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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들

이번주 수요일 밤 영화는 "프리다"

by thetraveleroftheuniverse 2010. 3. 23.

매일밤 영화상영이 이뤄진다.

근데 3월 계획을 발표했던데로 수요일은 약속한 영화를 방영하기로 했다.

이번주 24일 영화는 "프리다"

 

 

 

 

 

 

삶이란 캔버스에 펼쳐진 열정

그들의 만남은 가장 큰 사건이자 최대의 축복이었다!

“내 인생엔 두 가지 대형사고가 있었어. 차 사고와 디에고, 바로 당신!”

남미의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멕시코의 한 마을.
세상 모든 것이 흥미로운 탐구 대상으로만 보이던 사춘기 소녀시절,
버스와 전차가 부딪치며 일어난 인생의 첫 대형사고는 첫번째 사랑의 실연과 함께 그녀의 온 몸과 마음이 부서지는 상처를 남겼다.
그 후 프리다는 침대에 누워 두 팔만을 간신히 움직일 수 밖에 없는 고통 속에서 깁스를 캔버스 삼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몇 년 후, 프리다는 성숙한 숙녀의 모습으로 당대 최고의 화가인 ‘디에고’를 찾아가 자신의 그림을 평가해달라고 요구한다. 직접 내려와서 보라는 당돌한 그녀의 모습에 묘한 매력을 느낀 디에고는, 결국 프리다의 그림뿐만 아니라 그녀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렇게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든 두 사람은 예술적 동지로, 사랑하는 연인으로 마음의 정조를 약속한다.

불완전한 미모를 가진 여자라도 그녀만의 매력을 찾아낼 줄 아는 진정한 바람둥이 예술가와 성실한 사랑을 원하는 프리다. 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디에고와의 결혼이 자기 인생의 두번째 대형사고이자 최대의 축복일 줄은…

별로지만, 프리다 칼로를 만나는 즐거움.
<프리다> 영화가 베니스 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되었다는 내용을 봤을 때, 이 영화가 한국에서 개봉을 할까 하는 의심을 했다. 중남미에 관심이 많은 유쾌한씨는 꼭 보고 싶었으나 개봉을 안 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많은 영화들이 수입되고 만들어지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도 부족한 면이 많다. 솔직히 어려운 점이 많다고 말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 그나마 크고 작은 영화제들이 많아져 다양한 영화를 볼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지만 말이다. 어쨌든 불행 중 다행으로 <프리다>는 한국에 수입되어 개봉되었다. 물론 그 전에 어렵게 구한 DVD로 보기는 했지만 말이다.

<프리다>가 한국에서 개봉되는 것을 보면서 ‘역시 영화는 산업이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하게 됐다. <프리다>가 한국에서 개봉될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일까. 대형 서점을 한 번 둘러보면 대충 감이 잡힌다. 그냥 일반인들을 붙자고 물어보자. “중남미 화가 중에 아는 사람 있으세요?” 제대로 대답할 수 있는 사람들이 몇 이나 있을까. 유쾌한씨도 마찬가지지만 중남미에 거의 무지몽매하니 알 리가 없다. 그런데 서점에 가면 잘 보이는 곳에서 프리다 칼로에 관한 책을 찾아 볼 수 있다. 소설 같은 그녀의 삶은, 한국에 많이 소개되었고, 감동과 삶에 대한 성찰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조금 상업적으로 얘기하자면, 팔릴만한 스토리이기 때문이다. 출판사들도 땅 파서 책 내는 것 아니니, 이윤에 전혀 무관심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어쨌든 그 덕택에 그나마 프리다 칼로는 한국에서 많이 알려졌고, 소수의(?) 팬 층을 확보하였다.(유쾌한씨도 그 중 한명이다.) 이런 기반 속에서 영화 <프리다>는 한국에 수입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겠는가.

지금 유쾌한씨는 영화 얘기는 안 하고 약간 잡다한 얘기를 하고 있다. 왜? 솔직히 전기영화에 대해서는 별로 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전기영화의 경우 영화화 하는 대상에 기대기 때문에 졸작의 수준은 면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한 인간의 삶보다 영화를 더 극적으로 만들기는 정말 어렵기 때문에 명작의 대열에 끼기도 어렵다. 그러다 보니 범작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다. 솔직히 <프리다>도 그렇다. 프리다 역을 맡은 셀마 헤이익이 정말 프리다 칼로와 닮기는 했지만, 열연을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물론 관객들이 느끼는 감동의 수위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배우들의 연기에 대해서 느끼는 바가 다르겠지만 유쾌한씨가 봤을 때는 아니다. 프리다 칼로의 삶은 영화에서 보여 지는 것 이상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은 감독의 문제이겠지만, 이 영화는 프리다 칼로가 삶에서 느꼈을 처절함이 없다. 그녀의 작품을 볼 때 느껴지는 계속해서 추락하는 듯한 절규가 없다. 그러니 이 영화의 감독인 줄리 테이머 보다 프리다 칼로가 더 유명한 것이겠지만.

프리다 칼로의 작품은 미국 미술 경매 시장에서 중남미 화가들 중에서 가장 비싸게 팔리는 작품이다. (이러니 영화가 만들어졌겠지만.) 이러한 사실로 프리다 칼로가 디에고 리베라 보다 더 유명한가 보다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아니다. 프리다 칼로의 남편인 디에고 리베라가 예술적으로, 중남미 미술계에 끼친 영향력으로나 프리다 칼로 보다 더 큰 존재이지만, 디에고 리베라의 주요 작품들은 벽화이니 그것을 띠어다가 팔수는 없으니까. ^^. 이 얘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고, 이 영화를 보다 보면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된다. 어떤 것들이냐면 프리다 칼로의 삶을 이야기하기 위해 보여 지는 디에고 리베라의 삶이다. 프리다 칼로의 삶에 매혹되어 디에고 리베라는 바람둥이로 인식하기 십상이다. 물론 진짜 바람둥이기는 했지만. 록펠러 빌딩에 그림을 그려달라는 주문을 받아들인 것도 웃기는 얘기였지만, 민주주의에 대한 사상으로 고취되었던 미국에 가서 활동을 하고, 록펠로 빌딩에 혁명적 그림을 그리려 했던 것도 참 재밌는 일이 아닌가. 디에고 리베라의 삶과 함께 또 눈여겨 봐야할 것은 당시 멕시코의 역사적 상황이다. 언제 멕시코가 사회주의 국가였는가 하는 의문을 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중남미의 대부분 국가들에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섰었으며, 멕시코 역시 마찬가지다. 그래서 박정희 정권 시기 우리나라 대사관은 중남미 없었고, 북한 대사관이 있었다. 오늘날은 그 반대지만. 어쨌든 영화 속에서 보여주는 역사적 상황들은 일면적으로 사실이긴 하지만 별 관심이 없는 이들에게는 오해의 소지가 다분하다. 또한 프리다 칼로의 삶은 당시 역사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물론, 대부분의 예술가들이 그렇듯 프리다 칼로도 디에고 리베라도 머리 보다는 가슴으로 움직이던 사람들이었지만.

<프리다>, 영화로 봤을 때 수작이라고 할 수 없지만 즐기고 생각할 만한 영화다. 그리고 다른 문화권에 대한 이해를 넓힐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유쾌한씨는 영화보다는 프리다 칼로를 만나는 재미에 유쾌했었으니까.

[ 뉴스 글_유쾌한씨 ]  | Daum 영화 평론가 | 2003.11.23 06:44:31
 
 

영 화  '프리다'

잔인한 운명 속에서 꽃 핀  예 술 혼

 

 

 2002년에 제작된 ‘프리다’ 는 멕시코 여성 화가인 ‘프리다 칼로’의 일생을 그린 영화이다. 연극, 오페라, 뮤지컬, 인형극, 영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줄리 테이머 감독의 작품이며 셀마 헤이엑이 주인공으로 열연했다. 영화의 포스터에 나온 셀마 헤이엑의 사진은 유난히 짙은 눈썹을 가졌던 프리다의 실제 모습과 많이 닮은 것 같다. 남미 특유의 강렬한 색감에 이끌려서 보게 된 이 영화는 삶을 대하는 태도의 중요성을 생각해 보게 해 주었다.

 

프리다 칼로(Frida Kahlo)는 1907년 멕시코시티 교외 코요아칸에서 유태계 독일인 아버지와 스페인과 인디오의 혼혈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프리다’ 라는 이름은 독일어로 평화를 뜻한다고 하지만 이름과는 반대로 그녀의 인생을 평탄하지 못했다. 화가로서, 그리고 여성으로서 그녀의 일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두 가지의 사건은 교통사고로 몸을 다친 것과 디에고 리베라를 만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칼로는 뛰어난 외모와 재주를 타고 났지만 18세 때 겪은 끔찍한 교통사고로 척추, 오른쪽 다리, 자궁을 크게 다쳐 평생 30여 차례의 수술을 받게 되고, 이는 평생동안 그녀의 인생에 지속적인 영향을 준다. 교통사고 직 후 스스로 몸을 움직이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절망에 빠져 있던 그녀는 그림을 그림으로써 그 고통을 극복하고자 한다.

 

 

위의 그림《다친 사슴(1946)》은 유난히 자화상이 많았던 그녀의 작품 중 하나이다. 그림 속 그녀의 모습은 사슴의 형상과 그녀 자신의 얼굴이 합쳐져 있다. 여기서 칼로는 여러 개의 화살 때문에 피를 흘리고 있지만 눈빛은 매우 투명하고 결연한 표정을 짓고 있다. 아마도 자신의 고통을 극복하려는 강한 의지를 표현하는 것 같다.  

 

칼로의 그림《자화상(1944년)》

 

칼로의 또 다른 그림《자화상(1944년)》에서는 교통사고로 인한 육체적 고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그녀의 척추가 부서져 있고 온 몸에 못이 박혀있는 끔찍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좀 더 자세히 보면 그녀의 얼굴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다. 이 그림만으로도 여러 번의 수술로 그녀가 겪었을 고통과 두려움을 느낄 수 있다. 누워서 운신할 수 없었던 상황에서 그녀가 거울에 비친 자신을 관찰하며 스스로의 모습을 그렸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수도 있다. 그녀 스스로도 자화상에 대해 “나는 너무나 자주 혼자이기에 또 내가 가장 잘 아는 주제이기에 나를 그린다”고 말했다고 한다.

 

칼로의 인생에 큰 영향을 준 두 번째 사건은 바로 디에고 리베라를 만난 것이었다. 리베라 또한 멕시코를 대표하는 화가로서 어린시절부터 그림에 대한 재능을 나타내어 정부 장학금으로 유학도 하였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대벽화에 감명을 받아 D.A.시케이로스 등과 미술가협회를 결성한 후 활발한 벽화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멕시코의 신화 · 역사 · 서민생활 등을 민중에게 직접 이야기할 수 있도록 공공 건축물의 벽면에 늠름한 감각과 힘에 넘치는 벽화를 주로 그렸다. 그의 작품에는 멕시코 민중에 대한 애정이 넘쳐 흐르며, 동시에 유럽회화의 전통을 멕시코의 전통에 결합시키려 했다는 점도 큰 특색이다.

 

 

칼로와 리베라 부부의 사진

 

칼로와 리베라의 만남도 바로 그림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칼로는 사고 이 후 수차례의 수술 끝에 기적적으로 다시 걸을 수 있게 된 후, 병상에서 그렸던 그림을 평가받기 위해 직접 디에고를 찾아간다. 칼로의 그림을 본 리베라는 “프리다의 작품에서 예기치 않은 표현의 에너지와 인물 특성에 대한 명쾌한 묘사, 진정한 엄정함을 보았다. (…) 잔인하지만 감각적인 관찰의 힘에 의해 더욱 빛나는 생생한 관능성이 전해졌다. 나에게 이 소녀는 분명 진정한 예술가였다”고 평했다고 한다. 리베라와의 만남 이 후 칼로는 화가가 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고 둘은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한다.

 

지만 그는 칼로보다 21살이나 나이가 많았고 멕시코를 대표하는 미술가라는 명성 뿐 아니라 여성편력과 돌발적인 행동으로 인한 악명도 함께 갖고 있었다. 칼로는 결혼 후 한 남자의 아내로서 행복해지기를 원했지만 리베라는 끊임없이 외도를 했고 이 때문에 평생을 고독과 외로움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아이를 가져 어머니로서의 삶을 살고 싶어 했지만 이 또한 뜻대로 되지 않았다. 칼로는 몇 차례의 유산을 겪고 결국 이러한 꿈마저 이루지 못하게 된다. 하지만 이것으로 그녀의 고통이 끝난 것이 아니었다.

 

훗날 칼로가 리베라와의 만남을 교통사고에 이은 ‘두 번째 대형사고’로 칭하도록 만든 사건이 생긴 것이다. 리베라는 칼로의 여동생 크리스티나와 외도를 하고 남편과 여동생으로부터 동시에 배신당한 칼로는 깊은 마음의 상처를 입게 된다. 나로서는 짐작밖에 하지 못할 상처지만 그것이 교통사고에 비할 정도로 큰 충격이 됐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칼로는 이때부터 리베라의 성실한 아내 역할을 그만두고 홀로 여행을 하고 술을 마시는 등 방황하지만, 정신적으로는 결코 리베라를 떠나지 못했다. 그녀에게

깊은 상처를 준 리베라를 증오하면서도 그의 곁에 있고 싶어한 칼로의 마음은 단순한 사랑이나 집착을 넘어선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칼로에게 리베라는 배우자, 연인 그 이상의 존재였으며 어떤 것으로도 대신 할 수 없는 인생의 동반자였다. 리베라 또한 여성편력으로 칼로를 힘들게 하면서도 평생 그녀의 곁을 지켰으며 그녀의 예술세계를 진정으로 존중해 주었다. 이 둘의 관계는 칼로에게 엄청난 행복과 고통을 동시에 가져다 주었지만 그 자체로 너무도 필연적이었기 때문에 서로를 영원히 떠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칼로가 “나의 평생소원은 단 세 가지, 디에고와 함께 사는 것, 그림을 계속 그리는 것, 혁명가가 되는 것이다.”라고 한 것을 보면 그녀와 디에고의 관계가 참으로 특별했던 것 같다.

 

1940년대 말부터 칼로의 건강은 급격히 나빠져 오른쪽 다리를 잘라내야만 했고 몇 차례의 척추 수술은 실패를 거듭했다. 칼로는 하루의 대부분을 누워서 지내야만 했으며 휠체어에 기대 간신히 앉아있을 수 있었지만 그림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그 후, 1953년 멕시코에서는 처음으로 칼로의 개인전이 열렸고, 이것은 죽음을 앞둔 칼로를 위해 리베라와 친구들이 열어준 전시회였다. 하지만 정작 그녀 자신은 앉지도 못하게 되어 침대를 그대로 옮겨서 개막전 축하연에 참여할 수 밖에 없었다. 이로부터 약 1년이 지난 뒤 칼로는 폐렴이 악화되어 47년의 고통스러웠던 삶을 마친다.

 

 

미술관이 된 칼로의 푸른 집

 

그 후 리베라는 그녀가 평생 살아온 집을 나라에 기증하여 그녀를 기리는 미술관이 되도록 하였다. 그녀의 작품들은 초 현실주의로 분류되기도 하지만 그녀 스스로는 유럽의 모더니즘에 영향을 받지 않았으며 멕시코적인 것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하였다. 칼로의 작품들은 70년대에 페미니즘 운동이 일어나면서 다시 한 번 재발견되었으며, 이 때는 그녀의 작품에 담긴 솔직 담백한 여성성과 섹슈얼리티가 높게 평가되었다.

 

칼로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일기에는 ‘이 외출이 행복하기를,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기를’이라고 쓰여 있었다고 한다. 이것을 보면 그녀는 오히려 죽음을 행복한 외출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녀에게 삶이 얼마나 힘들고 외로웠으면 다시 돌아오지 않기를 바란다고 했을까? 하지만 정말 그녀의 삶은 마냥 고통스럽기만 했던 것일까? 겉으로 드러나는 것과는 다르게 칼로의 삶은 다른 누구의 그것보다도 풍요로웠을지 모른다. 그녀의 삶은 나를 숙연하게 만들었고, 만약 나에게 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나는 그것을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마저 들었다. 극한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칼로는 오히려 남들이 갖지 못한 것을 두 가지나 가졌던 것 같다.

 

타고난 방탕한 기질로 그녀를 힘들게도 하지만 누구보다도 그녀의 예술세계를 인정해 주고 평생의 동지가 되어준 리베라, 그리고 무엇도 꺾지 못하는 그림에 대한 열정이 바로 그것이다. 열정을 통해 그녀의 그림은 불구의 몸으로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소일거리 이상이 되었다. 이것은 살아가면서 겪는 상황이나 조건을 만들 수는 없지만 삶의 가치는 스스로 만들 수 있다는 소중한 진리였다. 영화 ‘프리다’를 보고나서 역경을 딛고 일어서려는 의지와 삶을 긍정하는 자세만 있다면 어떤 상황에서든 풍요로운 삶을 만들어 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