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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다반사

아침 드라마 '위험한 여자'를 보며...

by thetraveleroftheuniverse 2012. 3. 6.

 

나는 요즈음 아침 드라마 ‘위험한 여자’에 빠져있다. 마치 중독되어지는 것처럼 분명한 선악에 노출되는 주인공들의 흐름에 따라 내 맘도 그대로 그들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맛이 하루라도 본방을 사수하지 않으면 왠지 서운하고 다음날 아침의 재방송을 꼭 보며 본방을 기다리게 된다. 예전에는 드라마 속에서 악 편에 선 주인공들을 보면 속으로 실컷 욕하고 어서 빨리 저지르는 악행에 대한 벌을 받기를 고대하며 악행에 대한 대가를 치루고 있는 장면에서는 통쾌한 기분에 하루가 즐겁기도 했다.

 

그런데 요즈음의 나는 이러한 내 시각이 변화되고 있음을 감지하게 된다. 전에는 오직 선 편에 선 주인공에 마음을 실어 주었지만 지금은 악 편에 선 주인공들이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다른 시각을 찾아보고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들의 전개를 되집어 보며 급기야는 그들에 대한 측은지심까지 달음질 치는 나를 보게 된다. 그리고 드라마속의 모든 갈등이 해피엔딩으로 되어 선악의 구분이 없어지며 화합하고 사랑하는 장면이 연출되기를 빌어보기도 한다. 아마도 나이가 먹어서 생긴 삶의 균형을 바라는 마음이기 때문이리라.

 

 

요즈음 읽고 있는 ‘마음을 열어주는 위대한 우화, 장자’ 속의 구절들을 잠깐 옮겨봤다.

 

 

“물物에는 저 것彼 아닌 것이 없고, 물物 에는 이것是 아닌 것이 없다. 모든 존재자는 이쪽의 입장에서 보면 저쪽이 되고, 저쪽의 입장에서 보면 이쪽이 된다.

말하자면 어느 쪽의 시각을 기준으로 삼느냐에 따라 객체가 되기도 하고 주체가 되기도 한다. 그러니 이것과 저것은 단지 상대적인 개념일 뿐, 결코 절대적인 개념이 아니다. 이 둘은 서로 별개의 것이 아니다. 이것을 정하지 않으면 저것을 정할 기준이 서지 않고, 역으로 저것을 정하지 않으면 이것이 어디를 가리키는 것인지가 정해지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나 역시 상대와 분리된 별개의 것이 아니다. 나는 어디까지나 상대와의 관계 속에서만 성립한다.

결국 이것과 저것은 있는 것인가, 이것과 저것은 없는 것인가? 현상적으로 이것과 저것이 있지만, 실상적에서는 이것과 저것을 가르는 불변의 근거가 없고, 불변의 근거는 없지만 현상적으로는 있다. 그러니 있으면서 없고, 없으면서 있다. 이것과 저것, 시와 비, 삶과 죽음은 서로 별개의 것이 아니지만 별개의 것으로 현상한다. 그러므로 이 둘을 함께 보아야하는데, 이처럼 이것과 저것을 서로 마주세우지 않고 별개의 근거가 없는 별개의 현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다보는 마음의 상태를 일러 도추道樞, 즉 ‘도의 지도리’ 라고 한다.

이 피시방생(彼是方生)의 사태는 우리 삶의 여러 영역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바야흐로 삶이 있으니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으니 삶이 있다. 바야흐로 가可함이 있으니 불가不可함이 있고 불가함이 있으니 가함이 있다. 시是로 인하여 비非가 있고, 비로 인하여 시가 있다. 이 모든 것은 상호 관계 속에서 상대를 전제로 하여 동시에 성립하며, 따라서 그 자체가 고정된 실체도 아니요, 어떤 불변의 근거나 토대를 지나지도 않는다.“

 

모든 사람들은 저마다 각자의 입장에서 세상을 보고 해석한다. 그것이 필연이지만 상대의 주장이 상대의 시각에서 ‘상대의 옮음’임을 인정하기란 쉽지 않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바로 차원을 달리하는 사고란다. 자기의 시각을 객관화하면서 시비의 사태를 통찰하는 시각이 필요하다고 한다.

 

 

 

장자는 조삼모사(朝三暮四)의 우화를 통해 도토리 개수에 따라 일희일비하는 원숭이가 되지 말아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우리에게 일침을 가한다.

 

 

조삼모사란 원숭이들에게 도토리를 주며 말하기를, 아침에 세 개를 주고 저녁에 네 개를 주겠다고 하니, 여러 원숭이 들이 성을 냈다. 그러나 다시 아침에 네 개를 주고 저녁에 세 개를 주겠다고 하니 여러 원숭이들이 기뻐했다고 하는 실상은 달라 진 것이 없는데도 이렇듯 스스로 기뻐했다 성냈다 하니 당장 눈앞의 계산에 속아 성내고 기뻐하는 우리의 모습을 빗대한 한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의 진의는 우리 자신의 판단을 최소화하고 모든 존재자들이 각득기의(覺得起義)에 맡기며, 상황에 따라 나의 판단을 제약적으로 사용하며 어느 한쪽에 고정되지 않고 균형을 이루는 삶을 살아야하지 않겠느냐하는 것이다.

 

 

나는 어떤 상황에서 터무니없는 내 입장을 고수하며 상대에게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는 우를 종종 범한다. 나중에 생각하면 참 염치없고 부끄러운 일 이었음을 깨닫지만 쉽게 또 미안하다, 혹은 내 잘못 이다. 라고 사과를 하는 용기를 내기도 어렵드라. 그래서 취한 방법이 비겁하기도 하지만 기다리는 일이다. 내 마음이 정말 미안하다고, 내 잘못이다 라고 말할 만큼 용기를 낼 수 있는 시점을 기다리는 일이다. 이렇게 내가 용기를 가질 수 있는 시간을 기다리는 것은 사실 많은 인내가 필요하다. 왜냐면 그렇게 기다리는 동안 내 속은 썩을 데로 썩기만 하므로... 그래서 도저히 참을 수 없을 때 비로소 사과할 용기의 힘이 생긴다. 그것이 너무 느려서 상대편에서는 이미 굿바이하고 떠나버린 인연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그래도 쉽게 고칠 수 없는 내 성정이 얄밉다. 다만 인연, 운명 같은 인연이란 끈에 연연해 본다. 이런 나를 기다려 줄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아지길... 내가 너무 이기적인가? 그럼 나도 그런 상대를 기다려 줄 수 있는 여유를 가져봐야 겠지...라고 쬐께 너스레를 떨어보자...오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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