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戀書시리즈 - 독후감

戀書 - 18 - 자발적 왕따

by thetraveleroftheuniverse 2012. 3. 25.

 

한가한 일요일, 어제 장시간의 도보 때문 인지 오늘은 늦잠을 잤습니다. 오랜만에 느껴지는 훈훈한 바깥공기와 햇살덕분에, 온 집안의 창문을 제키고 대 청소를 했답니다. 이번 주에는 멀리서 오는 벗님들을 맞이해야하므로 덕분에 집안 곳곳을 쓸고 닦고 살림하는 여자가 되어 모처럼 부산을 떨었더니 속이 후련하기도 했답니다. 정리하고 치우는 일이 서툴러서 이곳저곳에 쌓인 잡동사니들을 언제나 정리할까 날마다 고민했는데 드디어 오늘 해치웠습니다. 아마도 단정한 내 생활을 위해선 가끔씩 누군가가 내 누추한 처소를 방문하는 것도 한 방법이 아닐까 피식 웃어보기도 했답니다. 느지막이 가게에 나와 이곳저곳에 댓글도 달고 메일에 답장도 하고 오랜만에 지인의 반가운 목소리도 들으며 왕창 수다도 떨어보고.. 마침 며칠 전에 남겨둔 막걸리 생각이 나서 한 사발 부추전을 안주삼아 마셨더니 노곤함이 밀려와 설핏 오수午睡를 즐겨보기도 하고... 그래도 시간이 남아돌아 읽다만 책들을 펼쳐봅니다.

 

 

 

며칠 전부터 김형경의 심리 에세이 ‘만가지 행동’을 읽고 있습니다. 김형경님의 소설 및 심리에세이들에 오랫동안 공감해 온 터라 기대 만땅인 설레임으로 읽고 있는 중입니다. 읽는 중간 중간 공감이 가고 위로가 되는 또는 좋은 정보다 싶은 구절들에 밑줄을 그으며 읽다보니 특히 오늘은 ‘테메노스’라는 낱말에 확 필이 꽂이는 중입니다.

 

 

라틴어에 ‘바스 헤르메티스 vas hermetis'라는 용어가 있다합니다. 헤르메스의 그릇이라는 뜻인데 이 헤르메스의 그릇은 금을 만들 때 사용하는 용기랍니다. 그 안에 납을 담고 그릇을 밀봉한 뒤 열을 가하면 그릇 안에 담긴 납에 변화가 일어난답니다. 그러나 그릇이 깨져서 열기가 새어 나가면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 답니다. 헤르메스의 그릇을 심리적으로 해석하자면, 내면의 갈등에서 생기는 긴장이 풀어지면 금, 즉 연금술사의 돌은 형성되지 않고 열기가 새어나가면 납은 금으로 변하지 않아 처음 그 상태로 남게 된답니다. 융의 심리학에서는 이러한 그릇을 ’테메노스 temenos'라고 지칭한답니다. 테메노스는 고대에 희생제의가 치러지던 신성한 장소를 말하는데 , 개인의 내면에 만들어 가지는 심리적 공간을 의미한답니다. 내면에 심리적 공간이 있어야 내면을 고요하게 하고, 생각을 숙성시켜 자신의 갈등과 문제를 통찰하며 해결해 나갈 수가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글들을 읽으며 오늘 나는 지금의 내 상황에 대한 생각을 대비시켜 봤습니다. 원래 타인에 대한 관심이 많지 않아 복잡한 일에 얽히는 걸 귀찮아하는 성격도 있지만 어찌 보면 주위환경이 소란하면 내 자신도 쉬 그 소란함에 휩쓸리고 마는 약간의 천박성을 견딜 수가 없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이럴 때 취하는 방법으로 ‘자발적 왕따’ 의 시간을 택하게 됩니다. 가끔씩 내 자발스런 성격 탓에 남에게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할 말을 구별하지 못하고 내 속을 모두 꺼내보여야만 후련해하는 그런 경계의 구분을 짓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오랫동안 유지해 왔다는 후회가 많이 듭니다. 바로 내 안에서 금으로 변화하게 될 연금술사의 돌을 열기가 새어나가게 함으로써 금을 만들지 못하고 다시 납으로 남게 되는 우愚를 범하는 꼴이 되고 만 것입니다. 즉 내 내면의 갈등이나, 문제점들뿐만 아니라 내가 소중히 여겨야 할 것들조차도 내 내면에 조용히 간직하고 숙성시키지 못하고 내 뱉고 말았던 시간들이 부끄럽기조차 합니다. 한 때는 내 내면에 있는 모든 것들을 밖으로 내 보내면 새로운 어떤 것들로 다시 산뜻하게 나를 채울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도 없지 않아 생각나면 생각나는데로 느끼면 느끼는 데로 내 뱉고 말았더니 그것이 마치 내 전부인양 업신여기는 사람들에 대한 야속한 마음도 없지 않았답니다. 그래서 오랜 시간동안 많이 아프고 힘이 들었던 시간들을 생각해보니 내가 내 자신의 ‘테메노스’를 가지지 못했던 까닭이었다는 것을 이제사 알게 되었습니다.

 

 

淸靜爲天下正. 맑고 고요함으로써 천하의 올바름을 이룩한다. 라는 노자의 말씀이 불현듯 생각납니다. 나는 淸靜爲天下正이 아니라 淸靜爲我正이라고 고쳐보고 싶습니다. 즉 지금의 나 자신의 자발적 왕따의 상태가 나의 올바름을 이룩하는 금쪽같은 시간이 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가끔씩은 사는 방법으로써 이 자발적 왕따를 선택하는 것도 아름답게 사는 방법중의 하나임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같은 한가로운 일요일 이렇게 내 하루가 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