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깟네, 알깟어!”
80년 가을, 에메랄드 빛 하늘, 바람결에 묻어오던 최류 가스의 알싸함, 그리고 폭풍 전야처럼 뭔가 꼭 터질 것 같았던 오후, 속절없는 평화가 소운동장에 내려와 있었다. 시절의 흉흉함도 잊은 채 풋풋한, 아직 고등학생 티를 벗어나지 못한 1학년 여학생들의 반 대항 족구대회, 인경의 공격차례였다. 두 번째의 헛 발길질을 보상이라도 하 듯 인경의 발끝에서 차 몰린 공은 센타 수비의 바짓가랑이 사이로 쏜살같이 굴러갔다. 젖 먹던 힘을 다해 달렸다. 일루를 거쳐 2루로 돌진하려다 인경은 일루 베이스에 그대로 멈췄다. 순전히 그녀 때문이었다. 2루 심판을 보던 P, 초록색 점퍼에 짧게 자른 머리, 하늘빛과 합체된 그녀의 웃음, 양 진영의 환호와 야유를 배경으로 인경을 일루에 묶어둔 P의 웃음은 평생 인경의 가슴에 못처럼 박혀 있다. 망설이기만 하던 여학생 족구 대회의 반 주장을 맡으라던 선배가 참 철없이 보였다. 시절이 이런데, 저쪽에선 난리라던데, 하릴없이, 속절없이, 양심 없이 운동회라니, 그것도 인경에게 주장씩이나, 그렇게 며칠을 완강히 버티다가 은근슬쩍 출전을 약속한 것은 순전히 그녀 때문이었다. 선배 P, 영문과 3학년, 학장의 딸, 호기심에 찾아 간 학습장에서 우연히 목격한 그녀의 비장했던 얼굴, 그녀가 심판조가 되었다는 말에 인경은 서슴없이 출전을 결심했다. 그녀도 그런데. 그녀도 약속했다는데. 그녀도 함께 한다는데. 오늘도 인경은 30년도 더 지난 그 시간 속을 헤매고 있다. 심지어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이 시점에서. 인경은 피식 쓴 웃음이 나왔다. 아침에 꾸역거리며 겨우 삼킨 호박죽의 신물이 식도를 타고 역류했다. 변기에 얼굴을 처박고 몇 번을 헛구역질을 한다. 하지만 쓰린 식도에서 올라오는 것은 쓴 신물뿐이다. 인경은 아프다. 유방에서 시작 된 암이 전신에 골고루 전이 되었다 한다. 6개월 시한부의 인생이란다. 그저 어제가 오늘처럼 오늘을 내일처럼 산다. 죽음을 재촉하는 통증마저 일상이라고 여기고 싶다. 단지 자신의 죽음에 가장 많이 울어 줄 엄마에게만은 자신의 고통을 보여주고 싶지 않다. 엄마로부터 떠나 새로운 장소 에서 혼자 잠을 자듯 죽고 싶다는 계획으로 지리산 기슭을 찾는다. 일상을 일상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그곳에서 다시 정리했던 밥집을 차린다. 죽음도 일상으로 받아들인 다는 그럴 듯한 명목을 내세웠지만 인경은 기실 모든 의욕을 잃은 상태이다. 그나마 인경을 버티게 하는 것은 아직 못다 쓴 자전적 소설 <검은 사과> 때문인가? 어쩜 결말을 향해 치닫고 있는 소설 속 시간대처럼 인경의 인생 또한 결말을 향해 치닫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죽는 일만 남았던 인경에게 낯선 전화가 한 통이 온다. 인경의 혼돈과 방황으로 점철 되었던 젊은 시절의 인연, 강석경의 전화였다. 석경을 만나 석경과 함께 했던 잊은 듯 잊지 않았던 시간 속으로 걸어간다.
대학을 졸업하고 빌빌거리던 삶에서 탈피하고자 인경은 방콕을 향해 떠난다. 아니 어쩜 P에게서 버림받았다는 참담함에서 떠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도무지 혼동뿐인 자신의 정체성에서 도망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던 새로운 땅, 방콕에서 새로운 삶에 정착하기 위해 애쓴다. 새로운 환경이었으면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으리라 자신에게 건 기대는 무참히 무너진다. 우연히 동거하게 된 일본인 미야꼬가 보여 준 일련의 행동들에서 인경은 또 한 번의 혼돈을 겪는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성의 정체성의 혼란을 겪으면서 자신을 혹독하게 몰아간다.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죽을 만큼 힘든 지경에 빠진 인경은 자신도 모르게 상대를 물색하기 위해 여행객이 모인다는 방콕의 팟뽕 거리를 헤맨다. 그녀 앞에 석경이라는 여자가 등장한다. 석경은 도망쳐온 P의 분신과 같았다. 그녀를 처음 본 순간, 가슴이 뻐개지는 통증과 동시에 불꽃놀이에서의 불꽃들이 하늘에서 터지는 환영을 동시에 경험한다. 석경은 일행이 있었다. 고소희, 석경의 친구이자 이종이라고 한다. 그녀들은 세상의 끝을 보고 싶다는 아리송한 말을 한다. 그들이 생각하는 세상의 끝이 황금의 삼각지대, 세계 마약생산량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타이와 라오스와 미얀마, 경계지역이라니. 더군다나 타이정부에서 여행금지 구역으로 정해진 곳을 가려는 이유를 석경을 통해 듣게 된다.
석경과 소희가 생각하는 세상의 끝이란 것은 그들에게 있어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는 땅이란 의미라니. 인경은 속으로 코웃음을 친다. 어쨌든 위험한 곳이니 가지 말라고, 아니 자신도 모르게 석경과의 시간을 기대하며 그들을 제지한다. 석경과의 설렘은 현실로 나타난다. 인경과 석경은 둘 만인 싱가포르 여행을 떠난다. 그곳에서 인경은 석경을 향해 불타오르는, 아니 P의 분신인 석경을 향한 자신의 마음을 또 한 번 경험하고 괴롭기만 하다. 그런 인경에서 석경은 그들이 찾는 남자 주용신이란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주용신은 석경과 소희가 동시에 사랑하는 남자란다. 이제 인경은 석경이 주용신을 만나기 위해, 아니 어쩜 석경 자신의 사랑을 되찾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황금의 삼각지대를 향해 갈 수 있는 그 마음을 이해하게 된다. 동시에 그런 석경을 향한 애틋함에 아리기만 하다. 방콕에 돌아온 인경과 석경은 고소희와 함께 타이의 북쪽도시 치앙마이로 간다. 인경의 또 한 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석경과 소희는 예정대로 황금의 삼각지대를 향해 떠난다. 인경은 홀로 방콕으로 돌아온다. 그들이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기원한다. 하지만 석경과 소희가 합의금을 목적으로 하는 일당에 납치되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인경은 마음을 졸이기만 할 뿐이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기도를 하는 일 밖에 없다니. 어느 날 납치범들과의 협상을 통해 소희만 풀려나 서울로 떠났다는 뉴스를 접한다. 인경은 자신의 회사 사장에게 석경의 일을 부탁한다. 시간이 흐른 뒤 석경도 풀려났다는 연락을 받는다. 방콕에서 다시 석경과 상봉을 한다. 근 1년 만에 만난 석경은 임신 중이었다. 인경은 석경을 붙들고 싶었다. 그냥 곁에 있으면 자꾸 메말라 가는 자신의 인생에 가랑비로 내려 줄 것 같은 석경, 그러나 석경은 방콕을 떠나 서울로 향한다. 서울로 돌아 간 석경은 한 통의 편지와 책을 보내 인경에게 감사를 표한다. 그리고 그들은 사느라 서로를 잊은 것일까? 석경은 잊었을까? 아니 인경은 잊지 못한다. 대학 4년 동안, 졸업한 후 지금까지 석경의 삶을 지배하는 P란 존재와 함께 늘 한 몸처럼 석경이 있었다. 다만 인경은 어찌 할 수 없는 일이었으므로, 아마도 삶이란 이런 사랑의 감정 보다 훨씬 중요한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으니깐.
세월은 흘러 이제 그들은 한국의 지리산 하동에서 다시 만난다. 인경이 시한부 선고를 받은 상태이고 석경은 잘나가는 <여행과 사진>이라는 잡지의 편집장으로 상봉하게 된 것이다. 인경은 석경에게 질문을 한다. “아기는?” “소희는?” 석경은 방콕을 떠나 한국으로 돌아와서의 자신의 삶을 이야기 한다.
석경의 이종이자 연적이었던 소희 또한 납치되었을 당시의 원하지 않은 임신으로 자살을 했다. 석경의 외할머니의 의해 입양되었던 석경의 이모이자 소희의 엄마는 평생 입양 딸로서의 트라우마를 벗지 못한다. 양모인 석경의 외할머니는 모든 재산을 자신에게 남겨 주지 않고 석경에게 상속을 한 것 때문에 더욱더 석경을 구박했다는 사실, 또한 자신의 남편이 언니인 석경의 엄마를 사랑했다는 사실, 모두들 용서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죄 없는 석경조차도. 소희의 자살을 석경의 탓으로 돌리고 더욱더 석경을 힘들게 하다 결국 죽음 앞에서 석경에게 자신의 삶을 속죄했다고 한다. 석경 또한 납치범들에게 당한 성폭행으로 원하지 않은 임신을 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갈등 끝에 아이를 낳는다. 석경의 삶은 아이를 낳음으로서 비로소 우주의 먼지 같았던 자신의 존재가 뭔가 땅에 뿌리를 내릴 수 있는 현실감이 생겼다 한다. 석경이 낳은 아이는 석경의 이모부, 소희의 아빠의 양아들로 고현태라는 이름으로 살게 된다. 하지만 동남아 혼혈인 관계로 어렸을 적부터 왕따를 당하게 된다. 이런 모습을 지켜보는 석경은 괴롭다. 하여도 현태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엔 한계가 있음을 인식한다. 현태 나름의 삶의 방법을 모색하게 되고, 어느 날 우연히 티비에서 방영되던 라이따이한에 대한 동병상련의 아픔을 느낀다. 자신의 문제가 혼자만의 문제가 아님을 인식한 현태의 놀라운 성장이 이루어진다. 군을 제대한 석경의 아들 현태는 보다 높은 이상을 가지고 황금의 삼각지대에서 사업가로 변신한 엄마의 옛 연인 주용신을 찾아간다. 주용신의 도움으로 현태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고 자신 인생의 나침반을 스스로 만들어 간다. 석경 또한 아들과 더불어 한 사회적 인물로서의 자신의 자아성취를 위해 사진에 몰입한다. 그 과정 중에 대학 때의 선배, 주용신과 함께 학생운동을 했던 선배를 태백에서 만나 결혼을 했던 석경이었다. 딸아이를 낳지만 남편은 사회운동이란 미명아래 배신을 하게 되고 이혼을 하게 된다. 그런 와중에 사진 찍는 일에 더 몰두하게 된 석경은 회사의 제안에 따라 남태평양 키리바시를 향해 떠난다. 그곳에서 우연히 꼬레꼬레아라고 불리우는 한국인 선원들의 버려진 아이들의 실상을 목격하게 된다. 한국에 돌아온 석경은 아들 현태에게 자신이 본 것을 소상히 전해준다. 그 무렵 석경을 친딸처럼 지켜주었던 소희의 아버지이자 이모부가 석경의 아들인 고현태에게 얼마간의 재산을 상속해 준다. 이모가 남겨준, 엄밀히 말해서 외할머니의 유산과 소희 아버지의 유산을 가지고 아들 고현태는 자신의 방식으로 엄마 석경과 함께 자신의 인생의 나침반을 향해 나아간다. 이러한 모든 이야기를 석경은 인경에게 들려준다. 석경은 인경에게 묻는다. “언니, 생각나, 이거?” 인경이 내민 손엔 빨간 나침반이 있었다. 방콕에서 처음 만났을 때 인경의 목에서 반짝이던 빨간 나침반. “언니, 이건 할머니의 유품이었어. 할머니는 이것에 의지해 남쪽으로 내려왔데. 그리고 살 수 있었고. 할머니 돌아가시면서 내 손에 쥐어 주던 것이었어. 그 당시는 할머니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소중히 간직할 수 있었어. 하지만 살다보니 그 의미를 알 수 있었지. 내 삶의 나침반은 무엇이어야 할까? 언니, 싱가포르에서, 치앙마이에서 방콕에서 언니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들을 지금은 이해해. 그 땐 내가 너무 어렸어.” 인경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네가 날 이해한다고, 이제야? 나도 나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 세월인데.”
이제 석경은 떠나고 인경은 혼자 남았다. 인경은 석경과 방콕에서 헤어진 후의 자신의 삶을 회상한다. 또 다시 방콕 생활을 접고 시드니로 향했을 때의 자신이 얼마나 피폐했던가?
우연히 참석하게 된 시드니에서의 마디그라 퍼레이드, 인경은 그 속에서 행복했다. 성의 정체성에 대한 억압이 일순간에 풀리며 자유가 느껴졌다. 생각하니 자신의 삶이 얼마나 뜨겁기만 한가? 비로소 자기 자신을 똑바로 볼 수 있는 계기가 된 셈이다. 자신이 그토록 혼란스러워 했던 자신의 성의 정체성은 자신의 삶의 일부이고 그것은 그저 자신의 한 특질임에 불과한 거야. 어쩜 왼손잡이 같은 것, 왼손잡이라고 해서 결코 불행할 수 없다는 확신을 얻는다. 하여 그곳에서 새롭게 시작한 공부, 또 다른 인연과의 만남, 꿈을 이루기 위해 치열했던 삶과 성공, 결국 빈손으로 돌아와야만 했던 서울, 다시 시작되었던 자신의 인생, 생각해보니 참 다채로운 삶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빈손이었고 늘 허기졌다. 자신의 인생에서 부족한 것이 무엇일까? 인경은 그 대답을 알아 챈 것도 같았던 때가 있었다. 사랑이라 생각했다. 결혼이 부족한 부분을 채워 주리라 생각했다. 자신을 숨기고 결혼을 위한 결혼을 했고 결코 그것이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는 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다시 인경은 자석처럼 그녀의 P를 찾는다. 그녀는 여전히 인경의 선배 일뿐이었다. 다만 P가 변했다면 그런 인경을 그냥 모른 체 한다는 것이다. 예전처럼 피하지 않는 다는 것, 모른 체 한다는 것은 어쩜 이해한다는 의미일까? 그럼 이제 인경은 어떤 삶을 위해 오늘을 살아야 할까? 그 즈음에 인경은 시한부 선고를 받는다. 그리고 시작한 것이 <검은 사과>라는 제목의 자전적 소설을 쓰고 있다. 소설을 쓰며 한 땀 한 땀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게 되었고 자신을 이해해 나가고 있다. 인경은 남은 6개월의 삶에 굳이 의미를 두지 않으려 한다. 왜냐고? 시간의 의미를 둔다면 견딜 수 없을 것이란 결론이다. 그저 덜 아프고 덜 요란하게 그렇게 눈을 감고 싶은 생각밖에 없다. 한데도 인경은 P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자신의 인생에 별다른 미련은 없지만 그래도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열정을 태울 수 있는 사랑이다. 한 번도 진정으로 누군가를 사랑해 본 적도 사랑을 받아 본 적도 없는 인경이었다.
마지막 남은 몇 개월 동안 인경은 자신의 사랑을 실현해보고 싶은 것이다. 욕망이라도 좋았다. 그저 활활 불타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상대는 묵묵부답이다. 그렇다고 인경이 P를 움직일 무슨 수가 있는 것도 아니다. 고작 인경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자신이 보낸 연애편지를 P가 수신했는가? 메일을 확인하는 일이다. 날마다 하루에도 수십 번, 자신의 메일함에서 수신을 확인하는 일, 하나로 그날의 희비를 가늠한다. 이제 지쳐 그것마저도 포기한다. 그냥 죽는 일만 남았구나. 그런 시점에 찾아온 석경, 인경은 석경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을 곱씹고 있다.
“언니, 내 인생의 나침반은 이거였어.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 나를 사랑하고 내가 사랑할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인경은 생각한다.
“내 인생의 나침반은 무엇이었을까? 나만의 지표를 찾기 위한 내 인생은 어땠는가? 어디로 가야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땐 자신이 온 곳이 어디인지를 잊지 않는다면 길을 찾을 수 있다고 하던데. 가장 깊은 곳의 ‘나’에게 이르는 길은 정말 자신이 온 곳으로 되돌아가는 길일까? 아마도 <검은 사과>를 완성할 때 쯤, 내 마지막 인생의 결말도 마침표를 찍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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