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戀書시리즈 - 독후감

이승우 『사랑이 한 일』 네 번째 연작 「허기와 탐식」

by thetraveleroftheuniverse 2026. 10. 11.

허기는 무엇을 향하는가

이승우 『사랑이 한 일』 네 번째 연작 「허기와 탐식」

 

연휴의 끝자락에서 『사랑이 한 일』의 네 번째 연작 「허기와 탐식」을 펼쳤다. 앞 작품 「사랑이 한 일」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이삭은 말이 진실에 대한 허기를 부르고 아무리 많은 말로도 그 허기를 채울 수 없다고 했는데 책을 덮은 뒤에도 오래 남아 있던 그 허기라는 말을 다음 작품의 제목에서 다시 만났다.

 

창세기 25장에는 이삭이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해서 에서를 사랑했다는 짧은 구절이 있다. 한 민족의 계보를 뒤흔든 편애의 이유를 성경은 고작 입맛 하나로 대고 지나가지만 이승우는 이 어색한 한 줄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묻는다. 왜 하필 고기였을까.

 

이야기는 모리아산에서 시작된다. 그날 아버지는 아들을 장작 위에 두고 홀로 산을 내려갔고 남겨진 이삭은 그 길로 광야의 형 이스마엘을 찾아간다. 이스마엘 역시 아버지에게 쫓겨나 광야를 헤매다 죽음 직전에 살아난 사람이었다. 한 아들은 물 한 방울 없는 광야에서 다른 아들은 칼 아래서 같은 아버지가 신의 뜻을 따르는 동안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마지막 순간에 돌아온 것이다. 창세기 21장과 22장은 마치 짝을 맞춘 듯 닮아 있어서 두 장 모두 아버지가 아침 일찍 일어나 아이를 데리고 떠나고 아이가 죽음 앞에 놓이고 하늘에서 음성이 들리고 눈이 열려 우물이나 숫양을 보게 된다. 이승우는 나란히 놓인 이 두 장 사이에 다리를 놓아 두 아이를 실제로 만나게 했다. 아버지가 떠난 바로 그 길로 이삭이 형에게 갔다는 설정이 우연이 아니라 필연처럼 읽히는 것은 이 세상에서 그 일을 알아줄 수 있는 사람이 형 하나뿐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삭은 그 일을 형에게 말하지 못한다. 나는 이 침묵 앞에서 오래 머물렀다. 앞 작품에서 아버지는 그 일에 대해 누구에게도 한마디 하지 않았고 이삭 역시 형에게 끝내 그 일을 털어놓을 수 없었는데도 이미 두 사람 사이에는 공감이 생겨난다. 그 자리에 놓여 있던 것은 형이 광야에서 사냥해 구워준 고기였으니 이삭에게 그 고기는 말이 끝내 건네지 못하는 것을 건넨 또 하나의 언어였는지도 모른다.

 

그 뒤로 이삭은 그 일이 떠올라 신음할 때마다 먹었고 무엇을 먹어도 허기가 사라지지 않아 계속 먹었다. 훗날 사냥을 좋아하는 맏아들 에서가 고기를 들고 올 때마다 이삭은 광야의 형을 다시 만났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삭이 에서를 사랑한 것은 고기 맛 때문이었지만 그 맛은 입맛이 아니라 가장 무서웠던 날 곁에 있어 준 사람의 맛이었고 그 맛이 고기가 아니라 형에게 있었기에 그는 아무리 먹어도 다시는 채워지지 않았다.

 

이 대목을 읽고 나서야 이삭이 두 개의 기억 사이에 서 있다는 것이 보였다. 아버지의 침묵은 그를 장작 위에 홀로 남겨두었고 형의 손은 그를 먹였으니 하나는 끝내 주어지지 않은 응답이었고 다른 하나는 한때 받았다가 잃어버린 돌봄이었다. 둘은 이어져 있지만 같지 않다. 이삭은 자기를 살린 사랑과 자기를 죽음 가까이 데려간 사랑 사이에서 무엇을 믿어야 할지 몰랐던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형이 건넨 음식은 그의 몸을 살렸지만 자기를 죽이려 했던 아버지와의 관계까지 설명해주지는 못했다. 그래서 앞 작품의 끝없이 되풀이되던 말과 이 작품의 끝없이 이어지는 먹기는 같은 상처에서 나왔으면서도 하나는 언어로 하나는 몸으로 저마다 다르게 그 상처를 견딘다.

 

창세기를 다시 들춰보다 하나를 더 발견했다. 아브라함이 죽은 뒤 이삭이 머문 곳은 쫓겨난 하갈이 광야에서 자기를 보시는 신을 만났던 바로 그 우물 브엘라해로이 근처였고 아브라함을 장사 지낸 것도 이삭과 이스마엘 두 아들이었다. 「하갈의 노래」에서 쫓겨난 아이가 이번에는 상처 입은 동생을 먹이는 사람으로 돌아와 있는 것이다. 신이 하갈에게 한 약속은 큰 민족을 이루리라는 것이었지만 소설은 그 약속을 한때 버려졌던 아이가 또 다른 버려진 아이를 돌보는 장면으로 다시 읽게 한다. 이스마엘은 누구보다 원망할 이유가 많은 사람이었는데도 자기를 쫓아낸 아버지가 자기 대신 택한 아들 바로 그 동생에게 음식을 건넸다. 상처가 저절로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라 그가 상처를 지닌 채로 그렇게 하기를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이삭의 허기는 결국 다른 이에게 상처를 남긴다. 창세기 27장에서 눈먼 이삭은 에서에게 사냥한 고기로 별미를 만들어 오면 축복하겠다고 하고 리브가는 바로 그 맛을 흉내 내어 야곱에게 들려 보내며 이삭은 그 별미를 먹고 엉뚱한 아들을 축복한다. 평생 그를 붙들어준 맛이 마지막에 그를 속이는 도구가 된 것이다. 이승우는 이 편애를 단죄하지 않고 사람에게는 균형을 잡는 재주가 없고 사랑에게는 균형에 대한 감각이 없으니 편애는 비정상적인 사랑이 아니라 지극히 자연스러운 사랑의 모습이라고 말한다. 그 말은 위로처럼 들리면서도 서늘했는데 편애가 자연스럽다는 것이 그 편애가 남긴 상처까지 자연스럽다는 뜻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삭의 허기는 그에게 일어난 상처이면서 동시에 그가 두 아들에게 상처를 건네는 통로이기도 했다. 상처 입은 사람은 자기가 받은 상처 때문에 다른 이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는데 우리는 그를 어디까지 이해하고 어디서부터 책임을 물어야 할까. 소설은 답하지 않고 나도 아직 답을 모르겠다.

 

이삭은 아버지를 생각하며 하나의 물음을 품는다. 형을 쫓아낼 때 아버지는 언제나처럼 신의 뜻을 앞세우고 법과 도리를 뛰어넘는 신의 섭리를 말했을 테지만 법과 도리의 세계를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이 그것을 뛰어넘으려 할 때 인간성이 부서지지 않고 그것이 가능한가. 하갈이 쫓겨나는 자리에서 던졌던 질문을 이삭은 남겨진 자리에서 그리고 장작 위에 홀로 남았던 자리에서 다시 떠올린다.

 

여기까지 이삭을 따라오고 나서 나는 한 걸음 물러나 근본적인 질문 하나를 붙들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 작품의 의의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먼저 떠오른 것은 성경이 비워둔 자리였다. 창세기에서 이삭은 족장들 가운데 가장 말이 없고 가장 수동적인 인물이며 모리아산 이후로는 더욱 그렇다. 22장 19절은 아브라함이 젊은 종들에게로 돌아와 함께 브엘세바로 갔다고 적는데 그 문장 어디에도 이삭의 이름은 없다. 함께 산에 오른 아들이 함께 내려왔다는 말이 빠져 있는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을 장작 위에 두고 홀로 내려갔다는 이승우의 설정은 아마 바로 이 빈칸에서 자라났을 것이다. 성경은 그날을 아브라함의 믿음이 시험을 통과한 날로 기록했고 그 이야기에서 이삭은 시험의 도구였을 뿐 그가 그 뒤로 어떻게 살았는지는 누구도 묻지 않았다. 이 작품은 신앙의 위대한 승리 뒤편에서 한 아이가 치러야 했던 값을 기록하고 그 아이에게 내면을 돌려준다.

 

다음으로 보인 것은 상처가 흘러가는 길이었다. 성경에서는 서로 떨어진 일화였던 모리아산과 광야의 고기와 눈먼 아버지의 축복이 이 작품 안에서는 한 사람의 상처에서 시작된 하나의 사슬로 이어진다. 그런데 이승우는 그 사슬 어디에도 악인을 세우지 않는다. 아브라함도 이삭도 리브가도 저마다의 사랑을 따랐을 뿐인데 그 사랑들이 엇갈리며 다음 세대에 상처를 남긴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먼 옛날 족장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부모에게서 받은 상처가 자식을 사랑하는 방식에 스며드는 우리 집의 이야기로 읽힌다.

 

그리고 버려진 자의 자리가 있었다.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보낼 때 신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에

게서 난 자라야 네 자손이라 불릴 것이라고 말했고 창세기는 이스마엘의 족보를 짧게 정리한 뒤로 다시는 그를 돌아보지 않는다. 그렇게 이야기 바깥으로 밀려난 아들을 이승우는 선택받은 아들이 가장 무너졌을 때 그를 살린 사람으로 다시 불러들이면서 선택과 배제로 갈라진 계보를 형제의 돌봄으로 다시 잇는다. 하갈에게 목소리를 주었던 작업이 그 아들에게까지 이어진 것이니 조용하지만 대담한 전복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이 작품이 신학의 질문을 몸으로 옮겨왔다는 데 주목했다. 신의 뜻을 따르는 일이 인간성을 부수지 않고 가능한가라는 물음은 철학과 신학이 오랫동안 논증으로 다퉈온 질문이지만 이 소설은 논증 대신 아무리 먹어도 배부르지 않은 한 사람의 몸을 내민다. 인간의 마음으로 신의 문제에 다가가겠다던 작가의 방법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자리가 바로 여기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이 작품의 의의는 신의 이야기 뒷면에서 사람이 치른 값을 기록하고 그 값이 대물림되는 방식과 그 와중에도 누군가 건네는 돌봄을 함께 보여주었다는 데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값이 한 사람의 몸에 새겨진 증상의 이름이 허기였다.

 

그 허기라는 말을 나는 오래 붙들고 있었다. 나는 먼저 허기가 왜 채워지지 않는지를 물었다. 이삭은 먹어도 배부르지 않았고 무엇을 먹느냐에 따라 오래전 광야의 기억이 되살아났으니 그의 허기는 배고픔과 같은 말이 아니었다. 레비나스는 필요와 욕망을 나누어서 필요는 배가 고프면 먹고 먹으면 끝나듯 채워질 수 있지만 타자를 향한 욕망은 그 타자를 내 안에 삼켜 소유할 수 없기에 끝내 충족되지 않는다고 했다. 라캉은 다른 자리에서 우리가 무언가를 달라고 할 때 그 밑에 사랑을 구하는 요구가 깔려 있어 원하던 것을 받아도 무언가가 남는다고 했다.

이 말들을 이삭에게 대어 보니 그의 허기를 조금 다르게 읽을 수 있었다. 그가 입에 넣은 것은 고기였지만 그가 구한 것은 처음부터 고기로는 채울 수 없는 무엇이었다. 다만 철학자들의 말은 허기가 왜 채워지지 않는지를 알려줄 뿐 이삭의 허기가 어디서 왔는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왜 하필 고기였고 왜 하필 에서였는지는 장작 위에 홀로 남겨진 날과 광야에서 형이 고기를 구워준 날이라는 이삭만의 이야기를 들어야 비로소 이해되고 그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바로 소설이다.

 

그러자 또 하나의 물음이 따라왔다. 허기가 욕망과 맞닿는 자리는 어디일까. 둘은 무언가가 비어 있다는 감각에서 함께 시작되어 허기는 그 빈자리의 아픔이 되고 욕망은 그 아픔이 무언가를 향해 움직이는 모습이 된다. 그러나 그 방향이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어서 이삭의 편애 역시 허기가 한 아들을 향해 움직이면서 다른 아들을 지나쳐버린 모습이었다. 자기 허기가 어디서 왔는지 안다고 해서 그 허기가 멈추는 것도 아니다. 깨달음은 허기에 이름을 붙여줄 뿐 그 허기를 거두어 가지는 않는다.

 

이어서 나는 그 허기가 이삭 한 사람의 것인지 아니면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닌 것인지 궁금해졌다. 헤겔은 자기의식이 다른 자기의식의 응답 속에서만 자기를 확인할 수 있다고 보았으니 사람은 누군가가 자기를 알아봐 주기를 원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삭의 허기 역시 한 사람의 부끄러운 얼룩만은 아닐 것이며 타인의 응답 속에서 자기를 확인하려는 사람의 조건이 그에게는 유난히 아픈 모습으로 드러난 것인지도 모른다.

 

나의 허기는 무엇에 기인하는가 하고 스스로에게 물었다. 오래 들여다보았고 어렴풋이 그 이름을 알 것도 같았지만 그 이름을 여기 적지는 않겠다. 다만 그것이 이삭의 허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나를 아프게만 한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향해 계속 걸어가게 한 힘이기도 했다는 것은 말할 수 있다.

 

그 이름을 어렴풋이 알게 되자 더 두려운 물음이 찾아왔다. 그렇다면 나는 이 허기를 죽을 때까지 채울 수 없다는 말인가. 아마 그럴 것이다. 한 번 채워졌다고 해서 졸업할 수 있는 종류의 배고픔이 아니니까. 이 사실 앞에서 나는 카뮈의 시시포스를 떠올렸다. 신들은 시시포스에게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밀어 올리는 벌을 내렸는데 바위는 꼭대기에 닿자마자 다시 굴러떨어지고 그는 처음부터 다시 밀어 올려야 한다. 그런데 카뮈가 주목한 것은 바위를 미는 순간이 아니라 바위가 굴러떨어진 뒤 그가 다시 산 아래로 걸어 내려가는 시간이었다. 그 시간에 시시포스는 자기 운명을 똑바로 바라보며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시 바위를 향해 걸어가고 그 순간 그 형벌은 신들의 것이 아니라 그의 것이 된다. 그리고 카뮈는 산꼭대기를 향한 투쟁 그 자체가 인간의 마음을 채우기에 충분하다고 했다.

 

카뮈가 말한 그 채움은 무엇일까. 시시포스의 바위가 끝내 꼭대기에 머물지 못하듯 나의 허기도 이삭의 허기도 끝내 사라지지 않을 테니 그것이 허기를 없앤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채울 수 없다는 것과 늘 굶주려 있다는 것은 같지 않으며 허기가 사라지지 않는다고 해서 삶 전체가 허기로만 채워지는 것도 아니다. 이삭 역시 허기를 극복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그 밤의 말들을 아직 다 풀지 못했다고 하면서도 걷다가 멈추고 멈춰 있다가 다시 걸었으니 허기와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워간 것이다. 산을 내려가는 시시포스의 걸음과 그의 걸음이 겹쳐 보였다.

 

다시 광야로 돌아가 본다. 이스마엘은 이삭의 허기를 채워준 것이 아니라 동생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듣지도 못한 채로 그저 먹을 것을 건넸을 뿐이지만 그 음식이 이삭을 살아남게 했고 자기 삶을 이어가게 했다. 어쩌면 공감이란 상대의 허기를 대신 없애주는 일이 아니라 그 허기를 혼자 감당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일인지도 모른다.

 

이삭의 허기가 낳은 편애는 축복을 빗나가게 했고 자기 것이 아닌 축복을 받은 야곱은 도망치듯 집을 떠난다. 마지막 연작 「야곱의 사다리」는 그 도망자의 밤에서 시작할 것이다. 아버지의 축복을 훔쳐 홀로 광야에 누운 아들은 어떤 허기를 마주하게 될까. 이제 마지막 장을 넘겨볼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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