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친구들에게 서운한 맘을 토로한 적이 있습니다. 다정한 친구들이니 종종 좋은 충고를 합니다. 다 나 잘되라고 이것저것 무심하고 여러 곳에 신경 쓰지 못하는 나를 위해 하는 말인데도 불구하고 짜증이 나더이다. 아마도 그들이 보기에는 내가 하는 일들이 좀 성에 안차기도 할 것입니다. 처음 한 번 들을 때는 “그래 알것어” 속으로 인정하고 고치려고 하는데 천성이 좀 느린 편이라서 쉽사리 어떤 습관이 고쳐지지 않습니다. 아니 자신이 깨닫지 못하면 남이 한 말에는 신경을 잘 쓰지 못하는 무심함이 있어서 그런 가 봅니다. 정말 유치한 이야기이지만 ‘옷을 이렇게 입어라.’ ‘머리를 이렇게 해라.’ ‘손님을 이렇게 대하라.’ ‘조명을 이렇게 해라.’ 등등등... 구구 절절 다 옳은 말인데도 불구하고 속으로 꼭 ‘그런 말들을 해야 하냐? 좀 느긋하게 내가 하는 데로 봐 주면 안되남? ’ 짜증이 납니다. 물론 그들이 그렇게 말하는 본심은 충분히 알겠고 충분히 고마운데도 불구하고 나를 콕콕 찌르는 말들이 듣기 싫습니다. 아집이 강해서인가, 내 맘이 여유롭지 못해서인가 내 탓을 해 봅니다.
장자 외편 지락(至樂)에 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옛날 어떤 바닷새 한 마리가 노(魯)나라 서울 교외에 날아와 앉았다. 그 새가 몹시 마음에 든 노나라 제후는 몸소 찾아가 그 새를 맞이하여 종묘에서 술을 권했다. 그리고 그 새를 즐겁게 해주려고 궁중음악을 연주해주었고, 맛있게 먹게 하기 위해 소와 양과 돼지를 잡아 음식을 차려 주었다. 그러나 바닷새는 얼이 빠지고 근심과 슬픔에 잠겨 고기 한 점, 물 한 방울 먹지 못하고 사흘 만에 죽고 말았다."
"좋은 술과 음식, 그리고 훌륭한 궁중 음악이 눈앞에 펼쳐지는데도, 바닷새는 시름시름 앓다가 사흘 만에 죽었다. 대체 왜 그랬을까? 그 진수성찬과 궁중음악은 노나라 제후가 기꺼워하는 방식이었을 뿐, 바닷새가 기꺼워하는 방식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기꺼운 방식이기는 커녕 오히려 못 견디게 괴로운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세상 만물은 저마다 자신의 도를 따라 존재한다. 따라서 설령 아무리 지위 놓은 제후의 도라 해도, 그 도가 바닷새에게까지 적합할 수는 없다. 그러니 자신의 도를 상대에게 강요하면, 상대의 도는 은폐되고 결국 그 존재마저 상실되고 만다."
아무리 진수성찬이라도 바닷새가 기꺼워하는 방식이 아니면 오히려 바닷새에게는 해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듯 아무리 좋은 말 좋은 충고라도 상대가 받아 들 일 마음의 여유가 없을 때는 마음의 조절, 입의 조절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봤습니다. 원래 타인에게 무심한 나여서 다행히 남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 성격이 되지 못하지만 가끔씩 나도 모르게 나이를 먹었고 산 경험이 좀 많다는 이유로 자칫 충고를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할 때도 있습니다. 돌아와 생각하면 쑥스럽고 부질없단 생각이 들곤 합니다. 아마도 충고를 하는 편에서는 다정함의 표현일지도 모릅니다. 그것조차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꼴리는 데로 살게 냅둬. 그냥 재미있고 놀아주고, 웃어주고, 날 격려만 해주라고. 떠나지 말고 옆에 만 있어주라고.“
그렇게 외치고 있는 나, 너무 웃기지 않나요?
나 또한 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꼴리는 데로 살게 냅둬야지.
" 너 그럴 수 있어? " 나에게 묻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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