 것쯤 대수롭지 않은 일일지도 모른다.<147쪽/T아일랜드의 여름 잔디밭>
하지만 사람은 살게 마련이었다. 이원은 자신의 잦은 실수에 대한 이유를 마련해놓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이 너무나 빠르기 때문이라는 거였다. 이원은 눈도 빠르고 생각도 빨랐다. 돌발상황에 대처하는 동작도 빨랐다. 그렇게 빠르다보니 다른 사람보다 한 발 앞서서 미래로 넘어가는 것이고, 이미 과거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과거에 속한 물건에 대한 생각과는 단절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빠른 것은 부주의하거나 조급한 것과는 엄연히 달랐다. <155쪽/독일 아이들만 아는 이야기>
균형이라 여러 개 사이에서 저울질하는 것 같지만 실은 자기에게 집중하는 일이다.<179쪽/독일 아이들만 아는 이야기>
그때 마리는 언니가 마리를 오해하듯 자신 역시 언니를 잘 알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뭔가를 잘 안다는 건 또 무슨 뜻일까. 그것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고 싶어하는 젊은 사람들에게나 중요한 문제일 뿐이었다. 때로 마리는 스스로가 자신의 인생조차 오해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말로 자기 인생의 이방인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마리는 늘 낯선 시간을 원했고 낯선 곳으로 데려댜주는 남자를 사랑했다. 그런데 진정 낯선 곳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제 마리에게 남은 낯선 곳은 뒷걸음질쳐서 발에 닿는 어떤 시간의 시원에 있는 것일까. <224쪽/금성녀>
【서울=뉴시스】오제일 기자 = 1995년 데뷔, 등단 20년째인 작가 은희경(55)이 뿌리내리지 못하고 부유하는 우리를 썼다. 일본의 시인 사이토 마리코가 한국어로 쓴 시 '눈보라'의 한 구절을 제목으로 옮겨온 작품집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다.
사이토 마리코는 '눈보라'에서 무수하게 내리는 눈 속에서 각기 하나의 눈송이의 궤적을 좇아 상대방이 선택한 눈송이보다 늦게 떨어지면 이기는 놀이를 담담하게 적었다. '그 눈송이는 지상에 안 닿아 있다'는 시의 마지막 구절은 표제작을 비롯해 '프랑스어 초급과정' '스페인 도둑' 'T아일랜드의 여름 잔디밭' '독일 아이들만 아는 이야기' '금성녀' 등 6편의 단편을 관통한다.
대학 입시를 위해 상경한 여고생 '안나'(눈송이), 신도시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한 '그녀'(프랑스어 초급과정), 9년을 해외에서 머물다 신도시로 돌아온 '완'(스페인 도둑), 어린 나이에 엄마와 함께 유대인이 많이 사는 낯선 나라로 떠나온 소년(T아일랜드의 여름 잔디밭), 부모의 품을 처음으로 떠나온 '이완'(독일 아이들만 아는 이야기) 등 은희경은 각 작품의 인물을 낯선 곳에 두고 관망한다.
"익숙해지면 괜찮지 않나요? 낯설고 먼 곳도 익숙해지면 가깝게 느껴지잖아요. 그녀가 내놓은 견해에 남자는 동의하지 않았다. 이 아줌마, 뭘 몰라도 한참 모르네. 익숙해진다는 건 다 헛소리예요."(66쪽·프랑스어 초급과정)
은희경이 주목한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는 지상에 닿지 못하고 방황한다. '금성녀'에서 자살로 숨을 거둔 언니의 장지가 될 고향을 찾았다가 낯선 풍광을 마주하는 '마리'도 마찬가지다. "마리는 스스로가 자신의 인생조차 오해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야말로 자기 인생의 이방인인지도 모를 일이었다."(223쪽·금성녀)
각 단편 속 뿌리를 내리고자 하는 인물들의 떨림이 우리의 그것과 닮아 공감을 일으킨다. 이어 작품집 마지막에 자리한 '금성녀'는 몸을 떠는 각 단편의 인물들을 한 데 모아 우리를 위로한다. 한 데 모인 눈송이는 단단하다.
"우리는 각자의 인생을 살지만 끊임없이 타인과 스치고 있어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의 삶과 어떤 식으로 얽히고 스치고 풀어지는 순간이 있었을 테고, 또 그것이 인생을 바꿔놓았는지도 모른다, 그런 이야기를 쓰고 싶었던 것 같아요."(문학동네 2014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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