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재즈

Steve Lacy & Mal Waldron* ‎– At The Bimhuis 1982(2006년)

by thetraveleroftheuniverse 2017. 10. 6.





Piano – Mal Waldron



Soprano Saxophone – Steve Lacy













57년에 빌리 할리데이(Billie Holiday)의 반주자로 활동을 시작하여 할리데이가 타계한 59년까지 노래의 한 단어 한 구절을 완벽하게 보완하면서 연주해 주었던 재즈 작곡가이며 편곡자, 피아니스트 Mal Waldron (1925 – 2002/뉴욕)은 클래식 교육을 재즈에 활용한 탄탄한 실력으로 59년 자신의 피아노 즉흥 연주를 담은 앨범 Impressions를 발표한 후 60년에 Left Alone를 공개했으며, 61년에 앨범 The Quest를 내놓고 Eric Dolphy, Booker Little의 역사적인 캄보에 참가하여 62년까지 혼신의 힘을 기울여 연주하여 재즈 팬들을 매혹시켰다고 한다. 그 후 64년에 앨범 Les Nuits De La Negritude를 공개한 다음 65년에 유럽으로 건너간, 그는 뮌헨에서 거주하며 66년에 All Alone과 Trio, 그리고 Sweet Love, Bitter를 발표하여 유럽 재즈 팬들을 열광시켰는데 셀로니어스 몽크(Thelonious Monk)의 여백을 활용한 연주에서 영향을 받았으며 서정적이며 탐미적인 피아노 연주를 선보였다고 전해지는데 역시 셀로니어스 몽크의 영향을 받아 자신의 연주 시 피아노기 있는 라인업에는 꼭 몽크의 작품을 녹음하던 소프라노 색소폰 연주자인 Steve Lacy 와 듀오를 이루어 암스텔담 클럽에서 연주된 녹음 앨범 At The Bimhuis 1982를 선보인다.

이들은 총 5트랙의 앨범 구성에서 마지막 3트랙(나머지 2트랙은 각각 하나씩)을 몽크의 작곡으로 채울 만큼 몽크에 대한 헌정의 의미가 있는 앨범이 아닐까한다.

개인적으로 색소폰의 음색, 더군다나 소프라노 색소폰의 음색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레이시의 색소폰의 음색은 참 독특하다. 색소폰 특유의 육감적인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내가 이상한 것인가? 그렇다고 와락 그의 연주가 쏙 들어오는 것은 아니지만, 때때로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다. 왈드런의 여백을 채우는 레이시의 혼은 배경의 색채 때문인지 헐 고급스럽기도 하고요.


Steve Lacy & Mal Waldron* ‎– At The Bimhuis 1982(2006년)

레이블: Daybreak ‎– DBCHR 75249,
Challenge Records (3) ‎– DBCHR 75249 /Netherlands
녹음일: 1982년 12월 10일
발매년: 2006년 6월 11일
길이: 48:53
스타일: Post Bop, Contemporary Jazz

Tracklist
1 Blues For Aïda/ Steve Lacy 7:09
2 Snake Out/ Mal Waldron 15:23
3 Reflections/ Thelonious Monk 7:41
4 'Round Midnight/ Thelonious Monk 9:13
5 Epistrophy/ Thelonious Monk 9:24

Credits
Piano – Mal Waldron
Soprano Saxophone – Steve Lacy





https://youtu.be/K5UMItTz8ic?list=PL45j_V_-ArWqRPYP84mRfs1poxDWVSFN0







Epistrophy




Allaboutjazz의 GEORGE KANZLER 리뷰(2007년 7월 2일)

Steve Lacy & Mal Waldron: At The Bimhuis 1982
소프라노 색소폰 연주자 Steve Lacy (1934-2004)와 피아니스트 Mal Waldron (1925-2002)은 1958년부터 밴드에서 함께 일했지만 1981년 듀오로 합쳐져 20년간 산발적으로 계속해 녹음을 했다. Bimhius 1982 에서 유럽의 두 국외 추방자는 그 해 12 월 암스테르담 클럽에서 연주된 녹음 음반이다.
비록 많은 하드 밥과 모던 재즈의 거물 연주자들과 함께 녹음해왔던 왈드런과 레이스가 아방가르드의 주요 멤버들과 연관되어 있었지만, 이 앨범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개성적 스타일을 잠깐 미루고 특이한 접근 방식을 취한다. 그리고 그들은 듀오 나 솔로 같은 친밀한 상황에서 연주 할 때 보다 이 앨범에서는 결코 개성적 연주 방식을 보이지는 않는다. (Lacy는 아카펠라 솔로 앨범을 만드는 첫 번째 색소폰 연주자 중 한 명이었다). 그래서 이 CD는 디테일하고 고품질의 '라이브'사운드와 Bimhuis의 뛰어난 피아노로 이 멋진 재즈 듀오의 녹음된 오케스트라에 환영받을만한 추가 앨범이다.
두 음악가가 공통점을 가졌던 것은 Thelonious Monk의 음악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었다. 레이스는 1960년대에 몽크와 함께 연주한 경험이 있으며 몽크의 음악을 녹음한 최초의 앨범 중 하나였다. Waldron은 공간에 대한 몽크의 접근법, 여백적인 연주, 그 여백에 대한 느닷없는 공격, 강력하고 미묘한 감동을 그려가고 있다. 이 앨범의 5 트랙 중 마지막 3 트랙은 몽크 작곡이다.
짧은 피아노 소개 후, Lacy는 "Reflections, Waldron의 멜로디를 편다. Monkish 화음을주고, 유기적으로 흘러 나오는 자신 만의 변주곡을 연주하여 몽크의 정신을 따뜻하게 연출한다. Lacy, 소프라노 색소폰의 많은 청중의 대가 음영은 울퉁불퉁 한 자정에 버디에서 버디에 이르기까지 풍부한 노래 톤을 이끌어냅니다. 전설적인 피아노 코드와 Waldron의 독창적 인 Monk 피아노 태그에 대한 독창적 인 노래로 뒷받침됩니다.
"Epistrophy는 그의 영화적인 즉흥 연주의 멜로디를 만드는 몽크의 성큼 성큼 걷는 듯한 타건을 제안하는 왈드런의 연주에 레이시의 멜로디적 정교함을 배경으로하는 몽크의 보폭에 대한 제안과 함께, 자신의 영화적인 멜로디 즉흥곡을 만들어 낼 때까지 레이스의 멜로디 정교화를 뒷받침하는 느린 세 잇단음표가 평소보다 더 느리고 더 사색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Lacy의"Blues for Aida는 풍부한 중역 대 음의 기품 있고 당당한 느린 춤곡인 파반느의 설정으로 연주된다. 왈드런의 "Snake Out은 듀오의 아방가르드적 요소가 품어져 나온 연주이다.



1.

Malcolm Earl "Mal" Waldron (1925 – 2002/뉴욕)은 빌리 할리데이(Billie Holiday)의 마지막 반주자로 활동했던 미국의 재즈 피아니스트이며 작곡가, 편곡자이다. 재즈와 클래식 교육을 받은 그는 퀸즈 대학에서 재즈를 공부하였고 40년대 초부터 프리랜서로 활동을 시작했다.

49년부터 53년까지 아이크 퀘벡(Ike Quebec)의 반주와 리듬 앤 블루스 밴드에서 경력을 쌓은 그는 그 후 54년부터 56년 사이에는 찰스 밍거스(Charles Mingus)의 피아니스트로 활약하였다. 그 후 현재에 이르는 그의 중후한 연주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50년대에 프레스티지 레이블의 하우스 피아니스트로 기용되어 많은 세션에 참가하였다. 57년에 빌리 할리데이(Billie Holiday) 반주자로 활동을 시작한 그는 할리데이가 타계한 59년까지 노래의 한 단어 한 구절을 완벽하게 보완하면서 연주해 주었다. 또한 56년부터 60년까지 [Mal 1], [Mal 2], [Mal 3], [Mal 4] 등 자신의 개성을 가득 담은 시리즈 형식의 앨범을 발표하여 좋은 반응을 얻었다.

59년에 왈드론은 자신의 피아노 즉흥 연주를 담은 앨범 [Impressions]를 발표한 후 60년에 [Left Alone]를 공개했으며, 61년에 앨범 [The Quest]를 내놓고 에릭 돌피(Eric Dolphy), 부커 리틀(Booker Little)의 역사적인 캄보에 참가하여 62년까지 혼신의 힘을 기울여 연주하여 재즈 팬들을 매혹시켰다.

그 후 64년에 앨범 [Les Nuits De La Negritude]를 공개한 다음 65년에 유럽으로 건너간, 그는 뮌헨에서 거주하며 66년에 [All Alone]과 [Trio], 그리고 [Sweet Love], [Bitter]를 발표하여 유럽 재즈 팬들을 열광시켰다.

69년으로 접어들어 앨범 [Ursula]를 공개한 후 70년에는 아름다운 선율이 담긴 앨범 [Set Me Free]를 비롯하여 [Free At Last], [Tokyo Reverie] 그리고 [Tokyo Bound], [Blood And Guts] 등을 발표하는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71년 한 해 동안 그는 [Spanish Bitch], [Number Nineteen], [The Opening] 등의 앨범을 발표하는 열정을 과시했으며, 72년에는 앨범 [Blues For Lady Day], [A Little Bit Of Miles], 블루스의 선율을 담은 [A Touch Of The Blues], 개성 짙은 [Mal Waldron on Steinway] 등을 발표하여 뜨거운 정열을 과시하였다.

74년에 왈드론은 개성적인 앨범 [Hard Talk]을 발표했으며, 78년에는 독특한 분위기의 앨범 [One Upmanship]를, 78년에는 [Moods]를 공개하여 재즈팬들을 매혹시켰다. 79년에 이르러서는 찰스 밍거스의 작품을 연주한 [Mingus Lives]를 공개하여 사랑을 받았다.

그는 80년대에 이르기까지 유럽을 무대로 활동하였으며, 80년 이후 일본에서 많은 인기를 모았다. 81년에 그는 앨범 [Mal '81]과 [What It Is]를 발표한 다음 82년에 [One Entrance], [Many Exits], [In Retrospect] 를 공개하여 자신의 기량을 마음껏 과시하였다. 이어 83년에는 앨범 [Breaking New Ground]를, 84년에는 에릭 사티의 음악을 연주한 [Plays Erik Satie]와 [You And The Night And The Music]을 발표하였다.

86년에는 앨범 [Update]를 내놓았으며, 87년에는 에릭 돌피와 함께한 완성도 높은 작품 [Eric Dolphy And Booker Little Remembered]를, 88년에는 탄탄한 연주가 돋보이는 앨범 [Seagulls Of Kristiansund]와 서정적인 앨범 [Both Sides Now] 그리고 자신의 쿼텟과 함께한 열정적인 앨범 [The Super Quartet Of Mal Waldron]을 발표하여 많은 판매고를 보였다. 동년말에는 댄스와 소울이 담긴 앨범 [Mal, Dance And Soul]을 공개하여 저력을 과시하였다.

셀로니어스 몽크(Thelonious Monk)의 공간을 활용한 연주에서 영향을 받았으며 서정적이며 탐미적인 피아노 연주를 선보였던 말 왈드론은 뛰어난 작곡가로도 많은 명성을 얻었는데 "Soul Eyes" 같은 스탠더드를 작곡하였으며 영화 음악에서도 탁월한 음악적 역량을 발휘하였다.

2002년 12월 2일 말 왈드론은 벨기에 브뤼셀에서 암으로 결국 눈을 감고 말았다.



2.

Steve Lacy(1934년 7월 23일 - 2004년 6월 4일)는 뉴욕의 Steven Norman Lackritz에서 태어났으며 재즈 색소폰 연주자이자 작곡가로 소프라노 색소폰의 중요한 연주자 중 한 명으로 인정받았다. 진보적인 딕시랜드 음악가로서의 1950년대의 명성에 올랐던 레이시는 길고도 많은 경력을 쌓았다. 그는 실험적인 재즈에서 광범위하게 자유로운 즉흥 연주를 했지만 Lacy의 음악은 일반적으로 선율적이고 단단하게 구성되었다. 레이시는 또한 독창적인 작곡가가 되어 여러 번 반복되는 단 하나의 질문 프레이즈로 구성되는 경우가 많다.

Thelonious Monk의 음악은 Lacy의 레퍼토리의 영구적인 부분이 되었으며, 피아니스트 밴드에서 거의 모든 레이스 앨범과 콘서트 프로그램에 Monk의 노래가 등장했다. 레이시는 종종 트롬본 연주자 로즈웰 러드Roswell Rudd와 멍크의 작품을 탐구하면서 파트너가 되었다. Monk을 넘어 레이스는 찰스 밍거스 (Charles Mingus), 듀크 엘링턴 (Duke Ellington) , 허비 니콜스 (Herbie Nichols)와 같은 재즈 작곡가의 작품을 연주했다. 많은 재즈 뮤지션과 달리 그는 거의 일반 대중음악이나 쇼 곡을 연주하지 않았다.

이른 생활 및 경력

레이시는 Henry "Red"Allen, Pee Wee Russell, George "Pops"Foster, Zutty Singleton 과 같은 오래된 음악가들과 16 편의 Dixieland 음악을 연주한 후 Buck Clayton, Dicky Wells, Jimmy Rushing 과 같은 캔자스 시티 재즈 연주자들과 함께 일하기 시작했다. 그는 1957년 뉴 포트 재즈 페스티벌에서 Taylor의 획기적인 4 중주곡으로 출연한 Cecil Taylor의 데뷔 앨범 [ Jazz Advance (1956)]에서 아방가르드 (avant-garde )음악에 연연하게 되었다. 그는 또한 초기 Gil Evans 앨범에서 주목할 만한 출연을 했다. 그러나 가장 영속적인 관계는 Thelonious Monk의 음악과 함께했다. 그는 Monk 작곡 ( Reflections, Prestige, 1958)만을 특징으로 하는 첫 번째 앨범을 녹음하고 1960년에 Monk의 밴드에서 잠깐 연주했다. : 241 과 나중에 Monk의 Big 밴드와 사중주 콘서트 앨범 (컬럼비아, 1963).

유럽과 육중주

레이시가 처음으로 유럽을 방문한 것은 1965년 케니 드류 (Kenny Drew)가 머물던 코펜하겐을 방문한 것이다. 그는 이탈리아에 가서 이탈리아의 트럼펫 연주자인 엔리코 라바 (Enrico Rava)와 남아프리카 음악가인 조니 디야니 (Jony Dyani)와 루이 모홀로 ( Louis Moholo) 와 함께 4 중주단을 결성했다. ( 그들의 부에노스아이레스 방문은 The Forest and the Zoo, ESP, 1967의 다큐멘터리 앨범 때문에) 뉴욕으로 잠깐 돌아간 후, 그는 이탈리아로 돌아 왔고, 1970년 파리로 이주하여, 그의 생애의 마지막 2 년까지 살았다. 그는 유럽의 재즈 장면에서 널리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지만 미국에서 잘 알려지지 않았다.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레이시의 활동의 핵심은 그의 육중주였다.: 그의 아내, 가수 / 바이올리니스트 Irene Aebi : 272 소프라노 / 알토 색소폰 연주자 Steve Potts, 피아니스트 Bobby Few, 베이시스트 Jean-Jacques Avenel, 드러머 Oliver Johnson (나중에 John Betsch ). 때로는 이 그룹이 대규모 앙상블 (예 : Vespers , Soul Note, 1993 년에는 테너 색소폰의 Ricky Ford와 Tom Varner의 프렌치 호른을 추가 함)로 확장 되었지만 때로는 4인조, 3인조 또는 2 색소폰 듀오로 축소되었다. 그는 피아니스트 Eric Watson과 듀오를 연주했다. 레이시는 1970년대부터 솔로 색소폰 전문가가 되었다. 그는 소위 이런 형식의 즉흥 연주를 개발할 때 Sonny Rollins, Anthony Braxton, Evan Parker, Lol Coxhill 과 함께했다.

레이시는 모든 예술에 관심이 있었다. 특히 시각 예술과 시가 그를 위해 중요한 출처가 되었다. 그는 Tao Te Ching과 하이쿠 시인들을 포함한 멀티미디어 프로젝트의 화가 및 무용가인 Robert Creeley, Samuel Beckett, Tom Raworth, Taslima Nasrin, Herman Melville, Brion Gysin 와 다른 Beat 작가들의 음악적인 배경 작업을 했다.

Creeley는 Poetry Project Newsletter에서 언급했다. “스티브 레이스가 시인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또는 자신의 실습과 모범으로 얼마나 많은 것을 가르칠 수 있는지에 대해 간단하게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아무도 그보다 관대하고 통찰력 있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

나중에 경력

1992년 맥아더 장학금 ( "천재 보조금"이라는 별칭)을 수상했다. 그는 또한 전통적인 재즈부터 아방가르드, 현대 클래식 음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음악가와 협력했다. 그의 정규 sextet 외에, 그의 가장 정규적인 공동 작업자는 피아니스트 Mal Waldron이었다. 그는 왈드런과 함께 다수의 듀엣 앨범을 녹음했다. (특히 Semper Amore , Ellington / Strayhorn 자료 모음, Soul Note, 1987).

레이시는 작지만 의욕적인 대중을 위해 유럽에서의 이별 콘서트'를 벨기에에서 하기 위해 듀오와 솔로로 연주했다. Brussels, Antwerp, Ghent, Bruge, Bergen에서 열렸다. Naked Music에서 이 콘서트들의 앨범들이 수집되었다. 겐트에서 그는 엘리자베스 여왕 콩쿠르의 우승자인 클래식 바이올리니스트 Mikhail Bezverkhni와 함께 연주했다. 그는 2002년 미국으로 돌아와 매사추세츠 보스턴 에 있는 뉴 잉글랜드 음악원 (New England Conservatory of Music) 에서 가르치기 시작했다. 지난 2003년 3월 이라크 침공 직전인 보스턴 커먼 (Boston Common) 에서 평화 집회가 끝나고 2 만 5000 명의 사람들 앞에서 마지막 공연을 가졌다.

레이시는 2003년 8월 암 진단을 받은 후 2004년 6월 4일 69세의 나이로 사망하기 몇 주 전까지 계속 연주하고 가르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