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놀러 가도 돼요? 바쁘지 않으세요?"
잘 들여다보지 않은 카톡으로 오랜만에 그녀에게서 연락이 왔다. 서둘러 알은체를 한다.
"지금 빈둥빈둥 누워 있어요. 오케이."
꼭 그녀를 보면 순진해서 답답했던 내 젊은 시절의 모습이 겹쳐진다.
"하도
답답해서 가슴이 터질 것 같아서요."
"아직도 가슴 터질 만큼 그런 일이 있어요? 부럽네요. 그 열정이"
"머릿속으로는 요. 이제 다 끝났다 생각돼요. 한데 가슴속은 가끔 이렇게 불이 나요."
"불이 나면 꺼야 되는데."
자기 일이 아니라서 이런 농담도 서슴지 않는다.
"어떻게 끌지를 몰라서 온 거예요."
그녀 얼굴의 모든 표정이 얼마큼의 고통을
안고 견디어 왔을까 느껴져 내 가슴마저 아린다.
"있잖아요, 이건 내 방법인데요. 5년 10년 20년 뒤의 '나'를 상상해 봐요. 그때쯤엔 오늘의 '나'는 그저 추억일 뿐이에요. 세월이 약이라잖아요."
지긋이 원론적인
위로밖에 할 수 없는 나의 한계가 미안할 뿐이다.
"다 알거든요. 수없이 자신에게 말해요. 내 세월이 너무 아까울 만큼의 울분도
시간이 지나니 약해지듯, 내 마음의 고통도 세월에 맡겨야지 그렇게 수없이 다짐해도 가끔 이렇게 힘들어요."
"생각해보니 마음을 준 그만큼 마음이 아프더라고요. 마음을 준 세월만큼 그만큼의 세월을 아파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 세월만큼이라면
너무 가혹해요."
"아니 그 세월 그대로라는 말보다는 어쩜 그 세월의 깊이만큼."
이런 말장난에 그만 피식 웃음이 나온다.
"이 나이 먹으니까요. 그딴 일 미안해요. 그딴 일이라 해서. 아무튼, 사랑하고 이별하는 일이란 인생에서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데요. 사랑이 모든 것이라는 생각을 할 땐 정말 내 인생에서 사랑이라는 것이 모든 것인 줄 알았어요.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일들이
있더라고요."
"그렇지요. 엄마라는 사실이 그나마 나를 지탱해주는 것 같아요."
"저 같은 경우엔 독립된 자아를 지키는 것,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는 것. 제 나이의 여자들 아니 친구들이 가끔씩그런 말들을 하데요. 남편의 이중생활을 처음 알았을 때는 죽을 것 같이 고통스러워 자기 자신을 학대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는데 세월을 보내고 나니 그것이 가장 후회된다고 해대요. 남편은 남편이고 나는 나라는 사실을 왜 그렇게 인정하지 못했을까 봐 뭐
그런 후회. 한 번 신뢰를 잃은 남편에 대한 마음은 바꿀 수가 없는데 그렇다고 이혼까지 하기에는 아이들이 있고. 그래서 사는 방법이 남편에게
마음으로 의지하지 않기. 뭐 그런 태도. 하지만 어느 날 불쑥불쑥 신뢰 되지 않는 남편에 대한 끊임없는 의심 때문에 자신이 괴롭다고…."
"여자와 남자의 차이는요. 여자는 마음이 가지 않으면 남자를 사랑할 수 없는데, 남자는 마음이 가지 않아도 여자를 사랑할 수 있나 봐요."
"남자라고 해도 마음이 가지 않는데 어떻게 여자를 사랑할 수 있겠어요. 어떤 식으로든 일종의 호감이 가기 때문에 사랑할 수 있겠지요. 마음이란 것이요. 가는 것을 억지로 붙잡을 수 없는 것 같아요. 끊임없이 변하는 게 마음이잖아요. 사랑도 마음이 하는 일이라서 다른 사람에게 가는 마음을 본인 자신도 붙잡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요?"
"저라고 해서 그 많은 세월 동안 마음이 동하지 않은 상대를 왜 못 만났겠어요. 그래 도요 저는 요. 제 마음을 쉬임없이 단속을 하며 살았어요. 적어도 사랑을 하는 관계에서는 설령 마음이 동하는 어떤 상대를 만나더라도 상대를 위해 조금은 자제할 수 있어야 하는 책임감이 있어야 하지 않아요?"
그녀의 눈에서 읽을 수 있는 분노가 아릴 뿐이다. 어찌하리. 얼마 전에 어떤 카페에 올렸던 글에 이런 댓글이 달렸더라.
세상에 죽어라 애써도 안되는게 뭔지 알아?
누군가에게 가는 마음이야.
더 죽어라. 애써도 안되는 게 뭔지 알아?
누군가에게 가서 오지 않는 내 마음이야."
이렇듯 마음은 변하는 것이고 그 흐름을 억지로 돌릴 수는 없는 일인걸. 그런 것이 사랑의 속성인걸. 사랑에 목숨을 걸지 마라. 사랑에 많은 것을 걸지 말라. 수없이 단도리하며 살아야 한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이런 생각을 하면 왠지 인생의 신비가 사라지는 듯하다.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라 이 말이 정말 옳은 말일
것이다. 그러나 사랑에 배신을 당하더라도 상처받지 마라. 아니 상처가 자신을 다치게 하지 말라. 그 상처가 오히려 성숙의 기회가 됨에
감사하자."
나는 왜 이렇게 주장하고 싶을까? 나이 탓인가?
그녀의 눈물과 분노을 보며 내 사념에 빠졌다.
"제가요. 위로를 못 해줘서 미안해요. 근데 자꾸 이런 말이 하고 싶네요. 친구를 만나 수다를 떨고 자연을 만나 상쾌한 공기를 느껴 보세요. 그 길밖에 없어요. 사람들을 만나 의미 없는 웃음을 웃는 일, 자연을 만나 무심한 듯 바라다보는 것들에 눈길을 주는 일."
"아니에요. 답답하고 불같은 마음이 단지 이렇게 누군가에게 이야기라도 할 수 있어 조금은 풀어지는 것 같아요. 다 알아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 제 마음도 이미 돌아서고 있는데 자꾸 뒤돌아보는 시간이 가끔 이렇게."
말끝을 흐린다. 그 마음을 누가 모르리. 세월을 겪다 보면
그보다 더 힘든 일들이 부지기수임을….
"이러면 안 돼요? 안녕, 잘 가요. 그리고 부디 행복하세요."
무슨 망심인지 그녀에게 이런 주문을 건다.
"아직은요. 그럴 수가
없어요."
자기 일이 아니라서 그럴까. 어쩐지 행복을 빌어주면 훨씬 덜 아플 것 같은데 아직은 시기상조인가 보다. 그녀의 눈물인지 내 눈물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눈물이 흐른다. 오늘 흘린 눈물이 부디 내일의 행복이 될 수 있기를…. 언젠가 진심으로 변하지 않을 사랑이 그녀에게 찾아와주길….
아니 세상에는 아직도
변하지 않을 사랑을 위해 눈물짓는 사람들이 있어 그래도 살만한 세상임을 믿을 수 있기를….
그렇게 그녀가 떠나간 날, 나는 오래도록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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