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오후 네 시
“영숙씨, 오늘은 정말 그만해야겠어. 목소리도 안 나와.”
할머니는 미안하다는 듯 지원의 손을 잡고 손등을 천천히 쓸어 주었다.
“그래요, 할머니. 이제 기운 차리고, 또 나 없는 일주일 잘 견디셔야 해요. 병수씨도 만나고, 사랑도 많이 하고요. 알았죠?”
할머니는 못내 아쉬운 표정으로 지원을 배웅했다. 요양원을 나오면서도 지원은 자꾸만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마음 같아선 할머니를 집으로 모셔가 함께 살고 싶었지만, 현실이 허락하지 않았다. ‘빨리 학교만 졸업하면……’ 스스로 다짐했지만, ‘그럴 날이 과연 올까?’라는 예고된 슬픔이 가슴을 짓눌렀다. 할머니의 기력이 눈에 띄게 쇠약해지고 있었다.
지원은 어린 시절부터 할머니가 읽어주던 책들 중에서 갈매기의 꿈을 가장 좋아했다. 할머니도 이 책을 읽을 때면 유난히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어쩌면 할머니는 갈매기의 꿈을 읽으며 서병수 씨를 떠올렸을지도 몰랐다. 평생 한 사람을 그리워하며 살아온 사랑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지원은 자신이라면 그렇게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사랑은 현실이어야 하고, 적어도 준 만큼 받아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신념이었다. 할머니는 한때 운명을 거스르려 했고, 그 결혼이 불행했던 것도 어쩌면 필연이었을지도 몰랐다.
‘운명……’
할머니를 떠올릴 때마다 그 단어가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상하게도 알 수 없는 불안이 스멀스멀 기어왔다. 애써 고개를 흔들며 생각을 지웠다.
신아 엄마에게서 연락이 왔다. 일요일에 또 신아와 새아를 맡아달라는 부탁이었다. 뭔가 찜찜한 기분이 들었지만, 아이들의 천사 같은 얼굴이 떠올라 흔쾌히 수락했다. 이번에는 전주의 미술관에 가야 했다. 미술관 프로그램을 마친 후, 오후 3시에 시작하는 어린이 뮤지컬까지 관람하는 일정이었다. 신아 엄마가 데려다주기로 했지만, 올 때는 아이들과 버스를 타야 한다는 점이 조금 걸렸다. 그래도 10시간에 15만 원이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무엇보다 아이들은 온순했고, 함께할 때마다 지원을 잘 따랐다.
이번 뮤지컬은 구름빵이었다. 아침을 거른 아빠를 위해 가족들이 구름으로 빵을 만들어 주는 이야기. 회사에 늦을까, 배고프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가족들의 모습에서 사랑이 묻어났다. 세상 기준으로 무능해 보일지라도, 가족들의 따뜻한 사랑 덕분에 아빠는 행복할 수 있었다.
“언니, 우리도 홍비랑 홍시처럼 아빠를 위한 구름빵을 만들어요!”
새아가 반짝이는 눈으로 지원을 올려다보았다.
“맞아요! 언니, 우리 구름빵을 만들면 하늘을 날 수 있을까요?”
신아도 덩달아 말했다. 지원은 문득 궁금해졌다.
“왜? 신아랑 새아는 지금 행복하지 않아?”
잠시 침묵이 흘렀다. 신아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엄마랑 아빠가 자주 싸워요. 가끔은 엄마가 소리를 너무 크게 질러서 무서울 때도 있어요.”
지원은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남의 가정사를 엿보는 것 같아 불편했다. 하지만 신아는 계속 말했다.
“우리도 홍비네처럼 구름빵을 만들면 엄마랑 아빠가 웃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신아는 무언가 더 말하고 싶어 했지만, 설명하지 못하고 그저 지원을 바라봤다. 지원은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무릎을 꿇고 부드럽게 말했다.
“신아야, 엄마랑 아빠는 너희가 말 잘 듣고, 밥도 잘 먹고, 푹 자면 더 이상 싸우지 않을 거야.”
두 아이를 꼭 안아주었다. 근처 매점에서 구름빵을 팔고 있었다. 지원은 아이들과 함께 빵을 샀지만, 신아와 새아는 한입 베어 물다가 멈췄다. 그 모습이 안쓰러웠다.
‘신아 엄마가 보여주는 것만큼 이 가족은 행복하지 않은 것 같아…’
지원은 알 수 없는 불안감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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