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에반스와 쳇 베이커 둘은 모두 서정적이며 내성적인 연주로 잘 알려져 있는데요. 이들의 비슷한 성향에도 불구하고 많은 협연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물론 많겠지만 그 중에서도 쳇 베이커는 자신의 약물 남용으로 불안정한 삶을 살면서 약물 남용이 직접적으로 연주에 영향을 끼쳤지만 빌 에반스의 약물 남용은 무척 개인적인 것으로 약물 사용이 연주에 영향을 끼치지 않도록 노력한 인물이며 쳇 베이커는 음악을 귀로 들으며 그의 트럼펫 연주를 독학 했지만 빌 에반스는 작곡자와 편곡가 연주자로서 잘 교육받은 음악가(사우스 이스턴 루이지애나 대학 출신)였다고 하죠. 또한 에반스는 유럽 투어를 자주 했지만 미국 거주자로 남아있었지만 베이커는 몇 십 년을 유럽을 방황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앨범 Chet Baker / Bill Evans – The Complete Legendary Sessions에서는 빌 에반스와 협연한 쳇 베이커의 세션 몇을 편집한 앨범이랍니다. 그야말로 전설의 세션들의 편집 앨범인셈이죠.
쳇 베이커(1929 - 1988)는 1952년에 첫 녹음을 시작했고 이후 10년 못되는 그의 전성기를 누렸다고 할 수 있는데요. 이 녹음은 1958년과 1959년 사이에 이루어졌죠. 베이커의 명성은 Gerry Mulligan(1927 - 1996/색소폰)과 그 자신의 쿼텟 Russ Freeman(1926 - 2002/피아노)과 잠시지만 Dick Twardzik(1931 - 1955/피아노)와 협연했을 때 꽃피웠다고 할 수 있는데요. 1955년 말엽에 약물 남용으로 사망한 Twardzik의 죽음 이후 베이커의 약물 남용은 더 증가했고 그의 이러한 습관은 마지막 인생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짜 재즈 예술가로서의 그의 연주와 노래는 우리의 심금을 울렸는데요.
1958년 앨범 CHET: The Lyrical Trumpet of Chet Baker는 특별한 셋팅을 이루어 Evans와 Herbie Mann, Petter Adams, Kenny Burrell과 함께 녹음하게 되었다죠. 이 앨범의 트랙 중 Early Morning Mood 는 오리지널 엘피에는 시간 제약 때문에 실을 수 없었는데 나중 편집앨범에는 포함되었다고 하네요.
세 번째 Baker - Evans세션은 작곡가 Frederic Loewe와 작사가 Alan Jay Lerner에게 헌정하는 베이커의 프로젝트 중 하나였고요, 이 앨범 타이틀은 Chet Baker Plays the Best of Lerner & Loewe였으며 Evans(마지막 협연)과, 1959년 7월 22일의 21일에 에반스 대신 피아니스트 Bob Corwin이 연주했던 세션이 포함 되어 있답니다. Corwin과 함께 했던 세션의 곡으로 이 앨범에서는 보너스 트랙으로 Almost Like Being In Love이 포함되었다고 합니다. (이곳저곳에서 짜깁기한 정보)
사실은 어젯밤부터 이 앨범에 빠졌네요.
밤이 깊어 갈수록 더 진해지는 곡.
저는 독서의 배경으로 깔아놓았다가, 책 덮고 망연히...
그리고 새벽을 맞이하게 했던 앨범이었답니다.
밴친님들 꼭 혼자서 들으시길요. ㅋㅋ 진짜, 분위기 빵빵!!!
주말인데요. 저도 심심하고요.
풀버전도 있으니 참고하시길...
Chet Baker / Bill Evans – The Complete Legendary Sessions(2010년)
레이블: American Jazz Classics – 99 005
발매일: 2010년
스타일:Cool Jazz
Tracklist
1 Alone Together
2 How High The Moon
3 It Never Entered In My Mind
4 'Tis Autumn
5 If You Could See Me Now
6 September Song
7 You'd Be So Nice To Come Home To
8 Time on My Hands
9 You And The Night And The Music
10 Early Morning Mood
Chet Baker Plays The Best Of Lerner And Loewe
11 Show Me
12 I Talk To The Trees
13 Thank Heaven For Little Girls
14 I Could Have Danced All Night
15 Almost Like Being In Love
Credits
Alto Saxophone – Zoot Sims (tracks: 10, 13)
Baritone Saxophone – Pepper Adams (tracks: 1 to 11, 13, 14)
Bass – Earl May (tracks: 11 to 14), Paul Chambers (3) (tracks: 1 to 10)
Drums – "Philly" Joe Jones (tracks: 4, 8, 9), Clifford Jarvis (tracks: 11 to 14), Connie Kay (tracks: 1 to 3, 5 to 7, 10)
Flute – Herbie Mann (tracks: 1 to 11, 13, 14)
Guitar – Kenny Burrell (tracks: 3, 6)
Piano – Bill Evans (tracks: 1 to 14), Bob Corwin (tracks: 15)
Tenor Saxophone – Herbie Mann (tracks: 15), Zoot Sims (tracks: 11, 15)
Trumpet – Chet Baker
Notes
트랙 1-3, 5-7, 10은 1958년 12월 30일에 & 트랙 4, 8, 9는 1959년 1월 19일에
트랙 11-14는 1959년 1월 22일에 & 트랙 15는 1959년 7월 21일에 녹음됨
https://youtu.be/3WsZbe3nTqs?list=PLy3UgclYRGLdLbQL_bD_RjybW_MtJe4y7
1.
Clifford Jarvis (1941 년 8 월 26 일 - 1999 년 11 월 26 일)는 미국의 하드 밥 과 프리 재즈 드러머로 1980년대 영국 런던으로 이주하여 사망했다.
전기
클리포드 자비스 (Clifford Jarvis)는 매사추세츠 주 보스턴에서 태어났으며 1950 년대 버클리 음악 대학 에서 공부했다. 뉴욕으로 이사를 하면서 그는 Chet Baker , Randy Weston , Yusef Lateef , Freddie Hubbard , Barry Harris , Jackie McLean , Elmo Hope와 녹음 하고 Grant Green과 Rahsaan Roland Kirk와 함께 연주하여 1959 년과 1966 년 사이 재즈 에 입문했다.
그는 1962 년부터 1976 년까지 Sun Ra 와 함께 일하고 녹음했다. Pharoah Sanders와 함께 연주하고 녹음했으며 Sonny Simmons , Alice Coltrane , Kenny Drew , Walter Davis 및 Archie Shepp 와 녹음 했다.
Clifford는 또한 Blue Note 앨범 That Certain Feeling (1968)에서 오르간 연주자 인 John Patton 과 함께 녹음했다.
1980 년대에 Jarvis는 영국으로 건너가 Courtney Pine 과 같은 차세대 음악가와 함께 연주했으며 런던, Chats Palace Arts Center에서 음악 교육을 받으며 사망했다. 그는 1984 년부터 1994 년까지 Dalston의 Pyramid Arts Development에서 수석 드럼 튜터를 지냈다.
2.
필리 조 존스Joseph Rudolph " Philly Joe " Jones (1923년 7월 15일 - 1985년 8월 30 일)는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난 미국의 재즈 드러머로, "Great" Miles Davis Quintet 의 드러머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때때로 영향력 있는 다른 재즈 드러머인 파파 조 존스 (Papa Jo Jones) 와 혼동을 일으킵니다. 2 명은 며칠 차이로 사망했습니다.
.초기 경력
어렸을 때, 존스는 필라델피아 라디오 방송국 WIP의 키드 쇼 (Kiddie Show)에서 특별 탭 댄서로 출연했습니다. 그는 제 2 차 세계 대전 중 육군에 있었습니다.
1947년 그는 뉴욕시의 카페 협회 (Café Society)에서 하우스 드러머가 되었으며, 그 곳에서 그는 최고의 비밥 연주자들과 연주했습니다. 그 중 존스에 대한 가장 중요한 영향은 타드 다메론 (Tadd Dameron) 이었습니다. Jones는 1955년부터 1958년까지 Miles Davis Quintet 을 방문하여 "The Quintet"(피아노의 Red Garland , 색소폰의 John Coltrane 및베이스의 Paul Chambers 와 함께) 밴드로 활동했습니다. 데이비스는 죤스가 그의 마음에 드는 드러머인 것을 인정하고 그가 다른 드러머에 있는 죤스를 항상 경청했다고 그의 자서전에서 진술했다.
1958 년부터 존스는 리더로 일했지만 빌 에반스 (Bill Evans)와 행크 모블리 (Hank Mobley)를 비롯한 다른 뮤지션과 함께 사이드 맨으로 일했습니다. 에반스는 데이비스와 마찬가지로 존스가 그의 가장 좋아하는 드러머라고 공개적으로 언급했다.
유럽
1967년과 1972년 사이에 존스는 런던과 파리에서 살았으며 Archie Shepp, Mal Wadron, Hank Mobley 등의 음악가와 공연 및 녹음을 했습니다. 2 년 (1967-69 년)동안 존스는 런던의 햄스테드 (Hampstead) 에 있는 특별히 조직된 학교에서 가르쳤지만 영국 음악가 협회 (Musicians 'Union)에 의해 영국에서 일하는 것을 방해 받았습니다. 그의 1968년 앨범 Mo 'Joe ( Trailways Express 로도 발매 됨) 는 지역 뮤지션 ( Peter King , Harold McNair , Chris Pyne , Kenny Wheeler 등)과 함께 런던에서 녹음되었습니다.
나중 년
필라델피아로 돌아온 존스는 르 그랑프리 (Le Grand Prix)라고 불리는 융합 단체를 이끌고 1976년 빌 에반스 (Bill Evans)와 함께 투어를 하고 1977-79년 레이블 갤럭시에서 레드 갈랜드 (Red Garland)와 함께 작업했습니다.
198년부터 그는 작곡가 타드 다메론 (Tadd Dameron)의 음악에 헌정된 그룹 다메로니아 (Dameronia)를 찾아 그가 사망할 때까지 함께 연주했습니다. 그는 또한 2 편의 영화에서 연주했습니다.존스는 1985 년 펜실베이니아 주 필라델피아에서 62 세의 나이에 심장 마비 로 숨졌다. 그는 그의 아내와 아들을 남겼습니다. 존스 (Jones)의 깊은 음색의 톰톰 사운드와 미묘한 소용돌이로 교차하는 리듬을 가진 베이스 드럼연주법은 많은 드러머들에 의해서
모방되고 있습니다.
3.
Paul Laurence Dunbar Chambers, Jr. (1935년 4월 22일 -1969년 1월 4일)는 재즈 더블 베이시스트였습니다. 1950년대와 1960년대의 리듬 섹션에서의 그의 재즈 베이스의 개발의 중요성은 그의 짧은 기간 동안의 길이와 폭 뿐만 아니라 그의 완벽한 시간과 억양 그리고 비로투오소적인 즉흥 연주에서 측정될 수 있습니다. 그는 또한 숙달된 활을 가지고 연주하는 솔로로 유명했습니다. Chambers는 밴드 리더 혹은 공동리더로서 다수의 앨범을 녹음했고 트럼펫 연주자인 Miles Davis 의 " 최초의 위대한 퀸텟 "(1955-63)과 피아니스트 Wynton Kelly 1963-68)와 함께한 사이드 맨으로서의 명성 또한 큽니다.
전기
챔버스는 1935년 4월 22일 펜실베니아 주 피츠버그에서 폴 로렌스 챔버스 (Paul Lawrence Chambers)와 마가렛 에코스 (Margaret Echos)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머니의 사망 후 미시간 주 디트로이트에서 자랐습니다. 는 그의 몇몇 친구와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baritone horn은 그의 첫 번째 악기였습니다. 나중에 그는 튜바를 채택했습니다. "나는 꽤 잘 연주했습니다. 그러나 그 긴 퍼레이드에서 그걸 가지고 다니는 것은 상당히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 악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챔버스는 1949년 즈음에 현악기 연주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정규 베이스 훈련은 1952년 디트로이트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베이시스트와 함께 수업을 받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챔버스는 실제로 리허설 교향악단이었던 Detroit String Band라는 단체와 함께 클래식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1952 년부터 1955 년까지 Cass Technical High School 에서 공부하면서 그는 Cass' own symphony에서 여러 다른 학생 그룹들 사이에서 연주했으며 그 중 하나는 바리톤 색소폰을 연주했습니다. 테너 색소폰 연주자 Paul Quinichette 의 초청으로 뉴욕으로 떠날 무렵 그는 여러 악기에 대한 실무 지식을 흡수했습니다.
재즈 베이스 연주자들은 Duke Ellington의 베이시스트인 Jimmy Blanton이 1930 년대 말에 악기 역할의 변신을 시작할 때까지 드럼을 사용한 타임 키핑에 크게 제한 받았습니다. Chambers는 그에게 첫 번째 영향을 준 찰리 파커 (Charlie Parker) 와 버드 파웰 (Bud Powell )의 연주를 듣기 시작한 것은 약 15 세였습니다. 오스카 페티 포드 (Oscar Pettiford) 와 레이 브라운 (Ray Brown) 은 자신이 존경하는 최초의 베이스 연주자였고, 리듬 섹션 작업을 위해 퍼시 히스 (Percy Heath), 밀트 힌튼 (Milt Hinton), 웬델 마샬 (Wendell Marshall)등의 영향을 받았고 Charles Mingus 와 George Duvivier는 재즈 베이스의 영약을 넓히려고 한 그들의 노력과 기술적인 힘에 의해 영향을 받았습니다. Blanton은 챔버스가 일평생 가장 좋아하는 연주자이었습니다. 헤이스팅스 Hastings 스트리트 지역의 작은 술집 중 한 곳에서 첫 공연을 한 그는 곧 Thad Jones, Barry Harris 및 다른 연주자들과 함께 클럽에서 곧 연주하게 되었습니다.
1954년부터 1955년까지 그는 Bennie Green, Quinichette, George Wallington, JJ Johnson 및 Kai Winding 과 같은 음악가들과 함께 의미 있는 연주 여행을 했습니다. 1955년 그는 Miles Davis의 5 중주에 합류하여 1963년까지 Kind of Blue를 포함한 많은 클래식 앨범에 출연했습니다. 챔버스의 가장 유명한 공연 중 하나는 앨범의 첫 번째 트랙 인 " So What "로 챔버스와 피아니스트 Bill Evans 가 등장하는 짧은 듀엣으로 시작됩니다. Kind of Blue 세션은 모든 뮤지션에게 도전적이었으며, 그들의 음악적 능력의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Chambers가 Kind of Blue 에 기여한 곡은 재즈 역사상 가장 리드미컬하고 조화로운 베이스 중 하나입니다. 1963년부터 1968년까지 챔버스는 윈튼 켈리 (Wynton Kelly) 트리오와 함께 연주했습니다. 그는 평생 경력 동안 재즈의 다른 중요한 음악가들의 사이드 맨으로 자주 프리랜서로 연주 했습니다.
Paul Chambers는 평생 동안 술과 헤로인 모두에 중독되었습니다. 그는 1968년 말 인플루엔자의 심각한 증세로 입원했으며, 실제로 결핵에 걸린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의 장기 기능이 악화됨에 따라 챔버스는 18일 동안 혼수상태에 빠졌습니다. 헤로인과 알코올 중독에 중독된 것이 그의 건강 문제에 기여했다고 믿어집니다. 1969년 1월 4일 그는 33세에 결핵으로 사망했습니다.
영향
챔버스의 반주와 데이비스 및 다른 지도자들과 함께한 솔로는 여전히 독특하고 영향력이 있습니다. 그와 Slam Stewart 는 arco 또는 bowed 기능을 수행하는 최초의 재즈베이스 연주자였습니다. 데이비스 밴드에서 그의 역할은 두 개의 리듬 섹션으로 베이스 연주를 했습니다. 첫 번째는 피아노의 Red Garland 와 드럼의 Philly Joe Jones 가 색소폰 연주자 인 Art Pepper가 Rhythm Section을 만나 함께 연주한 유명한 앨범에 등장한 "리듬 섹션"으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 앨범은 Wynton Kelly와 Jimmy Cobb 과 함께 많은 세션을 진행하여 John Coltrane, Wes Montgomery, Miles Davis ' Kind of Blue의 Freddie Freeloader와 함께 한 트랙과 Kelly의 이름으로 발표한 앨범인 Kelly Blue등이 있습니다.
Paul Chambers는 세션 뮤지션으로서 큰 요구를 받았으며 Thelonious Monk의 Brilliant Corners, Coltrane의 Giant Steps, Oliver Nelson의 The Blues와 The Abstracts와 같은 랜드 마크가 될 유명한 앨범등을 포함하여 활동적이었던 기간 동안 수많은 앨범에서 연주했습니다. 많은 뮤지션들이 챔버스에 헌정된 노래를 썼습니다. 피아니스트 레드 갈 랜드 (Red Garland)는 "The PC Blues"곡을 썼고, 콜트레인 (Coltrane)의 노래 "Mr. PC"는 챔버스 (Chambers)의 이름을 따서 지었습니다. Tommy Flanagan 은 Kenny Burrell과 John Coltrane Prestige 1958 LP 에서 공연된 "Big Paul"을 썼습니다. Max Roach 는 일본에서 녹음된 1977 년 드럼 솔로 LP에서 "Five For Paul"이라는 드럼 솔로를 썼고, Sonny Rollins도 그를 위해 "Paul 's Pal"이라는 곡을 작곡했습니다.
인터뷰에서 동료 베이시스트 Charlie Haden 은 Chambers에 대한 그의 찬사를 회상했습니다.
"나는 19 세 때 처음으로 저에게 특유의 사람이었던 폴 챔버스 (Paul Chambers)를 만났습니다. 나는 프레스티지와 리버 사이드의 모든 레코드에서 그의 연주를 들었습니다. 과소 평가된 플레이어가 있습니다. 그는 단지 비현실적인 그의 베이스 라인에 반음계의 음표를 연주하는 방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 그는 높음 음표로 올라가서 건너뛰고 그것을 묶어 버렸습니다 ... 그는 연주에서 위대한 소리를 만들어냈고, 이 위대한 시간을 즐겼습니다. "
— Charlie Haden, in Ethan Iverson, "Interview with Charlie Haden", Do The Math (Blog)
4.
Herbie Mann으로 알려진 Herbert Jay Solomon (1930년 4월 16일 - 2003년 7월 1일) 은 미국의 재즈 플루트 연주자이자 월드 뮤직의 중요한 초기 연주자였다. 그는 경력 초반에 테너 색소폰과 클라리넷 ( 베이스 클라리넷 포함)도 연주했지만 맨은 플루트를 전문으로하는 최초의 재즈 뮤지션 중 한 명이 되었다. 그의 가장 인기 있는 싱글은 " Hijack "이었는데 1975년 3주 동안 빌보드 1 위를 차지했다. Mann은 그의 음악에서 그루브 접근을 강조했다. Mann은 자신의 레퍼토리에서 "그루브 레코드의 전형"이 Memphis Underground(1969년 Herbie Mann의 발매앨범으로 재즈와 리듬 앤 블루스의 융합) 또는 과 Push Push(1971년 Herbie Mann과 록 기타리스트 Duane Allman이 발매한 앨범)라고 느꼈다. 그 이유는 "리듬 섹션이 모든 지각에 잠겨 있기 때문이다."
전기
Herbie Mann은 뉴욕의 브루클린에서 러시아 출신인 해리 C. 솔로몬 (1902년 5월 30 일 - 1980년 5월 30일)과 루스 로즈 솔로몬 (née Brecher1905년 7월 4일 - 2004년 11월 11일))사이에서 태어났다. 오스트리아 - 헝가리 부코비나에서 출생한 루마니아 출신으로, 6 세에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했다. 부모님은 모두 무용수와 가수였다. 뿐만 아니라 나중에 댄스 강사가 되었다. 그는 브라이튼 해변에 있는 링컨 고등학교에 다녔다. 그의 첫 프로 퍼포먼스는 15살 때 Catskills 리조트의 공연이었다. 1950년대에 Mann은 주로 Phil Woods, 베이스 클라리넷 , 테너 색소폰 , 솔로 피리 등의 아티스트와 함께 콤보로 활동했다.
Mann은 재즈와 월드 뮤직의 융합을 조기에 개척한 사람이었다. 플롯 연주자는 1959년 미 국무부가 아프리카 여행을 후원한 후, Afro-Cuban 재즈의 앨범을 발매했다. 1961년 맨은 브라질을 방문하여 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빔 (Antonio Carlos Jobim) 과 기타리스트 바덴 파웰 (Baden Powell)을 비롯한 브라질 뮤지션과 함께 미국으로 돌아왔다. 이 앨범은 미국과 유럽에서 보사노바의 대중화를 도왔다. 그는 종종 브라질을 주제로 해서 연주했다. 1960년대 중반에 Mann은 젊은 Chick Corea를 고용하여 밴드 중 일부에서 연주했다.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초반 맨은 뉴욕시의 The Bottom Line 과 Village Gate 클럽에서 Sarod의 거장 Vasant Rai와 함께 듀엣을 연주했다.
1969년 히트 앨범인 Memphis Underground 이후 다수의 디스코 스타일 부드러운 재즈 레코드가 재즈 순수 주의자들로부터 비판을 받았지만 재즈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면서 Mann은 계속 활발하게 활동 할 수 있었다. 이 녹음에 음악가는 가수 Cissy 휴스턴 ( Whitney 휴스턴의 어머니), 기타리스트 Duane Allman 및 래리 Coryell, 베이시스트 Donald "Duck"Dunn , Chuck Rainey 및 Miroslav Vitous를 포함하여, 드러머 Al Jackson, Jr, 그리고 Bernard Purdie 등 소울과 재즈에서 가장 잘 알려진 세션 플레이어 중 일부였다. 이 기간 동안 Mann은 재즈 뮤지션에게는 희귀 팝 히트곡을 많이 냈다. 1998년 인터뷰에 따르면 Mann은 빌보드 200 차트에 25 곡 이상의 앨범을 만들었지만 그의 재즈피아의 대부분은 성공하지 못했다 "
Mann은 Ishu Patel이 1978년에 제작한 캐나다 애니메이션 영화 상영위원회 에서 음악을 제공했다.
허비 만 (Herbie Mann)과 윌 리 ( Will Lee) (1975)
1970년대 초 Atlantic Records의 한 부문인 Cotillion Records 에서 배포한 Embryo Records 라는 자체 레이블을 설립했다. Embryo는 Ron Carter의 Uptown Conversation (1970)과 같은 재즈 앨범을 제작했다. Miroslav Vitous 의 첫 솔로 앨범, Infinite Search (1969); Frankfurt Jazz Festival (1971)에서 Phil Woods 와 그의 유럽 리듬 머신. 리듬 섹션으로 Average White Band 를 특색으로 삼은 Dick Morrissey 와 Jim Mullen 's Up (1976); TONTO 's Expanding Head Band의 Zero Time (1971)을 포함하여보다 락 지향적인 스타일의 730 시리즈가 있다. 그는 나중에 설립된 레이블에서 어려움을 겪은 후 Kokopelli Records 를 설립했다. 1996년 Mann은 Red Hot Organisation 에서 제작한 AIDS-Benefit 앨범인 Red Hot + Rio의 one Note Samba / Surfboard"곡으로 Stereolab 과 공동 작업을 했다. Mann은 또한 Bee Gees의 앨범 Spirits Have Having 에서 혼을 연주했다.
2003년 5월 3일 뉴올리언스 재즈와 헤리티지 페스티벌에서 마지막 모습을 보였으나 2003년 7월 1일 전립선 암 과의 긴 전투 끝에 73세의 나이로 2 개월 이내에 사망했다. 그는 그의 아내인 Susan Janeal Arison과 Paul Mann, Claudia Mann, Laura Mann-Lepik 및 Geoffrey Mann과 같은 4 명의 자녀를 두고 뉴멕시코의 Pecos에 있는 그의 집에서 사망했다.
5.
빌 에번스
본명윌리엄 존 에번스
출생1929년 08월 26일(1929-08-26)
미국 뉴저지주 플레인필드시
사망1980년 09월 15일 (51세)
미국 뉴저지주 포트리자치구
국적미국
직업재즈 피아니스트, 작곡가
장르재즈, 모달 재즈, 쿨 재즈
악기피아노
레이블리버사이드, 버브, 판타지
관련 활동조지 러셀, 마일즈 데이비스, 캐논볼 애덜리. 짐 홀, 토니 베넷
빌 에번스(영어: Bill Evans, 본명:William John Evans)는 미국의 재즈 피아니스트이다. 그가 사용한 인상파적인 화성, 전통 재즈 래퍼토리의 창의적인 해석, 리듬과의 독립, 노래하는 듯한 선율은 많은 피아니스트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는 세계 2차 대전 이후 가장 영향력있는 재즈 피아니스트로 평가된다. 빌 에반스는 목을 매우 낮게 하여 피아노와 얼굴이 평행이 된 상태로 연주를 하는 독특한 스타일을 가지고 있었다. 빌 에반스는 다운 비트 재즈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태생, 유년기
빌 에반스는 미국 뉴저지주 플레인필드에서 러시아계 어머니와 웨일스계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머니의 교회에서 첫 음악 교육을 받았다. 빌 에반스의 어머니는 모던 클래식 작곡가에 관심이 있는 아마추어 피아니스트였으며, 빌 에반스는 6세때부터 클래식 피아노 레슨을 시작하였다. 그는 또한 13세에 숙련된 플룻연주자가 되었으며 바이올린도 연주할 수 있었다. 12세때에는 그의 형 해리를 대신해 버디 발렌티노 밴드에 참여하였다. 당시 그는 고전적인 음악을 해석할 수 있었지만 즉흥 연주는 할 수 없었다. 초기에 그는 정확히 악보대로만 연주할 수 있었지만, 곡을 하모나이즈(화음화)하고 이것을 어떻게 활용하는지를 배우면서, 바로 즉흥연주를 시작하였다. 한편 그는 집 지하실에 설치된 녹음 스튜디오에서 댄스와 재즈 음악을 연주하였다. 1940년대 후반, 빌 에반스는 뉴저지의 여러 클럽에서 부기 우기 음악을 연주하였다. 그는 사우스이스턴 루이지애나 대학교에서 음악 공부를 하였다. 1950년 졸업 연주회에서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3번을 연주하였고, 피아노 연주 및 교육 학위를 받고 졸업하였다. 그는 또한 사우스이스턴 루이지애나 대학교에서 친목 풋볼 팀의 쿼터백으로 활약하였고 1949년 교내 대회의 우승에 기여하였다. 빌 에반스의 첫 번째 프로 활동은 시카고에서 활동한 색소폰 연주자 허비 필즈의 밴드에서였다. 1950년 여름, 밴드는 동부해안에 위치한 할렘의 아폴로 극장에서의 공연을 포함하여 3개월간 빌리 홀리데이와 연주하였고, 필라델피아, 볼티모어, 워싱턴 D.C의 하워드 극장에서도 공연하였다. 밴드에는 허비 필즈와 빌 에반스 외에도 트럼펫 연주자 지미 노팅엄, 트롬본 연주자 프랭크 로솔리노, 베이시스트 짐 아톤도 있었다. 시카고로 돌아온 후, 빌 에반스와 짐 아톤은 시카고 클럽에서 2인조로 활동하며, 가수 럴린 헌터와 함께 연주하기도 하였다. 얼마 후, 빌 에반스는 입대 제의를 받고 미 육군에 입대하였다. 군 복무를 마친 후, 빌 에반스는 뉴욕으로 돌아가 나이트클럽에서 재즈 클라리넷 연주자 토니 스콧 및 다른 리드 연주자와 함께 연주하였다. 이후 그는 젊은 음악 학도들을 가르친 맨스 음악 대학교에 작곡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50년대
뉴욕에서 활동하던 1950년대, 빌 에반스는 전통적이면서도 서드스트림(재즈와 클래식을 혼합한)으로 불리는 재즈 그룹에서 사이드맨 인식을 얻게 됐다. 이 시기 동안 그는 당대 최고의 재즈 음악가들과 다양한 기반에서 녹음을 하는 기회를 잡았다. 작곡가이자 이론가인 조지 러셀과 함께한 "Concerto for Billy the Kid"와 "All About Rosie"는 빌 에반스의 솔로 연주로 유명한 레코딩이다. 또한 빌 에반스는 찰스 밍거스, 올리버 넬슨, 토니 스콧, 아트 파머의 유명한 앨범에도 참여하였다. 1956년 그는 리버사이드 레코드에서 "Waltz for Debby"의 오리지널 버전이 수록된 데뷔 앨범 "New Jazz Conceptions"을 발표했다. 프로듀서 오린 킵뉴스는 데모 테입을 기타리스트 먼델 로우 연주로 전화를 통해 들려주어 녹음을 꺼리던 빌 에반스를 설득하였다. 1958년 빌 에반스는 마일즈 데이비스의 섹스텟에 유일한 백인 멤버로 가입되었다. 비록 8개월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빌 에반스의 내적 접근을 위한 즉흥연주는 마일즈 데이비스의 스타일에 깊은 영향을 주었으며, 이는 재즈 역사상 가장 성과적인 사건 중 하나였다. 마일스 데이비스는 그의 자서전에서 “빌 에반스는 피아노 앞에선 조용했다. 그가 가진 사운드는 반짝이는 선율 또는 맑은 폭포에서 떨어지는 상쾌한 물줄기 같았다.”라고 하였다. 또한 “나 또한 빌 에반스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 그는 반드시 연주되었어야 하는 연주를 하였다.”라고도 하였다. 자신이 리더를 하는 프로젝트를 하고 싶어한 빌 에반스는 1958년 말 마일스 데이비스 섹스텟을 떠났다(약물 문제의 증가 때문이기도 함). 얼마 후, 그는 명상적인 사운드를 수록한 “Everybody Digs Bill Evans”를 녹음하였다. 그러나 1959년 초, 마일스 데이비스의 요청으로 “Kind of Blue”를 녹음하기 위해 마일스 데이비스 섹스텟에 돌아왔다. “Blue in Green”을 공동작곡하였으며, “Flamenco Sketches”는 빌 에반스의 1958년 솔로 앨범 “Everybody Digs Bill Evans”의 “Peace Piece”라는 곡의 부분을 활용한 형태였음에도, 수년간 이 앨범에 대한 빌 에반스의 기여도는 간과되었다. 또한 빌 에반스는 “Kind of Blue”의 라이너 노트도 작성하였다(재즈 즉흥연주를 일본 시각 예술에 비유하여 표현한). 1959년 가을 그는 자신의 트리오를 시작하였다.
1960년대 1960년대가 시작되며, 빌 에반스는 베이시스트 스콧 라파로(Scott LeFaro)와 드러머 폴 모시안과 함께하는 트리오를 이끌었다. 이 그룹은 역대 피아노 트리오와 재즈 밴드 가운데 가장 많은 극찬을 받은 그룹 중 하나가 되었다. 이 그룹에서 빌 에반스는 동시에 펼쳐지는 즉흥연주에서 솔로 주자와 반주자의 경계를 약하게 하고, 밴드 멤버들 간의 인터플레이에 중점을 둔 고전 재즈 스탠더드와 원곡 구성에 초점을 맞췄다. 빌 에반스와 젊은 연주자 스콧 라파로의 협주는 상당한 음악적 공감을 이끌어 낼 정도로 매우 성과적이었다. 이 트리오는 “Portrait in Jazz”, “Explorations”, “Sunday at the Village Vanguard”, “Waltz for Debby” 네장의 앨범을 녹음하였다. 마지막 두 앨범은 같은 날 라이브로 녹음되었으며, 아직까지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재즈 음반으로 불린다. 2005년 이 모든 세트는 “The Complete Village Vanguard Recordings, 1961”이라는 3장의 CD로 발매되었다. 이 트리오의 잘 알려지지 않은 음반 중 1960년 초 라디오 방송에서 녹음된 “Live at Birdland”도 있지만 음질이 매우 좋지 않다. 피아노 트리오의 새롭고 자유로운 인터플레이 외에도 재즈에서는 거의 없었던 매우 느리며, 매우 조용한 연주도 시도하였다(“My Foolish Heart”의 연주와 같은). 그의 화성 및 보이싱은 매우 인상적이고, 드뷔시, 라벨, 스크리아빈, 사티에와 같은 클래식 작곡가를 연상케 하였다. 또한 마일스 데이비스와 함께 하던 시절 사용하던 두꺼운 블록 코드를 사용하지 않았다. 왼손의 보이싱이 오른손의 멜로디 라인 연주를 돕는 흔치 않은 주법은 재즈 피아니스트 버드 파웰의 영향으로 인한 것이었다. 마일스 데이비스, 빌 에반스와 같은 모달 재즈의 선구자들은 비밥이나 기타 이전 재즈의 작풍과는 다른 식의 화성을 선호하였다. “Time Remembered”와 같은 곡에서는 코드 변화를 많게 하거나, 비밥에서 파생된 스타일을 적게 흡수하고, 대신 음색 내에서 예측 불허한 진행을 많이 구사하였다. 이는 스윙의 변화를 가능케 하였으며, 새로운 사운드를 연주한 훌륭한 솔로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났다. 빈번한 병치 화음으로 인해 많은 작곡가들이 “plateau modal”이라 하는 “Time Remembered”의 스타일을 참고하였다. 스콧 라파로는 뱅가드 공연 10일 후, 교통사고로 인해 25세의 나이로 사망하였고 빌 에반스는 실의에 빠졌다. 그는 몇 달간 공식적인 녹음 및 공연을 하지 않았다. 라파로의 사망 이후 그의 첫 녹음은 기타리스트 짐 홀과의 듀엣 앨범이자 United Artist Jazz Records에서 1963년에 발매된 “Undercurrent”였다. 1962년 4월 24일, 두 연주자의 녹음은 현재도 널리 호평받고 있는 클래식 재즈 피아노-기타의 듀엣 녹음이다. 이 앨범은 사진작가 토니 프리셀이 촬영한 인상적인 표지 사진 “Weeki Wachee Spring, Florida” 로도 주목받았다. 원래 LP와 첫 재발매 CD는 작은 크기의 청색 버전에 제목과 블루 노트 로고가 입혀져 있었지만, 최근의 많은 재발매반은 원래의 크기와 흑백 색상이며, 문자 도안이 없다. 1962년 그의 트리오는 재구성되었다. 베이시스트는 척 이스라엘스가 대신하게 되었으며 드럼은 그대로 폴 모시안이 유지되었다. 그리고 두 앨범 “Moon Beams”와 “How My Heart Sings!”을 발매하였다. 1963년, 리버사이드에서 훨씬 더 큰 레이블인 버브로 옮겼으며, 그는 곡 별로 최대 세 개의 개별 트랙의 피아노를 오버더빙한 획기적인 앨범 “Conversations With Myself”를 녹음하였다. 이 앨범으로 그는 첫 그래미상(솔로 연주자 및 소그룹 - 최우수 재즈연주 부분)을 수상하였다. 버브에서 그는 많은 작품을 녹음하였지만, 예술적인 성과는 평탄하지 못했다. 척 이스라엘스의 빠른 성장과 창의적인 새 드러머 그래디 테이트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빌 에반스의 재창조된 즉흥연주가 두드러진 앨범 “Bill Evans Trio with Symphony Orchestra”(가브리엘 파우레의 “Pavane”가 수록된)은 주목받지 못하였다. 타운 홀에서의 빅 밴드 라이브 앨범과 같은 독특한 시도도 있었지만 빌 에반스의 불만으로 인해 발매되지 않았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함께한 앨범도 평론가들에게 좋은 평을 받지 못하였다(비록 파반느 공연에서의 재즈 트리오 부분은 다소 성공적으로 출시되었지만). 이 시기에 빌 에반스의 매니져 헬렌 킨은 중요한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그 분야 최초의 여성 중 한명인 그녀는 빌 에반스가 자학적인 생활방식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악화되지 않고 계속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1966년, 빌 에반스는 주목할만한 젊은 푸에르 토리코 베이스 연주자 에디 고메즈를 발굴하였다. 에디 고메즈는 11년간 머물며 빌 에반스의 연주와 그의 트리오의 컨셉에 새롭고 발전적인 영향을 주었다. 이 시기의 가장 중요한 앨범 중 하나는 1968년에 발매된 “Bill Evans at the Montreux Jazz Festival”이다. 이 앨범은 빌 에반스와 드러머 잭 드조넷이 함께한 유일한 앨범이지만 트리오의 주목할만한 에너지와 인터플레이로 평론가와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이 시기에 주목받은 다른 작품들은 “Bill Evans at Town Hall”(1966)에 수록된 “Solo - In Memory of His Father”, 기타리스트 짐 홀과의 성공적인 두 번째 협연 “Intermodulation”(1966)에 수록된 "Turn Out the Stars”, 14분이 넘는 버전의 “Never Let Me Go”가 수록된 절제되고 투명한 연주의 솔로 앨범 “Alone”(1968) 등이 있다. 1969년 빌 에반스는 헬싱키에 있는 일카 쿠시스토의 집에 방문하여 공연 전 재즈에 대한 인터뷰를 하였다. 1970년대의 빌 에반스 1968년부터 마티 모렐이 트리오의 드럼을 맡아서 1975년 가족 사정으로 그만 두었다. 이 그룹이 빌 에반스의 그룹 중 가장 오랫동안 안정적으로 유지되었다. 빌 에반스는 마약 습관을 떨쳐버렸고 개인적으로도 안정적인 시기였다. 그룹은 처음으로 일렉트릭 피아노를 사용한 "Left to Right"(1970), 그래미에서 두개의 상을 수상한 "The Bill Evans Album"(1971), "The Tokyo Concert"(1973), "Since We Met"(1974), "But Beautiful"(1974), 트리오와 전설적인 테너 색소폰 연주자 스탄 겟츠가 홀란드, 벨기에에서의 라이브 공연(빌 에반스가 사망한 이후인 1996년에 발매됨) 등의 앨범을 발매했다. 마틴 모렐은 예전 트리오의 타악기 연주자들과는 달리 에너지가 넘치고 직선적인 연주를 하는 드러머였다. 마틴 모렐이 떠난 후 빌 에반스는 에디 고메즈와 "Intuition", "Montreux III" 두 개의 듀오 앨범을 녹음하였다. 1974년, 빌 에반스는 클로스 오거맨이 작곡한 “Symbiosis”라는 다악장 재즈 협주곡 앨범(MPS 레코드 레이블에서 발매)을 녹음했다. 또한 가수 토니 베넷과 함께 1975년에 “The Tony Benett/Bill Evans Album”, 1977년에 “Together Again” 앨범을 발매하였다. 1975년 9월 13일, 빌 에반스의 아들 에반 에반스가 태어났다. 에반 에반스는 아버지의 잦은 투어활동으로 인해 아버지를 자주 보지 못하였다. 그는 10세에 대학의 20세기 작곡, 연주, 전자 작곡 과정에 열정적으로 참여하며, 영화 음악 작곡에서 천재적 재능을 보였다. 그는 또한 랄로 쉬프린과 음악가 버나드 마우리와 함께 아버지의 많은 작품을 연구하였다. 1976년, 드럼의 마티 모렐은 엘리엇 지그먼드로 교체되었다. 수 차례의 흥미로운 협연이 있었으며, 트리오의 앨범 녹음이 가능했던 1977년까지 유지되었다. “I Will Say Goodbye”(빌 에반스의 마지막 앨범, Fantasy Records에서 발매)와 “You Must Believe in Spring”(빌 에반스 사망 후 워너 브라더스에서 발매)에서는 빌 에반스의 마지막일 것이라는 변화가 눈에 띄었다. 가장 중점적으로 그룹의 즉흥연주와 상호연주에서였다. 빌 에반스는 새로운 범위의 솔로잉 표현을 시도하였고 실험적인 화성 및 조성을 시도하였다. 에디 고메즈와 엘리엇 지그먼드는 1978년 빌 에반스를 떠났다. 빌 에반스는 1957년 자신의 두 번째 앨범을 같이 녹음했던 (빌에반스가 항상 좋아했던) 필리 조 존스에게 빈 자리를 채워줄 것을 요청했다. 몇몇 베이시스트와 함께 하였지만 마이클 무어가 가장 오래 머물렀다. 빌 에반스 트리오의 가장 마지막 멤버는 베이스에 마크 존슨, 드럼에 조 라바베라였다.
사망
빌 에반스의 약물 중독은 1950년대 후반 마일스 데이비스와 함께하는 즈음 시작되었다. 그의 헤로인 중독 상태는 활동기간 대부분이었고 1960년대에 가장 심각하였다. 헤로인 중독으로 인해 건강과 경제사정이 좋지 않았다. 1960년대가 끝나면서, 헤로인 중독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보였으나 1970년대 코카인을 사용하게 되면서 아주 심각한 상태에 빠졌다. 그는 약물 과용, 간 손상, 평생동안 싸워온 간염으로 인해 매우 피폐해졌으며, 1980년 9월 출혈성 궤양, 간경변, 기관지 폐렴으로 인해 뉴욕에서 숨졌다. 빌 에반스의 친구 진 리즈는 피터 페팅거를 통해 빌 에반스의 약물 중독을 “역사상 가장 긴 자살"이라고 표현했다. 빌 에반스의 묘는 Roselawn 기념 공원 묘지(161구역 K), Baton Rouge, East Baton Rouge Parish, Louisiana에 있으며, 빌 에반스보다 1년 먼저 사망한 그의 형 해리 에반스 묘의 옆이다.
영향
음악 평론가 리차드 S.기넬은 “시대를 풍미한 빌 에반스는 피아니스트들에게는 완벽한 스승이며 청취자에게는 특별한 느낌을 전해주었다”고 기록하였다. 재즈 피아니스트들에게 빌에반스는 가장 많은 영향을 미쳤다(젊은 연주자들에게 맥코이 타이너가 유일하게 비슷한 영향을 미쳤다). 칙 코리아, 허비 행콕, 존 테일러, 스티브 쿤, 돈 프라이드먼, 마리안 맥파트랜드, 데니 제이트린, 보보 스텐슨, 워렌 번하트, 미셸 페트루치아니, 케이스 자렛 등 세계 많은 뮤지션들에 의해 빌 에반스는 기억되고 있다. 빌 에반스의 음악은 프레드 허쉬, 빌 찰랩, 라일 메이즈, 엘리안 엘리아스, 브래드 멜다우 등 젊은 피아니스트들의 의해 계속 되고 있다. “Conversations with Myself”와 “Further Conversations with Myself”는 여러번 오버더빙으로 만들어진 혁신적인 솔로 연주였다. “Waltz for Debby”, “Turn Out the Stars” , “Very Early”, “Funkallero”는 등 그의 많은 곡은 재즈 스탠더드로서 매우 많이 녹음되었다. 많은 헌정 앨범이 그의 사망 후 발매되었다. 팻 메스니의 “September 15th”가 그 중 하나이다. 빌 에반스는 7번의 그래미상에서 31번 후보에 올랐다. 1994년에는 그래미 평생 공로상을 수상하였다.
6.
Kenny Burrell/ Kenneth Earl " Kenny " Burrell (1931년 7월 31일 출생)은 1965년 Billboard Top 20 히트곡인 Organ Grinder Swing을 제작한 지미 스미스 (Jimmy Smith) 와의 공동 작업을 포함하는 Blue Note 레이블 작업으로 유명한 미국 재즈 기타리스트이다. 그는 재즈 기타리스트인 Charlie Christian과 Django Reinhardt를 블루스 뮤지션 T-Bone Walker 와 Muddy Waters 와 함께 인용했다. Burrell은 UCLA Herb Alpert School of Music 의 재즈 연구과 교수이자 교수로도 활동하고 있다.
전기
Burrell은 미시간 주 디트로이트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은 모두 악기를 연주하고 그도 12 세에 기타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는 Louis Cabara와 Joe Fava의 클래식 기타와 함께 작곡과 이론을 공부했다. Wayne State University의 한 학생인 그는 1951년 Dizzy Gillespie 의 sextet 회원으로 데뷔했으며, 그 뒤를 Detroit의 Fortune Records 에서 자신의 이름으로 기록한 "Tangier / Ground Round"싱글이 그 뒤를 이었다. Burrell은 대학 시절 동료 디트로이트 음악가 Pepper Adams, Donald Byrd, Elvin Jones 및 Yusef Lateef 와 함께 새로운 세계 음악 협회 (New World Music Society) 모임을 창설했다.
Burrell은 1955년 졸업 후 오스카 피터슨과 함께 투어를 했으며, 1956년 피아니스트 Tommy Flanagan 과 함께 뉴욕으로 이주했다. Burrell은 수개월 만에 밴드 리더로서 Blue Note의 첫 번째 앨범을 녹음했으며, 그와 플래나건은 둘 다 스튜디오 뮤지션과 사이드맨으로서 가수 Tony Bennett , Lena Horne과 함께 공연했고 Billie Holiday, Jimmy Smith, Gene Ammons, Kenny Dorham과도 함께 공연했다. Burrell은 1957년부터 1959 년까지 Benny Goodman 의 밴드에서 Charlie Christian 의 전 의자를 차지했습니다. Burrell이 뉴욕에서 데뷔한 이래로 Burrell은 다재다능한 녹음 경력을 지녔으며 비평가는 1957년 John Coltrane 과 The Cats, 1963년 Stanley Turrentine과 Midnight Blue , 1965 년 Gil Evans 와 함께 기타 양식을 특별 하이라이트로 인용했다. 1978년 UCLA 에서 Duke Ellington의 삶과 업적을 조사한 Ellingtonia라는 강좌를 시작했다. 비록 두 사람이 직접 협력하지는 않았지만 Ellington은 Burrell을 그의 "좋아하는 기타리스트"라고 불렀고, Burrell은 Ellington의 작품에 대한 많은 찬사와 해석을 녹음했다. 1996년부터 Burrell은 UCLA에서 재즈 연구 책임자로 재직하여 Gretchen Parlato 및 Kamasi Washington 과 같은 유명 동창들을 멘토링했다.
상
Burrell은 일본과 영국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도 여러 가지 재즈 여론 조사에서 우승했다. Burrell은 1998 년 Grammy Award - Dee Dee Bridgewater의 Dear Ella 앨범에 작곡, 편곡 및 공연했으며 2004 년 Down Jazz의 Jazz Educator of the Year 상을 받았으며 2005 NEA Jazz Master 로 선정되었다.
7.
쳇 베이커
본명은 체스니 헨리 베이커 주니어 (Chesney Henry Baker, Jr.). 1929.12.23 ~ 1988.5.13.
미국의 재즈 트럼펫 주자 겸 가수. 느슨하고 낭만적이면서 뭔가 심히 울적한 느낌의 트럼펫 연주와 노래, 그리고 엄청난 막장 인생 역정으로 유명하다.
웨스트 코스트 재즈의 개척자이자 쿨 재즈의 대문을 연 전설적인 음악가
천상의 노래를 연주한 악마
1. 생애
1.1. 출생과 유년기
오클라호마 주의 예일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 체스니 베이커는 밴조와 기타를 연주하는 프로 뮤지션이었지만 세계 대공황으로 인해 음악을 포기하고 이런저런 잡일을 하며 간신히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체스니는 평생 음악인들에게 열폭했고, 종종 그 분노를 쳇과 아내 베라에게 폭력과 욕설을 가하는 식으로 풀었다.
1940년에 체스니가 로스앤젤레스 근교의 글렌데일에 있던 록히드의 부품 검사원으로 취직하면서 가족 모두가 그 곳으로 이주했고, 베라도 오클라호마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백화점에서 일하며 맞벌이 부부로 생활했다. 쳇은 당시 학교 성적이 우수해서 월반까지 했을 정도였지만, 또래 아이들보다 체구도 작고 훨씬 어려 보이는 외모 탓에 이를 극복하기 위해 온갖 스포츠에 몰두했다.
스포츠 외에도 쳇은 변성기가 지나지 않아 아직 상당히 앳되고 서투르기는 했지만, 당시 유행한 대중가요를 몇 번 듣고 따라부를 정도로 음악 쪽에서도 나름대로 재능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러자 체스니는 아들에게 트롬본을 사주었는데, 다만 아직 쳇의 체구는 저 악기를 감당할 만큼 크지 않았기 때문에 곧 트럼펫으로 바꿔왔다.
하지만 쳇은 트럼펫을 그냥 독학으로만 익혔기 때문에 아직 실력은 변변찮은 수준이었고, 설상가상으로 길거리에서 놀다가 누군가가 던진 돌에 앞니 하나가 부러지는 바람에 이것도 핸디캡이 되었다. 글렌데일 중학교 시절에는 트럼펫 기초 연주 과정에 등록해서 계속 음악을 익혔는데, 이론 공부에는 영 흥미가 없었고 악보 보는 법도 몰랐다고 한다.
그럼에도 무슨 음악이든 라디오나 음반으로 몇 번 듣고 나면 곧바로 따서 연주할 수 있을 정도로 재능은 충분했고, 당시 빅 밴드를 이끌며 미남형 외모로 영화에도 출연하며 인기를 끌던 트럼페터 해리 제임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하지만 이내 사춘기가 찾아오자 쳇은 어머니 베라의 과보호와 아들에 대한 욕심에 반발하며 학업을 멀리하기 시작했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벌거나 자동차 휘발유를 몰래 빼내 팔아먹기도 했다. 심지어 아직 운전면허를 딸 수 있는 나이가 아님에도 아버지의 차로 위험천만한 질주를 할 정도로 운전에도 상당한 흥미와 소질을 보여주었다.
1.2. 군 복무와 뉴비 시절
쳇은 뭔가 많이 억눌려 있던 집안 분위기를 벗어나고 싶었는지 1946년에 미군 육군에 자원 입대했고, 주독미군(제7군)에 배치되어 서베를린에서 군 생활을 했다. 원래 보직은 행정병이었지만, 이내 무미건조한 업무에 싫증을 내고 군 빅 밴드의 트럼페터 오디션을 보고 합격해 음악병으로 보직을 변경했다. 이 기간 동안에는 복잡한 편곡으로 유명했던 빅 밴드 리더 스탄 켄튼과 비밥의 선구자로 온갖 찬사와 논란을 불러일으킨 디지 길레스피의 연주를 단파방송으로 듣고 상당히 강한 인상을 받았다.
하지만 1948년에 맹장염에 걸려 수술을 받은 뒤 의병 제대해야 했고, 쳇은 고향으로 돌아와 리돈도 유니언 고등학교에 입학해 학업을 계속 했다. 고교 시절에도 쳇은 학교 밴드에서 계속 연주 활동을 벌였고, 이어 2년제 대학이었던 엘 카미노 주니어 칼리지에서도 응원단 밴드에 들어갔다. 그럼에도 여전히 이론 공부나 독보법, 화성학 등을 익히는 것에는 무관심했고, 여전히 귀로 듣고 따서 연주하는 식이었다.
밴드 활동 외에는 글렌데일 인근의 컬버에 살고 있던 재즈 피아니스트 지미 라울스에게 새로운 곡을 듣고 익히는 개인 교습도 받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라울스의 친구 음악인들과 잼 세션까지 벌이게 되었다. 그리고 1949년에 마일스 데이비스가 동부에서 노넷(9중주단)을 이끌고 녹음한 '쿨의 탄생(Birth of the Cool)' 을 듣고 비밥과는 다른 쿨 재즈라는 영역에 눈뜨게 되었고, 결국 자신에게 별로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한 학업을 포기하고 밴드에 취직하거나 이곳저곳에서 잼 세션을 하면서 계속 음악에 몰입했다.
쳇은 결국 자신의 이러한 모습을 탐탁치않게 생각하던 집에서 나와 친구들과 셋방살이를 하며 잼 세션을 계속 했다. 대학 시절부터 손대기 시작한 대마초도 거의 골초 수준으로 피워댔고, 이런저런 여성들과 검열삭제도 하는 등 이후 그의 이력에 계속 오점으로 남게 되는 방탕한 행각도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949년 말에 경찰의 검문에서 차에 숨겨둔 대마초가 발각되자 재판에서 징벌성 재징집을 당했고, 샌프란시스코의 군 밴드에서 음악병으로 근무하면서 사귀기 시작한 샬레인 수더와 첫 결혼을 했다. 하지만 충동적으로 저지르다시피 한 이 결혼 생활은 별로 유쾌하지 못했고, 쳇 자신도 밴드 행정관이 기습적으로 행한 악보 초견 시험에서 불합격하자 다른 부대로 징계성 전출 조치를 받았다. 결국 군 생활에 질린 쳇은 정신 감정에서 군 복무 부적격자 진단을 받고 다시 의병 제대했다.
제대 후에도 쳇은 계속 이런저런 밴드와 클럽을 전전하며 공연과 잼 세션에 참가했는데, 1952년 5월 말 로스앤젤레스에 온 비밥의 대명사였던 알토색소포니스트 찰리 파커와 협연할 귀중한 기회를 얻었다. 비록 파커의 연주력 때문에 쳇은 공기가 되었지만, 덕분에 비밥의 레전설과 협연한 촉망받는 신인 트럼페터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1.3. 제리 멀리건의 쿼텟에서
1951년에 원래 뉴욕에서 활동하던 바리톤색소포니스트이자 작/편곡자였고, 마일스 데이비스와 '쿨의 탄생' 을 녹음했던 제리 멀리건이 미국 서부로 활동지를 옮겼다. 다소 예민하고 신경질적이었던 멀리건은 그 당시 이미 쳇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재즈신에서 나름대로 입지를 확실히 다지고 있던 뮤지션이었지만, 대마초와 헤로인에 너무 빠진 나머지 빈털터리가 되자 이런 막장 생활은 안되겠다 싶어서 약쟁이 생활을 청산하고자 이주해온 것이었다.
멀리건은 로스앤젤레스의 소규모 클럽인 헤이그에 자리를 잡고 새 밴드를 만들기 위해 서부의 역량 있는 뮤지션들을 섭외하고 있었는데, 뉴욕 시절에 시도했던 색소폰, 트럼펫, 베이스, 드럼 만으로 꾸려지는 쿼텟(4중주단)을 만드려고 했다. 쳇도 자신의 친구인 베이시스트 밥 위틀락의 주선으로 멀리건을 만나러 갔지만, 첫 만남은 의외로 좋지 않아 서로 욕설을 주고받는 것으로 끝났다.
하지만 이후 쳇이 파커와 협연하면서 떠오르는 샛별이 되고, 쳇 자신도 파커류의 비밥이 뿜어내는 엄청난 열기와 속도를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자 다시 멀리건과 접촉했다. 멀리건도 생각을 고쳐먹고 쳇을 공식 영입했고, 여기에 드러머 치코 해밀턴과 베이시스트 카슨 스미스가 더해져 피아노가 빠진 피아노리스 쿼텟이 만들어졌다.
멀리건의 새 쿼텟은 1952년 9월 초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초청 공연을 가졌는데, 이 때 멀리건보다 먼저 서부 재즈의 쿨 열풍을 불러일으킨 데이브 브루벡 쿼텟이 소속되어 있던 판타지 레코드에서 음반 취입 제의를 받아 첫 녹음을 제작했다. 이 때 녹음된 네 곡 중 리처드 로저스의 뮤지컬 'Babes in Arms' 에 삽입된 노래 My Funny Valentine은 이후 쳇의 아이콘 격으로 자주 공연되는 곡이 되었다.
이 앨범이 인기를 얻으면서 멀리건의 쿼텟은 브루벡에 버금가는 서부 재즈의 유명 악단이 되었고, 경쟁적이고 전투적으로 격렬한 솔로를 주고받던 동부의 비밥과는 대조적으로 차분하면서도 정돈된 분위기를 유지하면서 리즈시절을 영위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겉보기에 쿨하고 차분해 보이던 이들의 연주 활동 한켠에는 여전히 대마초를 비롯한 마약이 자리하고 있었고, 쳇도 1952년 12월에 차에서 위틀락과 대마초를 피우다 걸려서 체포된 뒤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풀려나기도 했다.
멀리건도 약쟁이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자각은 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헤로인에 본능적으로 손을 대던 버릇을 그만두지 못해 연주 활동 이외의 시간에는 다시 약쟁이로 돌아가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금단 현상과 원래 갖고 있던 결벽증적인 성격 때문에 베이시스트와 드러머는 해고와 영입이 반복되었고, 급기야 음악적으로는 찰떡궁합으로 보이던 쳇과의 관계도 날이 갈 수록 소원해지고 있었다.
결국 멀리건은 '나는 편곡 작업까지 하느라 바쁜데, 쳇은 그냥 그거 받아서 연주하는 수준인데도 나보다 더 인기가 많다' 는 식으로 열폭했고, 쳇도 이에 맞서 '멀리건은 나를 비롯한 멤버들을 하인 취급하듯이 깔아내린다' 고 디스했다. 설상가상으로 1953년 4월에 마약 근절을 목표로 무자비한 수사를 벌이고 있던 로스앤젤레스 경찰의 마약 담당관 존 오그레이디가 쳇과 멀리건이 헤이그에서 연주하는 동안 이들의 집을 급습했고, 가택 수색에서 대마초가 발견되자 쳇 부부와 멀리건 부부를 즉시 체포하면서 로스앤젤레스 언론에 구제불능 약쟁이로 소개되는 굴욕을 당했다.
1.4. 솔로 활동과 리즈시절
그나마 멀리건이 대마초가 모두 자기 것이라고 죄를 뒤집어쓰면서 쳇은 풀려날 수 있었지만, 덕분에 멀리건 쿼텟은 리더가 1953년 9월에 징역 6개월을 선고받으면서 붕 뜬 꼴이 되었다. 이렇게 되자 판타지 레코드의 프로듀서 딕 복은 수감된 멀리건 대신 여전히 인기가 있던 쳇에게 새로운 쿼텟을 결성해 음반 작업을 할 수 있겠냐고 떠보기 시작했다. 쳇은 처음에는 너무 부담스럽다며 주저했지만, 이내 그 동안 자신과 친해진 피아니스트 러스 프리먼과 함께 그 제의를 받아들여 쿼텟을 만들고 리더로서 첫 음반 녹음과 클럽 공연을 시작했다.
쳇의 쿼텟이 취입한 녹음은 멀리건이 콩밥을 먹고 있을 즈음이었던 그 해 가을에 LP로 발매되었고, 다운비트를 비롯한 유력 재즈 잡지들이 호평을 하면서 쳇도 루이 암스트롱, 디지 길레스피와 마일스 데이비스를 비롯한 본좌 재즈 트럼페터의 대열에 들기 시작했다. 이 앨범의 성공으로 쳇은 잭 몬트로스가 편곡한 곡들을 셉텟(7중주단) 체제로 녹음한 후속작 'Chet Baker Ensemble' 을 추가 취입했고, 이어 메이저 음반사인 콜럼비아의 힘을 빌어 당시 유행한 스트링 앙상블을 대동한 발라드 위주로 제작한 앨범인 'Chet Baker & Strings' 가 뜻하지 않게 대박을 치는 등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하지만 3개월의 형기를 채운 뒤 가석방된 멀리건과 쳇 사이의 거리감과 시기심은 예전보다 더 심해져 있었고, 결국 이들은 결별하게 되었다. 멀리건은 다시 뉴욕으로 돌아갔고, 쳇은 루이 암스트롱의 매니저이기도 했던 공연 프로모터 조 글레이저의 기획으로 1954년 3월에 전미 순회공연까지 진행했다.
그 직전이었던 1954년 초에는 처음으로 트럼페터가 아닌 보컬리스트로 취입한 'Chet Baker sings' 가 퍼시픽 재즈 레코드에서 출반되었는데, 다소 어눌한 오클라호마 사투리 억양과 느슨하면서 '남성적이지 못한' 앳된 목소리가 호불호를 심하게 갈라놓았다. 하지만 스트링 앙상블과 협연한 앨범처럼 커버에 인쇄된 쳇 자신의 얼굴빨 덕분에 여성들에게 상당히 많이 팔렸고, 일개 마이너 음반사에 두둑한 매상을 안겨줬다.
순회공연으로 재미를 본 글레이저는 1954년 5월에 뉴욕의 유명 재즈 클럽인 버드랜드에서 쳇의 밴드를 마일스 데이비스 밴드와 공동 출연시켜 각각 2부와 1부 공연을 맡도록 했다. 하지만 서부 재즈,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 '백인 젖뉴비가 이쁘장하게만 연주하는 유약한 재즈' 를 거부하던 흑인 재즈 뮤지션들과 친 비밥 성향의 비평가들은 마일스 밴드의 연주를 높이 평가하고 쳇 밴드의 연주는 혹평하는 등 상당히 냉랭한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이미 그 이전부터 흑인 재즈맨 대부분이 자신의 연주를 달갑잖게 생각한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것을 확실히 인식시켜준 이 공연 덕에 쳇은 이후 평생 동안 아버지 체스니가 가졌던 것과 비슷하게 흑인 재즈에 대해 일종의 열등감을 갖게 되었다. 또 아이러니하게 이 시기에 자신의 성공에 중요한 밑밥을 깔아준 찰리 파커가 쳇에게 마약 살 돈을 빌리러 오는 등 약과 관련된 유혹도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이렇게 쳇이 인기를 누리게 되면서 역으로 첫 아내 샬레인과의 부부관계는 나날이 악화되고 있었다. 샬레인은 남편이 잘해주지도 않는데다 순회 공연마다 여성 팬들에게 둘러싸였던 쳇을 정말 싫어하여 일부러 쳇의 친구들과 검열삭제를 했고 그것을 알게된 남편과 심하게 다투고 만다. 그러다 쳇이 뉴욕에서 프랑스 여성 릴리앵 퀴키에와 동거하며 염문을 뿌리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폭발하여 쳇이 호신용으로 준 권총을 들고 버드랜드로 찾아가 릴리앙을 쏴죽이겠다고 위협하는 지경까지 갔다. 결국 2년 뒤 쳇과 샬레인은 이혼하고 말았다.
하지만 쳇은 동거하던 릴리앙과도 그리 좋은 관계는 아니었고, 밴드를 이끌면서 금전 문제도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아 멤버들에게 연주료를 제 때 지급받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결국 러스 프리먼이 쳇 대신 재정 문제를 스스로 책임져야 했는데, 1954년 10월에 쳇이 다른 멤버들의 연주료를 삥땅쳐 자가용을 구입한 것이 발각되자 프리먼은 결국 빡쳐서 탈퇴하고 말았다.
퍼시픽 재즈 레코드는 쳇의 금전 감각이나 밴드 리더로서의 역량, 사생활 같은 골치아픈 문제는 일단 접어두고 계속 쳇을 여성팬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뮤지션으로 만드려고 했다. 1955년에는 스트링 앙상블 협연 앨범과 보컬 앨범의 컨셉을 몽땅 뒤섞은 'Chet Baker Sings and Plays'가 출반되었다. 여전히 재즈 비평가들은 쳇의 앨범을 혹평했지만, 대중적인 인기는 여전히 하늘을 찌르고 있었고 심지어 '지옥의 수평선' 이라는 B급 영화에서 영화배우로 데뷔하기까지 했다.
이렇게 높아가는 인기와 별개로, 쳇의 밴드에는 구제불능의 약쟁이들이 계속 영입되었다. 드러머 피터 리트먼은 아직 10대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이미 수 차례 약물 중독으로 입원한 경력이 있던 문제아였고, 피아니스트 딕 트워드직은 천재적인 재능에도 불구하고 심한 헤로인 중독에 빠져 있었다. 퍼커셔니스트이자 엔지니어 빌 러프버러는 쿠키에 대마초를 넣어 구워낼 정도로 심각한 대마초 중독자였다.
1955년 9월에는 처음으로 유럽 순회공연을 했는데, 유럽의 청중들은 쳇의 트럼펫 연주는 호평했지만 그의 보컬 실력에 대해서는 미국과 마찬가지로 영 좋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이 공연 중에 전위적인 음악을 좋아하던 트워드직이 동료이자 마찬가지로 전위적인 작곡가 밥 지프의 곡을 가져왔고, 쳇은 이 곡들을 프랑스의 마이너 음반사 바클레이에 녹음해 자신의 디스코그래피에서 보기 드물게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곡을 연주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하지만 미국보다 비교적 마약에 관대했던 유럽, 특히 네덜란드와 프랑스의 풍토 덕에 베이시스트 지미 본드를 제외한 모든 밴드 멤버들이 그야말로 약에 취해 공연장과 클럽을 전전하는 등, 전체적인 일정은 완전히 개판이었다. 그 와중에 트워드직이 순회 공연 중이던 10월 21일에 묵고 있던 호텔에서 마약 중독으로 숨진 채 발견되었고, 쳇을 제외한 모든 멤버들은 충격에 빠진 채 공연을 중단하고 미국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결국 쳇은 혼자 유럽에 남아 이런저런 연주자들로 벼락치기 밴드를 만들어 남은 일정을 소화했다. 하지만 급하게 긁어모은 연주자들의 수준이 들쑥날쑥해 합주력은 시망이었고, 쳇도 트워드직의 죽음으로 인한 멘탈붕괴 때문에 솔로에서 갈피를 못잡거나 심한 삑사리를 내는 등 망가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 때문에 이어진 공연들도 대부분 혹평을 받거나 얼마 안되는 청중만이 오는 등 안습 속에 치러졌고, 쳇 자신도 공연 보다는 마약을 구하는 것이 중요한 일상사가 되어 있었다.
1.5. 몰락의 시작
1956년 4월에 쳇은 릴리앙과도 결별하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디트로이트에서 만난 헬레마 앨리와 두 번째 결혼식을 올려 그녀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얻는다. 하지만 이제 쳇의 인기에서 중요한 기반이 되었던 서부 재즈는 상업적인 가치가 많이 떨어진 상태였다. 쳇의 최대 라이벌이었던 마일스 데이비스는 메이저 음반사 콜럼비아와 전속 계약을 체결했고, 동시에 프레스티지에 자신의 하드밥 시기 최대 걸작으로 일컬어지는 '~in' 시리즈 네 장을 연속 취입하면서 쳇을 듣보잡으로 만들 만큼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아직 쳇과 전속 계약을 맺고 있었던 퍼시픽 재즈는 쳇에게 좀 더 '뜨겁고 격렬한' 음악을 녹음할 것을 주문했고, 쳇은 곧 그 해 7월에 'Chet Baker & Crew' 라는 앨범으로 이 주문에 답했다. 덕분에 쳇은 그 동안의 유약하고 섬세한 이미지를 일신시켜 다시 재즈 비평가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하지만 여전히 자신을 비롯해 많은 밴드 멤버들이 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결국 약을 안하고 버티고 있던 지미 본드, 대마초빠이기는 했지만 다른 약은 안하고 있던 빌 러프보로가 이런 막장 분위기를 못이겨 밴드에서 탈퇴했다. 그 해 가을에는 쳇과 마찬가지로 약쟁이였다가 수감된 뒤 약을 끊고 있었던 알토색소포니스트 아트 페퍼와 협연한 'Playboys', 여전히 복잡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러스 프리먼과 협연한 'Quartet: Russ Freeman and Chet Baker' 를 취입했다.
1957년 2월에는 플레이보이즈 올스타 재즈 어워드에서 재즈 트럼펫 부문 2위에 올랐고, 수상 기념으로 쟁쟁한 선배 뮤지션들과 4개월 일정의 대규모 순회 공연을 진행하게 되었다. 하지만 공연을 시작한 지 불과 1주일 뒤 필라델피아에서 대마초가 발각되는 바람에 밴드 멤버였던 테너색소포니스트 필 어소와 함께 체포되었다. 쳇과 어소는 프로모터였던 조 글레이저가 보석금을 내줘서 풀려나기는 했지만, 결국 남은 일정 동안 쳇의 밴드는 공연 기회를 모두 박탈당했다.
쳇은 약쟁이가 아니라는 이유로 무시당하다가 빡쳐서 나가버린 드러머 앨버트 히스 대신 마일스 데이비스의 퍼스트 퀸텟에서 드러머로 활동했던 필리 조 존스를 영입했는데, 필리 역시 엄청난 약쟁이였고 쳇과 함께 틈만 나면 약을 해댔다. 하지만 필리가 자기 돈을 떼먹으면서 몰래 약을 산다는 것을 알아채고는 바로 해고했고, 이후 드러머 없이 공연을 해야 하는 개막장 상태가 되었다.
결국 이런 불안정한 공연 일정도 여름에 끝났는데, 할리우드의 재즈 클럽 피콕 레인에서 연주하던 중 몇 년 전 멀리건에게 콩밥을 먹이는 데 일조한 약쟁이 사냥꾼 오그레이디와 맞닥뜨리면서 도망치듯 로스앤젤레스를 떠나 샌프란시스코로 가야 했다. 여기서 다시 뉴욕으로 가 일거리를 찾았지만, 이미 뉴욕은 쳇을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게다가 얼마 안되는 돈도 모두 마약 사는 데 탕진했고, 같이 데려온 헬레마가 이런 모습을 견디지 못해 아들 체스니 아프타브와 함께 디트로이트의 친정 집으로 가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었다.
쳇은 하는 수 없이 뉴욕 주변의 고만고만한 클럽에서 가끔 들어오는 연주 제의를 소화하며 근근이 활동하고 있었는데, 그 와중에 퍼시픽 재즈에서 옛 동료 멀리건과 재결합을 하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돈이 급했던 쳇은 이 제안도 받아들였지만, 이미 서로를 불신하고 있던 상황에서 제대로 된 결과물이 나오기는 힘들었다. 이어 버브 레코드에서도 소속 아티스트인 테너색소포니스트 스탄 게츠와 듀엣 앨범을 제안했는데, 쳇은 이것도 수락했지만 남은 것은 결국 자신 뿐 아니라 게츠의 이력에도 흑역사로 남을 졸작 뿐이었다.
이렇게 삐걱대던 음악 활동 외에도 검문에서 헤로인이 걸리는 등 이곳저곳에서 위기가 닥쳐왔고, 재판을 피하려고 마약 중독 치료를 신청해 가까스로 징역살이는 면했다. 여전히 마약 살 돈이 필요했던 쳇은 리버사이드 레코드에서 제안한 계약을 받아들였고, 쳇은 여기서 보컬 앨범인 'Chet Baker Sings-It Could Happen to You' 와 'Chet Baker in New York', 보컬리스트 자니 페이스와 협연한 'Chet Baker Introduces Johnny Pace' 를 연이어 발표했다. 하지만 평단의 반응은 여전히 차가웠고, 매상도 별로 좋지 않았다.
그나마 리버사이드에서 1958년 연말에 네 번째로 취입한 'Chet' 은 음악적으로는 비교적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그렇다고 전성기인 1950년대 중반 만큼의 판매량 달성에 성공한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쳇은 여느 약쟁이 뮤지션들과 마찬가지로 약값을 벌기 위해 음반사에 끊임없이 선불 개런티를 요구해 음반사들과 심한 갈등을 빚는다. 심지어 음반사 창고를 털어 음반을 훔쳐가 팔거나 수표를 위조하는 등의 범죄 행위까지 서슴치 않아 음반사의 신고로 출동한 경찰에 체포되기까지 한다.
결국 1959년 3월에 쳇은 마약 거래 현장을 급습한 경찰에 의해 또 체포되었고, 마침내 1953년에 멀리건이 그랬던 것처럼 징역 6개월을 선고받고 뉴욕의 악명 높은 교도소인 라이커스 아일랜드에 수감되었다. 이후 형기를 두 달 남겨두고 가석방되었고, 리버사이드와 맺은 계약을 끝내기 위해 'Chet Baker Plays the Best of Lerner & Loewe' 라는 앨범을 하나 더 내놓았다.
1.6. 유럽 활동기
미국 활동에 염증을 느낀 쳇은 헬레마와 아들을 데리고 1959년 여름에 이탈리아와 벨기에를 중심으로 공연을 시작했다. 유럽 관객들은 미국보다 쳇을 더 환대하기는 했지만, 쳇은 여기서 연주력도 좀 떨어지고 말도 잘 안통하는 유럽의 뉴비 연주자들과 협연해야 했고 마약 금단 증상에 시달리며 자주 삐걱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런 쳇에게 벨기에 공연 때 만난 플루티스트이자 알토 색소포니스트 자크 펠저가 접근했다. 펠저는 부업으로 약사 일도 하고 있어서 마약류 의약품 유통의 맹점을 잘 알고 있었고, 헤로인과 유사한 효과가 있는 마약성 진통제인 팔피움을 쳇에게 권했다. 팔피움은 그 당시 막 중독성이 문제가 되어 유럽 각국에서 판매가 엄격히 제한되어 있었지만, 그나마 서독의 경우 아직 별다른 제한 없이 구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 곳을 통해 계속 들여올 수 있었다.
약기운이 다시 돌자, 쳇은 유럽 무대 복귀 후 첫 앨범인 'Chet Baker in Milan' 을 재즈랜드라는 마이너 음반사에 취입했다. 이어 과거 스트링 앙상블과 협연한 발라드 앨범의 계보를 잇는 'Chet Baker and Fifty Italian Strings' 를 발표했고, 이 앨범은 유럽 비평계에서 호평을 받았지만 미국에서는 정반대로 무시당하거나 매우 짠 점수를 받았다.
유럽 청중들의 반응이 좀 더 호의적이었다고는 해도, 아직 재즈가 활성화되지 않았던 이탈리아에서 공연 일정을 잡기는 쉽지 않았다. 이 때문에 쳇은 옛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의 4남인 피아니스트 로마노 무솔리니와 협연하는 가십성 공연까지 치러야 할 정도였다. 게다가 팔피움이 떨어지면서 쳇은 계속 약을 갈구했고, 파리에 머물고 있던 아내 헬레마에게 서독에서 팔피움을 계속 구해달라고 했다.
결국 보다 못한 헬레마는 1959년 12월에 쳇을 밀라노의 병원에 입원시켜 마약 중독 치료를 받게 했고, 이듬해 1월 말에 건강을 회복하자 퇴원해 연주 활동을 재개했다. 하지만 쳇은 밀라노의 어느 극장에서 무용수로 일하고 있던 영국 출신의 캐럴 잭슨이라는 여성과 눈이 맞아 바람을 피우기 시작했고, 손을 놓았나 싶었던 약도 다시 시작했다. 헬레마는 쳇과 캐럴의 밀회를 담은 파파라치들의 사진이 황색신문에 게재되는 꼴을 보다 못해 이사를 가버렸고, 쳇은 진료 경험이 일천한 개업의들을 찾아다니며 꾀병을 부리고 팔피움을 구할 수 있는 특수 처방전을 모으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탈리아에서도 오그레이디와 마찬가지로 약쟁이를 잡아들이는 데 몰두하던 파비오 로미티라는 검사가 쳇의 동태를 면밀하게 관찰하고 있었고, 요 근래 팔피움 처방이 부쩍 늘어난 병원을 찾아다니며 조사를 시작했다. 결국 이 과정에서 덜미가 잡힌 쳇은 1960년 8월 말 벨기에 연주를 마치고 돌아온 직후 체포되었고, 이어 아내 헬레마와 독일에서 약을 구해다 준 미국 출신 드러머, 처방전에 이름을 도용당한 변호사, 쳇에게 팔피움을 가장 많이 처방한 의사 세 명, 펜션 관리인 등이 줄줄이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법정에서 쳇은 횡설수설하며 자신은 억울하다고 혐의를 부인했고, 최대한 자신을 순진하고 불쌍하게 보이려고 온갖 연기를 했다. 덕분에 쳇을 동정하는 여론이 확산되었고, 판사들은 의사들 중 쳇에게 뇌물을 받은 혐의로 기소된 로베르토 베첼리와 쳇을 제외한 피고인들에게 증거 불충분 등을 들어 무죄를 선고했다. 베첼리는 징역 3년과 벌금, 의사 면허 취소 판결을 받았지만 항소심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풀려났고, 쳇도 징역 1년 7개월과 벌금을 선고받았지만 이전에 뉴욕에서 그랬던 것처럼 감형을 받고 1961년 12월 중순에 풀려났다.
이렇게 그럭저럭 덜한 처벌을 받고 석방되기는 했지만, 이 과정에서 쳇과 캐럴의 관계가 돌이킬 수 없음이 드러나자 헬레마도 폭발하여 첵과 이혼하여 아들을 데리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간 뒤 평생 쳇을 다시 만나지 않았다. 쳇은 이에 개의치 않고 캐럴과 동거하며 연주 활동을 재개했고, 동시에 수감 중 작곡한 멜로디 네 곡을 가지고 엔니오 모리코네와 피노 마페이에게 각각 편곡/지휘와 작사를 의뢰해 RCA 이탈리아 지사에서 녹음했다.
하지만 이 녹음들은 일단 발매가 보류되었고, 이후 따로 결성한 섹스텟(6중주단)과 1962년 1월에 로마에서 녹음한 것이 'Chet is Back!' 이라는 타이틀의 복귀 앨범으로 나왔다.[1] 이 앨범에서는 수감 생활로 어쩔 수 없이 약을 끊고 건강을 회복한 덕인지 어느 정도 활력이 담긴 연주를 선보였지만, 이내 그의 화려한 경력 때문에 그의 팬을 자처한 약쟁이들이 약을 권해오면서(...) 또 약과 함께 하는 인생이 시작되었다.
6월에 쳇은 서독 뮌헨에서 공연 의뢰를 받았는데, 공연은 성공적으로 끝났지만 그 직후 팔피움을 구하려고 처방전을 위조해 약국에 갔다가 또 덜미를 잡혔다. 어느 의사의 도움으로 재판 전까지는 병원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었지만, 재판 결과 국외 추방령이 내려지면서 스위스로 쫓겨나고 말았다. 하지만 스위스에서도 마찬가지로 처방전을 위조해 팔피움을 구하려다가 또 체포되었고(...), 스위스 정부도 서독과 마찬가지로 쳇에게 추방령을 내렸다.
쳇은 이탈리아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이미 서독과 스위스에서 저지른 진상짓이 알려진 이상 이탈리아 정부도 그를 받아줄 수는 없었다. 결국 쳇은 캐럴을 시켜 이탈리아의 지인들에게 돈을 꿔오게 한 뒤 캐럴의 고향인 영국으로 갔다. 영국에서 쳇과 캐럴은 이후 적장자가 될 아들 딘을 보았지만, 여기서도 쳇은 계속 약을 하고 있었고 외국 연주자들에게 빡빡한 규정 때문에 공연 일을 잡기가 힘들었다.
이렇게 되자 쳇은 자신의 마약 남용 역정을 솔직하게 털어놓겠다며 어느 가십 잡지에 장문의 구술 회고록을 돈을 받고 팔았고, 자기 변명과 미화, 허세로 가득한 이 회고록이 든 잡지는 날개돋힌 듯 팔렸다. 원하던 돈을 받은 쳇은 또 약을 구하러 돌아다녔고, 결국 여기서도 또 체포되어 1963년 2월 중순에 추방령을 선고받았다.
불과 8개월 동안 무려 네 개 국가에서 추방당한 쳇은 마지막으로 프랑스를 택했는데, 프랑스에서는 쳇의 음악을 별로 반기지 않았던 탓에 억지로 비밥 레퍼토리를 골라 연주해야 했다. 그럼에도 쳇의 퇴폐적으로 변한 분위기를 즐기러 오는 이들은 여전히 있었고, 또 그를 상대로 약을 팔러 접근하는 마약상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쳇은 프랑스에서도 마찬가지로 처방전을 위조해 대량의 팔피움을 구하려고 했고, 분단 상황에서 아직 연방법의 효력이 완전히 미치지 못하고 있던 서베를린으로 가서 똑같은 짓을 했다가 또 걸려서 체포되었다. 결국 프랑스 정부도 쳇에게 추방령을 내렸고, 서독 법원은 아예 구체적으로 쳇을 고국인 미국으로 추방한다는 판결을 내리면서 유럽 활동에도 강제로 종지부가 찍혔다.
1.7. 귀국 후
1964년 3월에 억지로 미국에 돌아온 쳇은 유럽에서 벌인 화려한 진상짓 때문에 음악인으로서는 물론이고, 존재 자체도 여전히 쓰레기 혹은 골칫덩이로 여겨지고 있었다. 뉴욕 시청은 쳇이 그 동안 벌인 범죄 행각에 이골이 났는지, 클럽 공연에 반드시 필요한 연주자 증명서의 발급을 거부했다. 게다가 약쟁이 소탕에 여념이 없던 경찰과 검찰은 어떻게든 쳇을 또 잡아넣으려고 내사에 착수했다.
결국 이런 상황에서 쳇은 연주 보다 약을 구하러 시간을 허비하는 경우가 많았고, 자신과 비슷한 약쟁이면서 골수암으로 죽어가던 태드 다메론의 집에서 얹혀살며 같이 헤로인을 했다. 하지만 다메론은 쳇에게 음반 활동이라도 재개해 보라면서 시카고 출신의 프로모터 리처드 카펜터를 소개해 줬다.
하지만 카펜터는 한물 갔거나 세상 물정에 어두운 흑인 뮤지션들에게 교묘한 위장 계약서를 내밀어 개런티와 저작권을 뜯어가는 것으로 악명 높은 인물이었다.[2] 카펜터는 일단 쳇을 환대하고 숙소와 식비, 심지어 마약 살 돈까지 지원해줬다. 하지만 쳇도 카펜터에게 걸려든 다른 뮤지션들과 마찬가지로 헐값에 자신의 개런티와 저작권을 넘겨주는 치명적인 실수를 범했고, 이 실수를 깨달은 것은 한참 뒤에 가서였다.
어쨌든 쳇은 콜픽스 레코드라는 소규모 음반사에서 'Chet Baker-The Most Important Jazz Album of 1964/65' 라는 허세 쩌는 타이틀의 복귀 앨범을 냈지만, 이 앨범은 나오자마자 당시의 조류인 프리 재즈나 보사노바 등과 비교당하며 구닥다리 취급을 받았다. 그러자 카펜터는 쳇에게 실험적인 음악을 해보라며 머큐리 레코드 산하의 재즈 레이블 라임라이트에 'Baby Breeze' 를 취입하게 했는데, 이 앨범에서 쳇은 마일스 데이비스나 빌 에반스 등이 선보인 선법 기반의 모달 재즈와 존 콜트레인류의 프리 재즈 성향으로 쓰여진 최신 성향의 곡들을 골랐다.
그나마 저 앨범은 예술적인 성과를 어느 정도 인정받았지만, 판매량이 시망인 것은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카펜터는 쳇에게 다시 상업성을 고려한 빌리 홀리데이 트리뷰트 앨범 'Baker's Holiday'를 내도록 했다. 하지만 이 앨범 역시 저조한 판매량을 기록했고, 쳇은 그나마 연주자 증명서 없이도 연주할 수 있는 클럽을 찾아다니며 미국 이곳 저곳을 전전했다. 비록 이 와중에 헬레마와 법적인 부부 관계도 청산하고 캐럴과 세 번째 결혼을 하기는 했지만, 쳇은 자기 자식들에게 별 관심이 없었고 여전히 쩔어주는 약쟁이로 마약상을 더 자주 만나는 막장 모드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순회 공연도 별 성과가 없게 되자, 카펜터는 물량빨로 이를 만회하기 위해 마일스 데이비스의 퍼스트 퀸텟이 프레스티지에서 계약 만료를 위해 단 이틀 동안 네 장 분량의 녹음을 해치운 '~in' 시리즈를 모방한 기획을 내놓았다. 1965년 8월에 쳇은 뉴욕의 한 스튜디오에서 작/편곡자로 고용된 지미 먼디와 세션 연주자들인 테너색소포니스트 조지 콜먼, 피아니스트 커크 라이트시, 베이시스트 허먼 라이트, 드러머 로이 브룩스를 대동하고 나흘 동안 LP 다섯 장 분량의 녹음을 했고, 이 녹음들은 이후 마일스 퀸텟의 '~in' 시리즈를 내놓았던 프레스티지에서 Smokin', Groovin', Boppin', Cool Burnin', Comin' on이라는 타이틀로 한꺼번에 출반되었다.
이 앨범들에서 쳇은 비밥 스타일의 빠르고 화려한 연주와 원래 장기였던 감성적인 발라드 연주를 동시에 선보였지만, 노골적으로 마일스를 따라한 것이 되레 비평가들로부터 짝퉁 비슷한 인식을 심어주었고 판매량도 별로 좋지 않았다. 카펜터는 이제 쳇에게 기대할 것이 없다고 생각해 계약을 해지했고, 쳇은 결국 1965년 말 쫓겨나듯이 부모가 살던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1.8. 다시 고향으로
이미 30대 중반이 된 아들이 방탕한 약쟁이가 되어 돌아오자 쳇의 부모는 실망을 감추지 못했고, 쳇도 개심은 커녕 마약상을 만나려다가 체포되어 법정에서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는 등 무던히 부모 속을 썩이고 있었다. 그러자 활동 초기에 자신의 리더작을 많이 출판한 퍼시픽 재즈에서 비틀즈의 히트 넘버나 멕시코 마리아치 음악 등을 이지 리스닝으로 편곡한 앨범 작업을 제안했는데, 쳇은 이런 '유사 재즈' 계통 앨범에서도 추락한 연주력을 보여주며 사방팔방으로 까였다.
설상가상으로 세 번째 아내가 된 캐럴까지 남편의 영향을 받아 헤로인 중독자가 되었고, 더 많은 약을 필요로 한 쳇은 유럽에서 그랬던 것처럼 만만해 보이는 의사에게 찾아가 꾀병을 부리거나 처방전을 위조하는 짓을 또 하기 시작했다. 물론 경찰이 이런 막장짓을 가만히 지켜볼 리 없었고, 쳇은 처방전 위조와 마약 투약, 절도, 교통사고 등의 죄목으로 수 차례 경찰서를 들락거렸다. 하지만 쳇은 체포될 때마다 자신과 같이 약을 했던 이들의 이름을 부는 조건으로 훈방되었고, 이제 쳇은 동료들에게조차 약쟁이보다 더 심한 밀고자라는 욕을 듣는 지경이 되었다.
그 와중이었던 1966년 8월에 쳇은 누군가에게 흠씬 두들겨 맞아 개발살난 채로 발견되었고, 쳇은 흑인 마약상들이 자신에게 돈을 뜯어내려고 집단 구타를 했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쳇은 그들의 신상도 제대로 몰랐고, 여러 언론에 했던 인터뷰도 별로 일관성이 없었다. 심지어 지인들은 쳇이 일부러 마약상에게 어그로를 끌어 폭행을 유도했다며 주작질일 거라고 유추하기도 했다. 정황상 그가 밀고한 마약상들에게 복복폭행을 당했을 가능성이 높다. 진실이야 어떻든 쳇은 이 사건으로 너무 얻어맞아 성한 치아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구강 상태가 개판이 되었고, 이는 마우스피스를 입에 대고 연주해야 하는 금관악기 주자들에게 치명적인 문제였다.
결국 트럼펫마저 제대로 불지 못하게 되자, 쳇은 약 1년 동안 주 정부에서 빈민들에게 내주는 쥐꼬리 만한 복지 수당과 잡일로 번 푼돈으로 연명해야 했다. 1967년 7월에는 아버지 체스니가 61세로 사망했다. 하지만 쳇은 여전히 인생에서 갈피를 못잡고 폭력과 마약 행위 등으로 경찰서 유치장 신세를 지는 등 계속 민폐를 끼치고 있었다. 하지만 트럼펫을 놓기는 싫었는지, 틀니를 맞추고 계속 연습을 거듭해 1967년 말에 조심스럽게 연주 활동을 재개했다. 1968년 여름에는 재즈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개그맨, TV 토크쇼 진행자였던 스티브 앨런의 곡을 받아 'Albert's House' 라는 앨범을 발표했지만, 약에 절고 연주력도 아직 형편없던 상태에서 취입한 탓에 불쏘시개 수준이었다.
쳇의 부진은 이듬해까지도 계속 되었다. 연주 의뢰가 더 뜸해지자 페인트공과 식당 종업원 등을 전전하며 돈을 벌어야 했고, 그 돈마저 마약상의 손에 들어가는 악순환이 계속 되었다. 8월 말에는 처방전 위조 혐의로 또 체포된 뒤 세 번째로 징역살이를 할 뻔했는데, 운좋게 판사의 동정을 얻어 강제 재활 치료 90일을 선고받고 풀려났다.진짜 답이 없다
퇴원 후에는 다시 어머니의 집에 얹혀살았지만, 어머니는 약쟁이인 쳇 뿐 아니라 그의 아내 캐럴도 별로 탐탁치않게 생각해 긴장 속에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다. 결국 이런 분위기를 견디지 못해 쳇은 예전에 자기 밴드에서 퍼커셔니스트로 활동했던 빌 러프보로의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고, 러프보로의 동거녀 샌디 러브와 어울리며 약에 취하는 것이 일상처럼 되었다.
약과 얼마 안 되는 연주 기회 속에서 근근이 살고 있었던 쳇은 산호세의 피자 레스토랑에서 잼 세션을 하러 들어갔다가 여성 드러머 다이앤 바브라를 만났고, 다이앤도 쳇의 마성에 이끌리며 동거녀가 되었다. 다이앤은 쳇의 마약 습관을 두려워하면서도 그와 어울렸고, 심지어 당시로서는 최신 마약이었던 LSD를 주기까지 했다.
클럽에서도 무시당하고 얼마 안되는 녹음 세션에서도 그야말로 네똥기 취급을 받게 되자, 쳇은 다시 뉴욕으로 가겠다고 결심했다. 때마침 캐럴이 남편과 다이앤의 불륜을 눈치채고 쳇과 매일같이 심각한 부부싸움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곧 다이앤을 데리고 동부로 떠났다.
뉴욕에 가던 중 쳇은 덴버에서 옛 밴드 동료였고 마약을 끊은 후 음악 교사로 일하고 있던 필 어소를 다시 만났고, 어소는 마침 그 곳의 클럽에서 연주하고 있던 디지 길레스피를 쳇에게 소개해줬다. 길레스피는 쳇이 복귀하고 싶다고 하자, 자신의 영향력을 이용해 뉴욕의 재즈 클럽 하프 노트에 공연을 할 수 있도록 줄을 대줬다.
1.9. 그리고 또 동부로
1973년 여름의 뉴욕 재즈 신은 록과 팝 음악의 대공세로 유례없는 침체기를 맞고 있었다. 특히 일부러 복고풍 컨셉을 잡고 운영하던 하프 노트는 겉보기에는 번지르르한 고급 클럽이었지만, 실제로는 만성적인 적자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쳇이 뉴욕에서 재기하려고 한다는 소식은 재즈 자체보다는 '과거에 촉망받던 미남 트럼페터가 사고뭉치 약쟁이로 영락한 모습' 을 보려는 호사가들을 자극했다.
물론 이 클럽에서도 쳇은 외모든 연주든 왕년의 그것에 한참 못미치는 어설픔을 감추지 못했지만, 음악을 들으러 오는 재즈팬 대신 쳇을 구경하러 온 사람들이 클럽을 가득 채워줬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재즈 보컬을 꿈꾸던 루스 영이라는 여인이 있었고, 루스는 이내 쳇의 일생에서 중요하면서도 또 휘둘리던 여성들 중 한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쳇의 주위에는 여전히 마약상들이 들끓었고, 가뜩이나 경영난에 허덕이던 클럽들은 이 퇴물에게 일거리를 더욱 주려고 하지 않았다. 쳇은 영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황색언론에 횡설수설한 자신의 마약 일대기 인터뷰를 조건으로 돈을 받아냈는데, 병원에서 메타돈 처방을 받아 헤로인을 끊으려고 하면서도 여전히 대마초와 코카인은 끊지 못하는 모순된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럼에도 쳇은 아무런 대책도 없이 캐럴과 아이들을 뉴욕으로 오라고 해서 재결합을 시도했다.
캐럴과 루스라는 두 여자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던 쳇은 예전처럼 트럼펫 실력이 잘 회복되지 않자 보컬 연습에 몰두했고, 1974년에 어렵사리 CTI 레코드와 계약을 맺고 보컬 위주로 된 컴백 앨범 'She Was Too Good to Me' 를 내놓았다. 이 앨범도 평론가들에게 그다지 좋은 평은 못받았고 매상도 그저 그랬지만, 이 때부터 쳇의 후기 스타일인 조용하면서도 독특한 회한의 감정을 노래하는 호소력이 제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약쟁이 습관을 버리지는 못했지만, 정말 재기하고 싶었는지 쳇은 장소나 분위기가 어떻든 닥치는 대로 기회가 주어지면 연주하고 노래했다. 덕분에 바가지를 긁던 캐럴과 자식들에게 간소한 집 한 채를 마련해줄 수 있었지만, 쳇은 루스와 어울리는 시간이 더 많았고 가족들에게 더 이상의 관심을 기울이려고 하지 않았다. 1974년 11월에는 오랜만에 제리 멀리건과 카네기홀에서 합동 공연을 가졌고, 이 실황은 CTI에서 두 장의 LP로 출반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멀리건과 쳇 사이의 앙금은 가라앉지 않았고, 서로를 수전노와 퇴물 취급하며 못잡아먹어 안달이었다. 그럼에도 이 공연의 라이브 앨범에는 쳇의 오래되었으면서도 새로운 장기인 서정성이 꽤 효과적으로 발휘되어 있었고, 1950년대의 리즈시절을 회상하는 이들에게 좋은 선물이 되었다. 이렇게 재기를 위해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었음에도 쳇에 대한 사회의 인식은 약쟁이+범죄자였고, 지역 주민들도 쳇과 같이 사는 것을 거부해 억지로 이사를 가야 할 정도였다.
1.10. 방랑 생활
다시 전반적인 미국 활동에 염증을 느낀 쳇은 1975년 여름 이탈리아 프로모터 알베르토 알베르티가 제안한 이탈리아와 프랑스 재즈 페스티벌에 참가하기 위해 다시 미국을 떠났다. 여기서 쳇은 미국에서 경험할 수 없었던 환대를 받았지만, 그 성질을 이기지 못해 미국의 동료 뮤지션들과 함께 한 페스티벌 무대에서는 끊임없이 다툼이 벌어졌고 루스까지 마약을 못해 신경이 극도로 날카로워진 쳇의 폭행에 시달려야 했다.
엉망진창 속에서 페스티벌 일정을 마친 쳇은 옛 친구 자크 펠저의 집에 한 동안 머물렀고, 펠저는 1950년대 말에 그랬던 것처럼 쳇에게 코데인과 모르핀을 제공했다. 동시에 쳇은 펠저의 딸이었던 드러머 미셸린과도 급속히 가까워졌고, 이들은 약쟁이 그룹을 이루어 음악과 사생활을 서로 나누기 시작했다.
한편 미국에서는 쳇의 음반이 나오는 족족 부진한 상태를 면치 못하자 레코드 업계들이 점점 더 그를 멀리했는데, 1977년 2월에 CTI 레코드에서 마지막으로 준 기회를 활용한 'You Can't Go Home Again' 도 매상이 영 좋지 않았다. 결국 음반사는 계약을 파기하고 프로듀서를 해고해 버렸다. 하지만 이 때 같이 짤린 프로듀서 존 스나이더는 쳇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기 위해 자신이 막 설립한 마이너 음반사인 아티스츠 하우스에서 퀸텟 앨범 'once Upon a Summertime' 을 취입하게 해줬고, 심지어 쳇의 가족들이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지원해주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쳇의 가족들은 집세마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가난에 허덕이고 있었고, 쳇은 그 해 여름에 또 아무 전망도 대책도 없이 가족들을 데리고 벨기에로 가 펠저의 집에서 잠시 얹혀살았다. 그러고는 10월 초부터 시작될 예정이었던 북미 순회 공연을 위해 가족들을 내버려둔 채 루스와 함께 미국으로 돌아갔고, 펠저도 쳇의 가족들을 껄끄러워 하자 캐럴은 아이들을 데리고 고향 영국으로 가버렸다.
어렵사리 시작된 미국 순회공연은 예전처럼 별로 성공적이지 못했다. 로스앤젤레스에서는 루스와 사귀느라 꿔다놓은 보릿자루가 돼버린 다이앤과 잠시 만나기도 했지만, 결국 헤어졌다. 그리고 루스와 함께 뉴욕 근교 플러싱에 집을 마련해 영국에서 아이들을 데려왔지만, 쳇도 루스도 하도 불안정한 환경에서 오랫동안 자란 탓에 폭력적이고 비관적으로 변해 버린 아이들을 제대로 다독일 수 없었다.
결국 쳇이 1978년 가을 서독 정부의 입국 금지 조치가 해제되면서 유럽 순회공연을 떠나게 되자, 아이들은 다시 영국의 어머니에게 돌아갔다. 서독과 오스트리아, 스위스, 이탈리아, 노르웨이 등지를 돌며 공연하던 쳇은 이내 마약을 하지 못해 신경이 곤두서면서 이동할 때마다 자신의 장기(...)인 난폭운전을 선보였고, 급성 담석증에 걸려 쓰러지기도 했다. 그나마 공연을 다니면서 자제했던 마약도 11월에 네덜란드에 가면서 또 흥청망청 해대기 시작했다.
덕분에 그 해의 마지막을 장식한 프랑스 공연 일정은 헤로인에 쩐 채 계속 느려지고 늘어지는 음악으로 점철되었고, 그 와중에도 프랑스의 소노프레스에서 'Broken Wing' 이라는 앨범을 취입했다. 쳇은 새해를 잠시 뉴욕에서 보낸 뒤 또 서독으로 갔고, 이어 동유럽을 제외한 유럽 각지에서 순회 공연을 했다. 여전히 유럽 청중들은 미국보다 쳇을 환대하고 있었고, 쳇도 이에 고무되어 그 해 동안 이런저런 유럽의 마이너 음반사들에서 'The Touch of Your Lips' 를 비롯한 여러 장의 음반을 만들어냈다.
여전히 마약과 가족 문제가 골칫거리로 남아 있었지만, 쳇은 특히 이탈리아에서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1980년 4월에는 이탈리아 사회민주당으로부터 그 동안의 음악 활동에 대한 공로로 감사패까지 받았다. 이런저런 인디 영화 제작자들은 쳇과 관련된 다큐멘터리를 만들려고 했고, 유럽 각지의 소규모 음반사들이 난입해 수많은 음반을 내고 심지어 클럽 공연 실황을 무단 녹취한 해적판까지 나돌았다.
하지만 이들 앨범은 너무 벼락치기로 제작되어 음악적으로든 음질이든 대부분 돌아볼 가치가 없었고, 쳇 자신도 너무 많은 곡을 하룻밤에 연주하려고 하면서 실수를 연발하고 있었다. 마약 습관은 다시 심해지기 시작했고, 급기야 공연 스케줄을 빼먹거나 연주자들에게 연주료를 제 때 지급하지 않아 다툼이 벌어지는 등 다시금 막장이 되기 시작했다. 1981년 여름에는 다시 미국 순회 공연을 했지만, 미국 청중들과 비평가들은 여전히 쳇을 달갑게 보지 않았다.
1.11. 말년
설상가상으로 쳇은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자신과 연주했던 동료들과 친구들, 마약상들이 하나 둘 마약 과용으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서 점점 더 염세적으로 변해갔다. 루스와도 관계가 계속 틀어지기 시작했고, 결국 둘은 1982년 9월에 결별했다. 쳇은 이제 예전에 한 번 차버린 적이 있던 다이앤과 재회했고, 다이앤은 다시금 쳇의 마성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1983년 초에는 이후 쳇의 말년 활동을 책임지게 되는 네덜란드인 프로모터 빔 비흐트의 제안으로 스탄 게츠와 함께 북유럽과 중동 순회 공연에 들어갔는데, 이미 예전에 공동 작업을 했다가 망쳐버린 전적이 있던 만큼 둘의 사이는 별로 좋지 않았다. 게츠는 무대에서도 쳇이 솔로를 연주하는 동안 똥씹은 표정을 지었고, 중동으로 가기 직전에 쳇이 마약을 갖고 가야겠다는 정신줄 놓은 소리를 하자 게츠는 쳇을 내버려둔 채 사우디아라비아로 가버렸다.
결국 쳇은 다시 유럽에서 빡빡한 일정을 소화했고, 지나치게 다망한 연주와 마약 중독 때문에 이미 신체적인 건강도 계속 악화되고 있었다. 하도 오랫동안 약쟁이로 살다 보니 혈관이 수축되어 약을 주사할 부위를 찾느라 고생할 정도였고, 네덜란드에서는 약을 너무 심하게 해서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넘기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도 1985년에 폴 블레이와 함께 녹음한 'Diane' 같은 나름대로 괜찮은 앨범이 나오기도 했지만, 그 해 여름에 처음으로 시도한 브라질 공연은 실망스러운 결과를 낳는 등 전체적으로 현시창이었다.
1986년 3월에는 생애 첫 아시아 공연을 일본에서 가졌는데, 이 때는 일본의 마약 관련 법이 엄격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메타돈만 조금 가져갔고 공연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하지만 일본에서 돌아온 뒤 영국에서 엘비스 코스텔로와 협연했을 때는 다시 약쟁이가 되었고, 미국 서부에 정착하려던 계획도 실패로 돌아갔다.
그 해 말에 쳇은 유명 사진 작가이자 영화 제작자였던 브루스 웨버를 만났고, 웨버는 쳇을 모델로 사진을 찍자고 제안했고 쳇도 동의해 몇 장의 사진이 촬영되었다. 웨버는 곧 쳇의 삶을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도 제작해 보자고 졸랐고, 승낙을 얻은 뒤 쳇을 비롯해 그의 주변인들을 섭외하고 이런저런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하지만 쳇은 약에 절어 협조적인 모습을 그다지 많이 보여주지 못했다.
1987년 6월에는 두 번째이자 마지막이 된 일본 공연을 했는데, 도쿄 공연의 실황은 녹화/녹음되었고 훗날 'Four' 와 'Memories' 두 장의 라이브 앨범과 DVD로 출반되었다. 쳇은 전년도와 마찬가지로 일정 동안 약간의 메타돈을 제외하면 일체 약을 하지 않았고, 덕분에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한 보기 드문 명연을 들려줄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쳇은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직감했고, 일본 공연 후 고향으로 돌아가 오랜만에 캐럴과 가족들을 만났다.
하지만 다시 공연을 위해 유럽으로 간 뒤, 쳇은 헤로인과 코카인을 섞은 스피드볼로 계속 자신의 건강을 망치고 있었다. 오랜 투약의 부작용으로 몸은 종기 투성이가 되어 고름과 피가 흐르고 있었고, 약을 더 심하게 하면서 밴드 멤버들 뿐 아니라 다이앤과 미셸린에게까지 상습적으로 폭력을 휘두르는 등 밑도 끝도 없이 추락하고 있었다.
1988년에도 쳇은 계속 유럽 각지를 떠돌며 공연을 했고, 이런저런 인터뷰와 방송 출연 요청에도 순순히 응했다. 비록 이들 기회에서 쳇은 여전히 자기 연민과 아집에 빠진 모습을 감추지 못했지만, 쳇의 생애 마지막 육성들을 담은 귀중한 자료로 남게 되었다. 2월 말에서 3월 초까지는 이탈리아에서 공연하면서 마이너 음반사 필롤로지에서 'Little Girl Blue' 와 'The Heart of the Ballad' 두 앨범을 녹음했는데, 이 앨범들은 결국 쳇이 남긴 마지막 스튜디오 음반이 되었다.
쳇은 2월 중순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미국으로 돌아간 다이앤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운 상태였고, 다이앤에게 돌아와 달라고 애걸복걸했지만 결국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쳇은 남은 몇 개월 동안 다이앤 대신 자신에게 계속 이런저런 약을 대주던 미셸린과 약을 하며 보냈다. 1988년 4월 말에는 북부독일방송(NDR)에서 쳇의 단독 콘서트를 기획했는데, 쳇에게 방송국 소속 빅 밴드와 북독일 방송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붙여주는 대규모 공연이었다. 쳇이 한 번도 리허설에 나오지 않아 무산될 뻔하기도 했지만, 다행히 28일 하노버 지국 대강당에서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쳇의 생애를 통틀어 가장 화려하게 준비된 이 공연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이 공연의 실황이 쳇이 남긴 최후의 녹음이 되었다. 하지만 공연 뒤 쳇은 바로 인근 네덜란드로 차를 몰고 가 약을 구하러 다녔고, 광기는 점점 더 심해져 자해 행위까지 서슴치 않았다. 다음 달에도 파리와 암스테르담의 클럽에서 공연을 계속 했지만, 이미 쳇은 의욕을 잃고 피곤한 모습으로 약간의 연주만을 들려줄 뿐이었다. 그리고 5월 10일에 로테르담의 재즈카페 디지에 들어가 벌인 즉흥 잼 세션이 쳇의 마지막 공연이 되었다.
1.12. 죽음
로테르담에서 예정에 없던 잼 세션을 한 뒤에도 쳇의 공연 스케줄은 여전히 빡빡하게 잡혀 있었다. 당장 이틀 뒤인 12일에 네덜란드 방송국의 생중계가 예정된 중요한 공연이 있었지만, 쳇은 리허설 때도 공연 때도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프로모터이자 매니저 빔 비흐트 뿐 아니라 쳇의 밴드 멤버들도 그가 어디서 뭘 하고 있는 지 알 수 없었다.
이 와중에 쳇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암스테르담의 싸구려 호텔인 프린스 헨드리크의 3층 방에 투숙하고 있었다. 쳇은 12일 오후 체크인을 한 뒤 다시는 호텔 방문을 열지 않았고, 다음 날 새벽 세 시 쯤 한 행인이 호텔 앞에서 누군가가 피칠갑이 되어 죽어있는 것을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했다. 출동한 경찰은 시체의 얼굴이 심하게 손상되었고 호텔 방의 창문을 지탱하고 있던 빗장이 같이 떨어져 있던 것으로 볼 때, 투숙객이 창문에서 떨어져 죽은 것으로 추정했다.
결국 아침에 쳇의 행방을 수소문하고 있던 이들은 트럼펫을 소지하고 있던 남성의 시체가 발견되었다는 경찰의 연락을 받고 시체 공시소로 가서 신원을 확인했다. 하지만 쳇으로 판명된 이 남자가 실수로 떨어져 죽은 것인지, 아니면 자살한 것인지, 또는 누군가가 고의로 떨어뜨려 살해한 것인지를 놓고 수많은 음모론이 나왔다. 하지만 타인의 침입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고, 경찰은 마약에 취한 쳇이 실수로 실족사했거나 혹은 자살한 것 같다고 브리핑을 마쳤다. 그래서 쳇은 59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쳇의 시신은 18일에 간단한 송별회를 가진 뒤 다음 날 비행기로 미국에 보내졌고, 잉글우드 파크 묘지에서 장례식을 치른 뒤 매장되었다.
2. 사후의 평가
이미 쳇의 사후에 개봉된 브루스 웨버의 다큐멘터리 'Let's Get Lost'에서부터 수많은 논쟁이 벌어진 것처럼, 지금도 쳇에 대한 평가는 상당히 엇갈린다. 호평하는 이들은 그가 보여준 특유의 부드럽고 정갈하면서 비극적인 아우라를 들며 빌리 홀리데이와 동급으로까지 치켜세우지만, 비판하는 쪽에서는 쳇이 연주력 보다는 이미지로 먹고 살았으며 그와 가장 많이 비교되었던 마일스 데이비스 같이 음악사에 수많은 변혁을 가져온 인물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실제로 음악에 관해서만 썰을 풀어도 한이 없는 마일스와 달리, 쳇의 삶은 음악보다는 오히려 캐막장 인생 역정과 그로 인해 빚어진 수많은 갈등, 증오, 범죄 경력에 촛점이 맞춰지는 경우가 많다. [4] 항상 촉망받는 재능의 신인들을 찾아내는 데 주력해 그들과 함께 레전설이 된 마일스와 달리, 쳇은 1960년대 이후 (마일스와 비교하면) 클래스가 좀 떨어지는 이런저런 뮤지션들과 협연했고 그마저도 진득하게 눌러앉은 인물이 드물었기 때문에 더더욱 음악적인 저평가를 면치 못하고 있다.
하지만 '재즈북'을 집필한 독일 비평가 요아힘 베렌트는 쳇이 비록 마일스 같은 선구자적인 면모는 없었지만, 음을 아끼면서 감성적인 면을 극대화하는 재능은 누구도 쉽게 따라가지 못한 독자적인 것이었다고 평하고 있다. 실제로 쳇의 들쭉날쭉한 디스코그래피 중에서도 잘 살펴보면 나름대로 건질 만한 음반들이 여럿 있고, 그 중에는 일반적인 쳇의 이미지를 무색하게 할 정도로 격렬하거나 실험적인 시도를 담은 것들도 있다. 그리고 제대로 된 음악 교육도 받지 않은 채 자신만의 개성을 구축한 것도 타고 난 재능이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럼에도 쳇의 인생은 후배 뮤지션들에게 일종의 반면교사로 여겨지기도 한다. 비록 쳇이 불안정안 환경에서 자랐기는 했지만, 결국 자신의 결점을 개선할 수 있는 수많은 기회를 저버리고 마약에 끝없이 탐닉하면서 시간과 재능을 모두 썩혀버렸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상처받았다고 느낄 수록 주변 사람들에게도 끊임없이 상처를 입혔고, 쳇의 주변인들 중 그를 좋은 사람이라고 평한 이는 한 사람도 없다고 해도 될 정도로 여러 면에서 문제적인 인간이었다.
이 때문에 쳇 베이커는 주로 흑인들이 주연으로 기록되던 재즈사에서 보기 드물게 자신의 존재감을 새긴 백인 뮤지션 중 한 사람으로 기록되고 있고, 계속 논란을 부를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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