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로영화는 봄과 가을이 가장 잘 어울리는 계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모든 것이 처음 시작하는 봄의 따스함과 뜨거운 햇볕이 걷히고, 쌀쌀하게 불어오는 바람 마냥 외로움이 느껴지는 가을이야말로 가장 사랑하고 싶고, 사랑하기 좋은 때이니 말이다. 그러고 보니 어느덧 가을이다. 그런 가을에 가장 잘 어울리는 멜로영화 [호우시절]은 멜로영화와 가장 잘 어울리는 허진호 감독의 작품이기에 내심 기대를 가져보게 된다. 영화의 제목인 ‘호우시절’의 의미처럼 멜로영화에 어울리는 가을이란 계절을 알고 찾아 온 허진호 감독의 [호우시절], 그래서 한번쯤 그 감성을 느껴보고 싶게 만든다.
사랑을 이야기하고, 그려낼 줄 아는 감독 '허진호'!! 그의 다섯 번째 사랑이야기 [호우시절]!!
관객들에게는 영화를 보는 데 있어 각자의 취향이 있다. 취향은 곧 고집이 되기도 한다. 누군가는 시원한 액션이나 공포, 블록버스터만 즐기는가 하면, 또 누군가는 감성적이고 서정적인 멜로나 가족영화들을 즐긴다. 관객들의 이러한 취향은 그들이 좋아하고, 기억하는 감독의 그것과도 같다. 아마도 멜로라는 장르에서만큼 가장 고집 세고, 멜로를 좋아하는 관객들의 취향을 잘 맞추는 감독은 허진호가 아닐까 싶다. 그것은 멜로영화들로만 채워진 그의 필모그라피가 말해주며, 거기에 적힌 네 편의 영화들로써 허진호 감독을 기억하게 만든다. 그리 강한 이미지를 내뿜지 않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각인되지 않았음에도 매번 자신의 색깔을 꾸준히 보여주는 감독 허진호의 다섯 번째 사랑이야기가 바로 [호우시절]이다.
사실 영화를 꼼꼼하게 챙겨보지 않는 사람들이라면 굳이 감독의 이름까지 기억하지는 않는다. 허진호 감독의 작품들 역시 감독의 이름보다는 배우들의 이름, 혹은 제목으로 기억되는 경우가 더 많을 듯하다. [8월의 크리스마스]의 한석규와 심은하, [봄날은 간다]의 유지태와 이영애, [외출]의 배용준과 손예진, [행복]의 황정민과 임수정까지 말이다. 그렇지만 이들 중 몇 편만 챙겨 본 관객들이라면 제목과 배우, 게다가 ‘허진호’라는 감독의 이름까지 기억하게 된다. 그만큼 자신의 색깔이 담긴 언어로 이야기하는 그의 존재가 작품 속에도 그대로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이번 영화 [호우시절]은 바로 그런 허진호라는 감독의 존재를 알고, 그 색깔을 좋아하며, 그의 영화가 주는 감성을 느끼고픈 ‘고집 있는 관객’들이 반가워할 그런 영화이다.
때를 알고 내리는 좋은 비처럼 찾아 온 그들의 사랑!! 허진호 감독, 이번에는 사랑의 타이밍을 이야기하다.
건설중장비 회사 팀장인 동하는 중국 출장 첫날, 미국 유학시절 친구였던 ‘메이’를 만난다. 처음의 어색함도 잠시 둘은 지난 시절의 추억들을 이야기하며 점점 친근해진다. 그렇게 유학시절의 서로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며 가까워진 둘은 특별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언제나 그랬듯이 허진호 감독은 이번 영화에서도 어김없이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좋은 비는 때를 알고 내린다는 의미의 제목 ‘호우시절 好雨時節’처럼 두 남녀에게 찾아 온 사랑의 ‘때(시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사랑이란 아무도 모르게 찾아온다’, ‘사랑은 타이밍이다’ 등사랑이란 감정이 사람들에게 다가오는 시간에 대한 말이 많다. 허진호 감독의 [호우시절]은 바로 그러한 사랑의 시간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 한다.
유학시절 키스도 하고, 자전거도 가르쳐 주며 둘이 사귀었다는 동하와 달리 메이의 기억은 그렇지 않다. 예전의 기억이야 어떻든 오랜만에 만난 둘은 반가움 그 이상의 감정을 갖고 있으며, 대화를 나눌수록, 그리고 함께 하는 시간들이 늘어날수록 마치 첫사랑을 하는듯한 설렘이 느껴진다. 여느 멜로영화들이 그렇듯이 허진호 감독의 [호우시절] 역시 우연한 만남과 즐거운 시간, 그리고 설렘과 이별이라는 보통의 과정들을 전개해 나간다. 그리고 그 속에서 매 작품마다 자신이 하고픈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우연히 찾아 온 사랑의 설렘([8월의 크리스마스]), 사랑의 변화([봄날은 간다]), 사랑의 흔들림과 선택의 갈림길([외출]), 사랑과 행복의 의미([행복]), 그리고 이번 영화에서는 두 주인공에게 사랑이 찾아 온 시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둘에게 찾아 온 사랑이 영화의 제목처럼 때를 알고 내리는 좋은 비와 같은 감정일까라는 질문을 던져주는 것이다.
멜로영화의 감성을 충분히 살려 낸 화면과 대사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던 드라마의 매력과 힘!!
멜로영화가 사람들을 당기는 매력은 편안하고 예쁜 화면과 감성적인 대사들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을 가장 잘 담아내는 감독 중 한 명이 바로 허진호 감독이다. 이번 영화 [호우시절] 역시 허진호 감독만의 멜로적 감성이 화면 속에 가득하다. 대지진으로 잘 알려진 중국의 쓰촨성 청두에서 촬영된 이국적이면서도 일상적인 화면들은 두 주인공의 만남과 감정을 더욱 자연스럽게 살려준다. 동하와 메이가 걸어 다니는 골목이나 식당, 주변의 햇빛과 푸른 나무, 두 주인공의 주요장소인 두보초당 등은 3박 4일 간의 사랑이야기를 보다 풍성하게 꾸며준다. 특히, 두 주인공이 대화를 함께 하는 비오는 장면이나 대나무 숲에서의 키스씬, 공원에서의 데이트와 판다 장면 등은 멜로영화로서의 분위기를 한층 살려주며, 미소를 던져주기도 한다.
3박 4일 간의 사랑을 담아내기에 에피소드보다는 두 인물의 대화가 중심이 되는 전개 역시 인상적이다. 마치 [비포 선라이즈]를 연상 시키듯 과거의 추억과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는 동하와 메이의 대사에는 허진호 감독 특유의 감성이 그대로 묻어나 있기도 하다. 그렇지만 화면이나 감성적 대사에 비해 관객들로 하여금 두 인물의 감정이나 멜로적 감성에 빠져들 만한 드라마의 힘은 없다는 점이 다소 아쉬움으로 남는다. 후반부에서 엿보이는 일부의 작위적 설정과 다소 성급해 보이는 마무리 역시 그러한 부분 중 하나다. 서로의 감정을 확인했지만, 사랑해야 할 시기를 놓쳤고, 다시 그 사랑의 타이밍을 찾으려 하는 두 인물의 미묘한 감정과 질문에 대한 해답을 관객들에게 설득하고, 공감하도록 만들기에는 드라마가 가진 힘이나 매력이 힘에 부쳐 보인다는 것이다. 잔잔한 분위기 속에서도 간간히 터지는 웃음과 그리 느리지 않은 전개의 초반과 달리 두 인물의 감정이 본격적으로 드러나는 후반부의 전개가 루즈하게 느껴지는 것도 그것을 증명해주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슈트와 미소가 어울리는 남자, 정우성!! 청초하고 담백한 매력의 수채화같은 여자, 고원원!!
허진호 감독의 멜로를 매력적으로 꾸며주는 요소 중에서 언제나 눈에 띄는 것은 바로 배우들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멜로연기를 보여주는 두 남녀 배우들 이야말로 허진호 감독의 영화를 빛내주는 주인공들이라 할 수 있다. 영화 [호우시절] 역시 배우들의 그런 매력이 그대로 묻어나 있다. 작년에 개봉한 [놈놈놈]을 통해 부드러운 남성적 카리스마를 선보였던 정우성은 이번 영화에서는 멜로연기로 색다른 매력을 보여준다. 이미 손예진과 연기했던 [내 머리 속의 지우개]를 멜로연기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던 그였기에 이번 영화에서 역시 ‘동하’라는 캐릭터의 매력을 십분 살려냈다. 다만 대부분의 대사가 영어인 탓에 중간중간 엿보이는 다소 부자연스러운 대사처리가 아쉬움으로 남기도 하지만, 깔끔하고 세련된 슈트 차림과 특유의 미소는 여심을 흔들기에 부족함이 없다.
최근 중국 박스 오피스 1위를 차지한 [난징! 난징!]으로 현재 중국에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스타급 여배우 ‘고원원’ 역시 인상적이다. 차분하면서도 감성적인 성격을 지닌 ‘메이’를 연기한 고원원은 청초하면서도 담백한 매력이 돋보인다. 대부분이 영어로 된 대사임에도 캐릭터가 지닌 감정선의 섬세한 표현이나 표정연기를 자연스럽게 살려낸 그녀의 연기는 영화의 잔잔한 감성을 더욱 살려주는 요소라 할 수 있다. 정우성과 고원원의 멜로연기만으로는 자칫 밋밋할 수 있는 분위기를 유머로 살려주는 김상호는 [호우시절]에서 빠질 수 없는 감초 배우다. 동하와 메이 사이에서 눈치 없는 행동으로 관객들에게 웃음을 던져주는 지사장 역을 연기한 김상호의 감초연기가 영화의 재미를 더해준다. 영화 [호우시절]은 그리 특별하거나 개성이 넘치는 캐릭터들이 아님에도 자신들의 매력으로써 관객들에게 어필한 배우들의 힘이 돋보이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허진호 감독에게 항상 따라 붙는 수식어 ‘멜로의 대명사’란 말은 이번 영화 [호우시절]에서도 전혀 아깝지가 않았다. 다만 전작들에서 보여주었던 가슴을 적시는 감성적 언어의 매력이 줄어들고, 깊은 여운을 남기는 드라마의 힘이 약했을 뿐 허진호 감독의 멜로적 정서는 유감없이 녹아 있었다. 슈트의 매력이 돋보였던 정우성의 미소나 담백한 매력으로 영화를 깨끗하게 꾸며준 고원원의 연기도 부족함이 없었다. 고로 더욱 깊어지고, 진한 허진호의 색깔을 기대하기보다 그저 때(가을)를 알고 등장한 허진호식 잔잔한 멜로의 감성을 느끼고픈 관객들이라면 예쁜 미소를 머금고 극장을 나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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