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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즈

Ben Webster의 라이브 앨범 - Ben Webster at the Renaissance(1985년)

by thetraveleroftheuniverse 2018. 7. 5.

     Ben Webster의 라이브 앨범 - Ben Webster at the Renaissance(1985년)






                                            Ben Webster





Ben Webster /Benjamin Francis Webster (1909년 3월 27일 - 1973년 9월 20일)는 미국의 재즈 테너 색소폰 연주자였다. 미주리 주 캔자스시티에서 출생한 그는 콜맨 호킨스 (Coleman Hawkins)와 레스터 영 (Lester Young)과 함께 세 명의 가장 중요한 "스윙 테너 (swing tenors)"중 하나로 간주된다. "The Brute" 또는 "개구리"로 애정 어린 닉네임으로 알려진 그는 거칠고, 잔인한 말투를 가졌지만 따뜻함과 정서를 가지고 연주하는 발라드에 능숙했다.

그는 자신의 악기를 독학하라고 충고해준 알토 색소폰 연주자 Johnny Hodges의 도움을 받았다. 웹스터는 색소폰을 취하기 전에 어린 시절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것을 배웠다. 그는 테너 색소폰 연주를 주로 하지만 때때로 피아노로 돌아 와 녹음하기도 했다. 웹스터의 색소폰 연주는 블루스와 스윙 시대의 발라드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융통성이 있거나 현대적인 것은 아니지만 최고로 스윙할 수 있었고 그의 음색은 Archie Shepp, Lew Tabackin, Scott Hamilton,David Murray, Bennie Wallace와 같은 다양한 플레이어에게 나중에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그는 1965년부터 1973년 9월 20일 네덜란드 암스텔담에서 소풍을 마감하기 까지 유럽에 정착해 유럽의 재즈 뮤지션들과 꾸준한 협연을 펼쳤다. 그는 인생의 마지막 몇 년 동안은 너무 뚱뚱해 숨이 차고 술에 자주 취해 그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장엄한 소리를 솔로로 길게 연주할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오늘의 앨범 Ben Webster at the Renaissance는 미국의 재즈 색소포니스트 Ben Webster 가 1960년 캘리포니아에서 녹음해 레이블 Contemporary를 통해 발매했다.

벤 웹스터는 1950 년대 후반과 1960 년대 초의 로스 앤젤레스에서의 활동은 무척 힘이 들었다고 해요. 연주할 마땅한 곳이 없어 재정적으로 큰 부담을 안았고 이러저러한 이유로 미국을 떠나 유럽에 정착해야만 했던 거죠. 그 힘든 와중에 그는 오늘의 앨범을 녹음한 셈이네요.
세션맨들의 배경아래 그는 자신의 연주활동의 새로운 부흥기를 맞이하고 싶은 기대감으로 이 앨범을 녹음했을 성도 싶고... 애틋합니다.

사정이 어떠했든, 연주는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고, 웹스터의 음색은 따뜻하고 부드럽고...
레드 미첼의 음색도 흙처럼 짙고 흙 같은 냄새가 스며 나오고요...
오늘의 자장가로!!!

Ben Webster의 라이브 앨범 - Ben Webster at the Renaissance(1985년)

레이블: Contemporary C-7646
녹음일: 1960년 10월 14일
발매일: 1985년
길이: 45:03
프로듀서:Lester Koenig


Track listing
1."Gone with the Wind" (Allie Wrubel, Herb Magidson)
- 8:59 Bonus track on CD release
2."Stardust" (Hoagy Carmichael, Mitchell Parish) - 10:59
3."Caravan" (Juan Tizol) - 10:01
4."Georgia on My Mind" (Hoagy Carmichael, Stuart Gorrell) - 6:37
5."Ole Miss Blues" (W. C. Handy) - 6:42
6."Mop Mop" (J. C. Heard, Teddy Wilson) - 8:06 Bonus track on CD release
7."What Is This Thing Called Love" (Cole Porter) - 7:35 Bonus track on CD release
8."Renaissance Blues" - 5:48 Bonus track on CD release
(Ben Webster, Frank Butler, Jim Hall, Jimmy Rowles, Red Mitchell)

Personnel
Ben Webster - tenor saxophone
Jim Hall - guitar
Jimmy Rowles - piano
Red Mitchell - bass
Frank Butler - drums



https://youtu.be/XezJwe4Rm9g

What Is This Thing Called Love





Ben Webster /Benjamin Francis Webster (1909년 3월 27일 - 1973년 9월 20일)는 미국의 재즈 테너 색소폰 연주자였다.  미주리 주 캔자스시티에서 출생한 그는 콜맨 호킨스 (Coleman Hawkins)와 레스터 영 (Lester Young)과 함께 세 명의 가장 중요한 "스윙 테너 (swing tenors)"중 하나로 간주된다.  "The Brute"  또는 "개구리"로 애정 어린 닉 네임으로 알려진 그는 거칠고, 잔인한 말투를 가졌지만 따뜻함과 정서를 가지고 연주하는 발라드에 능숙하다.  그는 자신의 악기를 독학하려고 충고해준 알토 색소폰 연주자 Johnny Hodges의 도움을 받았다.
이른 생활 및 경력 
웹스터는 색소폰을 취하기 전에 어린 시절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것을 배웠다. 그는 때때로 피아노로 돌아 와 녹음하기도 했다.  버드 존슨이 색소폰에 대한 기본을 보여 주자 웹스터는 어린 패밀리 밴드 (당시 레스터 영을 포함)에서  이 악기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이 시점에서 캔자스시티는 1930년대 재즈에서 가장 큰 이름을 얻은 용광로였다.  Webster는 1932년 Count Basie, Oran "Hot Lips"Page 와 Walter Page를 포함하는 그룹으로 Bennie Moten의 밴드에 합류했다. 이 시대는 Robert Altman의 영화 캔자스시티 에서 재창조되었다. 
Webster는 Andy Kirk, 1934 년 Fletcher Henderson Orchestra, Benny Carter, Willie Bryant, Cab Calloway 및 단명 Teddy Wilson 빅 밴드를 포함하여 1930 년대 오케스트라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엘링턴과 함께 
벤 웹스터는 1935년 듀크 엘링턴 (Duke Ellington )의 오케스트라와 처음으로 연주했으며 1940년에는 밴드의 첫 번째 주요 테너 솔리스트로 풀타임으로 공연했다.  그는 Ellington의 알토 독주자인 Johnny Hodges 를 그의 연주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언급했다.  다음 3년 동안, 그는 " 코튼 테일 (Cotton Tail) "과 " 모두 너무 빨리 (All Too Soon) "를 포함한 많은 레코딩을했다.  베이스 밴드 Jimmy Blanton 의 기여와 함께 그의 공헌은 그 기간 동안 Ellington의 오케스트라가 Blanton-Webster 밴드로 알려져 있기에 매우 중요했다.  Webster는 그가 Ellington의 양복 한 벌을 잘라낸 혐의로 분노한 언쟁 끝에 1943 년에 밴드를 떠났다.
 Ellington을 떠난 후
1943년 Ellington을 떠난 후 Webster는 뉴욕시의 52번가에서 일하면서 리더이자 사이드맨으로 자주 녹음했다. 이 기간 동안에 그는 Raymond Scott, John Kirby, Bill DeArango 및 Sid Catlett 뿐만 아니라 Jay McShann의 밴드와도 짧은 시간을 보냈는데, Jay McShann 의 밴드는 Blues Shouter Jimmy Witherspoon도 특집으로 삼았다.  1948년 몇 달 동안 그는 엘링턴의 오케스트라에 잠시 돌아갔다.
1953년, 그는 Norman Granz 의 다양한 레이블에 대한 녹음에서 10 년 동안 Webster의 중요한 협력자가 될 피아니스트 Oscar Peterson과 King of the Tenors 을 녹음했다.  피아노에Peterson, 트럼펫 연주자 Harry 'Sweets'Edison 및 기타와 함께, 그는 필 하모닉 패키지에서 Granz의 재즈와 함께 여행하고 녹음했다.  1956년에 그는 클래식 피아니스트 Art Tatum과 함께 베이시스트 Red Callender와 드러머 Bill Douglass의 지원을 받았다.  Coleman Hawkins 는 Peterson, Herb Ellis (기타), Ray Brown (베이스), Alvin Stoller (드럼)와 함께 1915년 12월 16일 동료 테너 색소폰 연주자인 Coleman Hawkins 와 함께 벤 웹스터 를 만난다.  호킨스와 웹스터의 녹음은 재즈 클래식이며 캔자스시티에서 처음 만난 테너 색소폰의 두 거장이 함께했다.
1950 년대 후반, 그는 Gerry Mulligan과 함께 5 중주를 구성했으며 르네상스라는 로스 앤젤레스 클럽에서 자주 연주했다.  웹스터 - 멀리 간 (Webster-Mulligan) 그룹이 블루스가수 인 지미 위더스푼 (Jimmy Witherspoon)을 라이브 앨범으로 함께 연주했다.
유럽의 마지막 10 년 
웹스터는 대체로 꾸준히 활동했지만, 1965년 그는 영구적으로 유럽으로 이주하여 지역 뮤지션뿐만 아니라 그곳에 거주하는 다른 미국 재즈 뮤지션과 함께 작업했다.  그는 지난 10 년 동안 기뻐했을 때 연주했다.  그는 런던에서 1년 동안 살았고 암스테르담에서 4 년을 보냈으며 1969년 코펜하겐 에서 마지막 집을 지었다. 웹스터는 1970년 덴마크 블루 영화 ' 조용한 날들 '( Cliety in Quish Days)에서 낮은 임대료의 카바레 클럽에서 색소폰을 연주하는 플레이어로 출연했다.  1971년, Webster는 Duke Ellington 과 그의 오케스트라와 코펜하겐의 Tivoli Gardens에서 2 개의 쇼를 재결합했다.  또한 그는 Earl Hines와 함께 프랑스에서 "라이브"를 녹음했다. 그는 또한 Buck Clayton, Bill Coleman 및 Teddy Wilson과 함께 녹음하거나 공연했다.
웹스터는 1973년 9월 암스테르담에서 라이덴 (Leiden) 의 트위 슈피겔 (Twee Spieghels)에서 공연을 한 후 대뇌 출혈을 경험했으며 9월 20일 사망했다.  그의 시체는 코펜하겐에서 화장되었고 그의 재는 도시의 노 레브로 구역에있는 Assistens Cemetery 에 묻혔다 .
레거시
블루스와 스윙 시대의 발라드에 뿌리를 두고있는 융통성이 있거나 현대적인 것은 아니지만 웹스터는 최고로 스윙할 수 있었고 그의 음색은 Archie Shepp, Lew Tabackin, Scott Hamilton,David Murray,  Bennie Wallace와 같은 다양한 플레이어에게 나중에 영향을 미쳤다.
웹스터의 사후 빌리 무어 주니어 (Billy Moore Jr.)는 웹스터의 재산 관리인과 함께 벤 웹스터 재단 (Ben Webster Foundation)을 창설했다.  웹스터의 유일한 합법 상속인인 할리 로빈슨 (Los Angeles)이 기꺼이 재단에 대한 권리를 양도했기 때문에 벤 웹스터 재단 (Ben Webster Foundation)은 1976 년 덴마크의 인장 ( Queen 's Seal)이 확증했다. 재단의 신탁 증서에서 초기 문단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덴마크에서의 재즈 보급을 지원".  트러스트는 덴마크와 미국의 음악가들에게 웹스터의 연례 로열티를 제공하는 유익한 토대이다. 매년 뛰어난 벤 웹스터상은 젊은 뛰어난 뮤지션에게 수여된다.  상금은 크지 않지만 권위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수년 동안 몇몇 미국 음악가들이 재단의 도움으로 덴마크를 방문했으며 콘서트, 녹음 및 기타 재즈 관련 행사가 지원되었다.
웹스터의 재즈 레코드 및 기념품 컬렉션은 남부 덴마크 대학 도서관 ( Odense)의 재즈 컬렉션에 보관된다.
벤 웹스터 (Ben Webster)는 남부 코펜하겐 (Copenhagen)의 "Ben Websters Vej"라는 이름의 거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