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na Simone - Feeling Good
Nina Simone - Feeling Good
Birds flyin' high you know how I feel
Sun in the sky you know how I feel
Breeze driftin' on by you know how I feel
It's a new dawn,
it's a new day,
it's a new life for me, yeah
it's a new dawn
it's a new day
it's a new life for me ooooooooh
AND I'M FEELING GOOD
Fish in the sea, you know how I feel
River runnin' free you know how I feel
Blossom on the tree you know how I feel
It's a new dawn,
it's a new day,
it's a new life for me
And I'm feelin good
Dragonfly out in the sun
you know what I mean, don't you know
Butterflies all havin fun
you know what I mean
Sleep in peace when day is done
That's what I mean
And this old world is a new world
And a bold world
For me
Stars when you shine you know how I feel
Scent of the pine you know how I feel
Oh freedom is mine
And I know how I feel
It's a new dawn,
it's a new day,
it's a new life for me
AND I'M FEELING GOOD
지금 진행중인 미완성작품 제목 / Nina Simone-Feeling Good
그림 / Haily Choi
Nina Simone (니나 시몬)
빌리 홀리데이(Billie Holiday), 엘라 핏제랄드(Ella Fitzgerald), 줄리 런던(Julie London), 사라 본(Sarah Vaughan), 디나 워싱턴(Dinah Washington)과 함께 최고의 여성 재즈가수 중 한 사람으로 추앙받는 디바 니나 시몬(Nina Simone). 그래미에 15번이나 노미네이트되기도 했던 그녀는 보컬리스트이자 피아니스트, 편곡자, 그리고 인권 운동가였다. 풍성하고 기품있으며 분위기있는 저음의 보컬을 매력으로 소울풀한 해석력이 무기였던 니나 시몬은 그녀 자신은 그렇게 분류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일반적으로 재즈뮤지션으로 구분지어진다. 원래 클래식 피아니스트였던 니나 시몬은 클래식에 기반을 두고 재즈, 소울, 포크, R&B, 가스펠, 그리고 팝 뮤직과 브로드웨이 뮤지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음악 스타일을 커버하였다.
40장 이상의 스튜디오와 라이브 앨범들을 레코딩한 니나 시몬은 데뷔 앨범인 [Little Girl Blue]를 발표했던 1958년부터 1974년까지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그녀의 음악과 메세지는 강렬했고 미국 흑인(African-American) 문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많은 그녀의 음악들이 사운드 트랙으로 사용되었고, Mary J. Blige, Alicia Keys, Jeff Buckley, 그리고 Lauryn Hill 등 그녀에게 중요한 영향을 받았다고 언급했던 후배 아티스트들에의해 리믹스되어 사용되기도 했다.
본명은 유니스 캐슬린 웨이몬(Eunice Kathleen Waymon), 가수 니나 시몬(Nina Siomone)으로 대중음악사에 거대한 발자취를 남긴 그녀는 1933년 2월 21일 미국 노스 캐롤라이나 트라이온에서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교회에서 피아노를 치기 시작하며 뛰어난 재능을 보여 피아노 신동으로 불린 그녀는 10살에 클래식 피아노 콘서트를 가졌는데, 제일 앞자리에 앉아 딸의 콘서트를 관람하던 그녀의 부모가 백인들의 통로를 만들기위해 홀의 뒤쪽으로 쫓겨나는 수모를 당하였다. 이에 부모님들이 다시 앞자리로 돌아올때까지 연주를 거부했던 이 사건은 이후 니나 시몬이 인권 운동에 참여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그녀의 재능을 전해들은 어머니의 고용주는 피아노 레슨을 위해 경제적인 지원을 해주었고, 이어 그녀의 음악 교육을 지원하는 기금이 설립되기도 하였다. 17세때 필라델피아로 이주한 후 1950년대에 당시 흑인으로서는 드물게 유명한 줄리어드 음악원에서 학업을 이어갔다.
니나 시몬은 학비를 충당하기 위해 뉴저지주 애틀랜틱 시티에 있는 아일랜드 바에서 피아노를 연주를 하였는데, 바 주인은 그에게 노래도 잘하길 요구했다. 클래식 피아니스트가 되기 위해 끊임없는 연습을 해왔던 유니스는, 독실한 감리교도였던 어머니가 '악마의 음악'이라 부르는 음악을 딸이 하고 있음이 알게 되는 것을 꺼려 무대 이름을 "Nina Simone"으로 바꿨다. ("Nina"는 그녀의 남자친구가 부르는 애칭이었고, "Simone"은 1950년대 할리우드의 쟁쟁한 여배우들과 어깨를 겨룬 프랑스의 여배우 시몬 시뇨레(Simone Signoret)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었다.) 니나 시몬은 바에서 재즈와 블루스, 그리고 클래식이 어우러진 음악을 연주하고 노래하며 소수였지만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해주는 팬층을 확보하였다.
1958년 니나 시몬은 <포기 & 베스(Porgy & Bess)>에 수록된 조지 거쉰(George Gershwin)의 고전 "I Love You Porgy"를 레코딩하였다. 빌리 홀리데이의 앨범에서 배워 친구들을 위해 연주해주곤 했던 이 곡은 팝 싱글 차트 18위, 블랙 싱글 차트 2위에 오르며 미국에서 그녀의 유일한 빌보드 탑 40 힛트곡이 되었다. 이로 인해 니나 시몬은 베들레헴(Bethlehem) 레코드사에서 데뷔 앨범 [Little Girl Blue]를 녹음하게 되었다. 밀리언 셀링을 기록한 이 앨범에서 피아니스트, 가수, 편곡과 작곡가로서 그녀의 비범한 재능은 한층 더 빛을 발했다. "Plain Gold Ring", "Don't Smoke In Bed", "Little Girl Blue"와 같은 노래들은 곧 그녀의 공연 목록에서 스탠더드가 되었다.
데뷔 앨범의 성공으로 좀더 큰 레이블인 칼픽스 레코드사(Colpix Records)와 계약한 니나 시몬은 여러 장의 스튜디오 앨범과 라이브 앨범들을 발표하며 전성기를 누린다. "Don't Let Me Be Misunderstood"가 실린 1964년 앨범 [Broadway-Blues-Ballads], "I Put a Spell on You", "Ne Me Quitte Pas", 그리고 "Feeling Good"이 실린 1965년 앨범 [I Put A Spell On You], "Lilac Wine" 그리고 "Wild Is the Wind"이 실린 1966년 앨범 [Wild is the Wind]등이 사랑을 받았다. 특히 "Don't Let Me Be Misunderstood", "Feeling Good", 그리고 "Sinnerman"은 영화, TV 시리즈, 비디오 게임등의 사운드트랙으로 쓰이며 지금까지도 커버버전으로 큰 인기를 얻고있다.
클래식의 대위법, 재즈의 즉흥연주, 블루스의 변조 등 다방면의 음악요소를 결합해내는 시몬의 재능은 더 이상 무시될 수 없는 발군의 실력이었다. 독자적인 타이밍, 고요함의 음악적 극대화, 몇몇 코드로만 곡을 진행시키는 피아노연주 등의 방식으로 절제미가 돋보이는 자신만의 공연분위기를 주조해내는 실력은 가히 범접을 불허할 정도로 특징적이었으며 그의 여러 작품들에 녹아들었다.
1963년 버밍햄의 교회에서 터진 폭파사건으로 네 명의 흑인아이들이 사망하자, 니나 시몬은 미국에서 동족들이 처한 상황에 대해 비통함과 격노를 금치 못했고 곧 규탄의 의미를 담은 "Mississippi Goddam"(빌어먹을 미시시피)을 썼다. 필립스(Philips) 레코드에서 처음 녹음하여 발표한 앨범 [Nina Simone in Concert](1964)에 실렸던 이 노래는 강력한 호소력을 지녀 몇몇 남부의 주에서는 보이콧당하기도 하였으나, 그녀의 또 다른 예술적 지평을 보여주었다. 예술적 목표를 이뤄내기 위해 자신만의 음색과 세심한 피아노연주에 심혈을 기울인 그는 사랑, 증오, 슬픔, 기쁨, 외로움 등 인간의 모든 감정을 노래에 실어 분명하게 전해주었다.
이 때부터 이미 라이브 공연에서는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던 '인권'을 표방한 메세지가 그녀의 레코딩 레퍼토리에서도 담겨지기 시작하였다. 또한 많은 인권모임에서 공연하고 연설하였으며, 린치당한 흑인의 이야기를 노래했던 빌리 홀리데이의 "Strange Fruit"를 커버한 곡을 앨범 [Pastel Blues](1965)에서 발표하였다. 1966년 앨범 [Wild Is the Wind]에는 흑인들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시선을 네 명의 흑인여성들의 비애로 써낸 "Four Women"을 발표했는데, 이 노래는 흑인들에게 모욕적이라는 이유로 필라델피아와 뉴욕 라디오방송에서 금지되었다.
한때 커트 웨일(Kurt Weill)과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d Brecht)가 작곡한 노래 "Pirate Jenny"를 부르며 여배우로서 대극장을 순회하기도 했던 그녀는 프랑스에서 자끄 브렐(Jacques Brel)의 노래로 유명한 "Ne Me Quitte Pas"를 부르기도 했다. 니나 시몬은 '소울의 여대사제'로 불리며 팬들과 비평가들에 의해 신비로운 인물로 존경받음과 동시에 거의 종교계 인사로 종종 오해를 사기도 했다.
1967년 필립스에서 RCA레이블로 옮긴 니나 시몬은 이적후 발표한 첫 앨범 [Nina Simone Sings The Blues](1967)에 실린 "I Want A Little Sugar In My Bowl", "Do I Move You?", "My Man's Gone Now", 그리고 그녀의 친구인 랭스톤 휴스(Langston Hughes)가 그녀를 위해 써준 시를 토대로 한 저항가요 "Backlash Blues"를 포함해 더 많은 민권운동가요를 불러 자신의 노선을 지켰다. 마틴 루터 킹 목사(Martin Luther King, Jr.) 암살의 비극을 노래한 "Why?(The King of Love is Dead)"을 위시해 "Brown Baby", "Images", "Go Limp", "Old Jim Crow', "To Be Young, Gifted And Black" 등의 노래들은 미국에서 공식적으로 흑인들의 국민적 찬가(National Anthem of Black America)가 되었다.
그녀는 홀로 외롭게 노래하고 연주한 앨범 [Nina Simone and Piano!](1970)로 열성적인 팬들조차 놀라게 만들었다. 환생, 죽음, 고독 그리고 사랑에 대한 내성적인 노래들로 채운 모음집은 그녀의 녹음경력에 변함없는 하이라이트였다. 노래들에 새롭고 더 깊은 차원의 선물을 담아냈다. "Ain't Got No/I Got Life", 레너드 코헨(Leonard Cohen)의 "Suzanne", 그리고 "To Love Somebody"와 같은 비지스(Bee Gees)의 노래들, 봉고연주로 두 배의 속도감을 붙인 클래식 "My Wway", "Just Like Thumb's Blues", 그리고 네 곡의 밥 딜런(Bob Dylan)의 노래들의 주목할 만한 버전들에는 더 새롭고 깊은 차원의 재능을 담아냈다. [Emergency Ward](1972)는 절정의 선물이었다. 그녀는 조지 해리슨(George Harrison)이 쓴 두 곡 "My Sweet Lord"와 "Isn't It A Pity"의 긴 버전을 연주하면서 환각과 도피성을 배제한 분위기로 꾸몄다.
니나 시몬은 그러나 자유로워지고자 했다. 그녀는 자신이 조종당해 왔다고 느꼈고, 음반회사, 연예사업, 인종차별주의에 넌더리가 났다. 견디기 어려운 시련도 겪었다. 그녀의 남편이자 매니저인 앤디 스트로우드(Andy Stroud)와 이혼하였고, 그로 인해 중요한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매니저로서 그녀의 재산을 관리해온 앤디 스트로우드와의 이혼은 그녀에게 심각한 재정적 문제를 야기시켰다. 1970년 미국을 떠나 바바도스(Barbados)로 향한 그녀는 이듬해 리베리아, 스위스, 파리, 네덜란드에서 살다가 마지막으로 프랑스의 남부에 안착했다.
1974년 RCA에서의 마지막 앨범인 [It Is Finished]를 녹음 한 후 오랫동안 앨범을 발표하지 못했던 니나 시몬은 1978년 주디 콜린스(Judy Collins)의 "My Father"를 정확한 해석으로 다시 부른 버전과 최면술을 거는 "Everything Must Change"가 실린 앨범 [Baltimore]을 CTI 레코드사에서 내놓았다. 비록 상업적인 성공은 거두지 못했지만 이 앨범으로 니나 시몬은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1982년 미국으로부터 자진 '망명'을 선언한 자신의 마음을 노래로 표시한 앨범 [Fodder On My Wings]를 파리에서 녹음했다. 자신의 음악에 대한 결연한 의지가 여느 때보다도 잘 담긴 앨범이었다. 니나 시몬은 곡을 쓰고 개작하고 편곡했다. 피아노 하프시코드를 연주하며 영어와 프랑스어로 노래했다. 이 앨범은 1988년 그녀의 아버지의 죽음을 회상(추억)하는 노래 "Alone Again Naturally"의 특별버전을 포함한 몇몇 보너스트랙이 더해져 CD로 재발매 되었다.
1980년대에 니나 시몬은 런던에 있는 로니 스콧(Ronnie Scott)의 재즈 클럽에서 정기적인 공연을 가졌는데, 1984년에는 그녀의 콘서트실황을 담은 앨범 [Live at Ronnie Scott's]이 레코딩되었고, 필름으로 제작되어 비디오로 발매되었다. 드럼에 폴 로빈슨(Paul Robinson)이 찬조 출연한 이 비디오에는 그녀의 첫 레코드에서 발췌한 노래 "My Baby Just Cares For Me"가 포함돼 큰 인기를 누렸다. 다음 해 [Nina's Back]이란 제목의 새 앨범을 발표한 그녀는 전 세계를 누비는 콘서트에 나섰다. 1989년 그녀는 피트 타운젠트(Pete Townsend)의 뮤지컬 [The Iron Man]에 공헌한 것을 시작으로 1990년과 1991년 브라질 팝가수 마리아 베사니아(Maria Bethania)와 아프리카음악의 세계화에 앞장선 유명 여성보컬리스트 마리암 마케바(Mariam Makeba)와 함께 녹음했다. 1992년엔 또한 자서전 <I Put A Spell On You>가 출간되었다. 이 책은 프랑스, 독일 그리고 네덜란드어 번역본으로도 출판되었다.
1993년 그녀의 마지막 앨범이 되어버린 [A Single Woman]이 발매되었다. 이 앨범에는 로드 맥퀸(Rod McKuen)의 노래들과 자신의 노래인 "Marry Me", 그리고 프랑스의 스탠더드를 자신의 버전으로 부른 "Il N'y A Pas D'amour Heureux" 등이 수록되었다. 그녀의 노래는 영화음악으로도 사용되었다. 레퍼토리 중 5곡이 사운드트랙에 들어간 1993년 영화 <Point Of No Return>을 비롯해 <Shallow Grave>(1994)와 <Stealing Beauty>(1996)에 삽입된 "My Baby Just Cares for Me", 그리고 <One Night Stand>(1997)의 "Exactly Like You"까지 그녀의 목소리는 영화와 함께 관객의 마음을 움직였다.
세월은 흘러도 그녀의 음악은 변함없이 새롭고 젊은 청취자들의 호기심을 끊임없이 자극했다. "Ain't Got No/I Got Life"는 1988년 네덜란드에서 대형히트를 기록했다. 그녀는 또한 자신의 뒤를 든든히 받쳐주는 절친한 반주자들, 퍼커션의 레폴도 플레밍(Lepoldo Fleming), 베이스의 토니 존스(Tony Jones), 드럼의 폴 로빈슨(Paul Robinson), 키보드의 하비에르 콜라도스(Xavier Collados) 그리고 기타리스트 겸 그녀의 음악 감독 알 섀크만(Al Schackman)과 함께 세계 순회공연을 펼치며 청중들과 함께 여전히 흥분의 순간을 맛봤다. 1997년 런던에 바비칸(Barbican) 극장에서 그는 공민권운동, 형제애를 위해 미국의 첫 번째이자 주요한 리더들 중 한사람에게 헌정하는 의미의 노래 "Every Time I Feel The Spirit"를 불렀다. "Reached Down And Got My Soul", "The Blood Done Changed My Name", "When I See The Blood"와 같이 더욱 영가(Spiritual)적이고 생명과 같은 노래들이 뒤를 이었다.
니나 시몬은 1997년 프랑스에서 열린 니스 재즈 페스티벌(Nice Jazz Festival), 1998년 그리스의 데살로니가 재즈 페스티벌(Thessalonica Jazz Festival)의 하이라이트였다. 1999년 아일랜드의 더블린에 기네스 블루스 페스티벌에서는 그녀의 딸 리사 첼레스테(Lisa Celeste)와 함께 몇몇 곡을 듀엣으로 합창해 모녀의 다정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니나 시몬은 라틴 수퍼스타 라파엘(Rafael)과 함께 노래하고 두 번의 디즈니 연극 워크숍에 참여, <Aida>의 타이틀 역과 <Lion King>의 날라 역을 맡아 공연하면서 세계 투어를 했다. 1998년 7월 24일, 니나 시몬은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의 80회 생일파티에 특별손님으로 초대됐다. 1999년 10월 7일 그녀는 더블린에서 개최된 음악시상식에서 평생업적을 기리는 공로상을 품에 안았다. 2000년에 들어 그녀는 5월 26일 애틀랜타 명예 시민권을 수여받았다. 6월 9일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아프리카계 미국인 음악 협회로부터 다이아몬드 상을 수상한데 이어 8월 7일에는 프랑스에서 명예로운 총사상을 수상했다.
니나 시몬은 2003년 4월 21일 프랑스 남부 까리-르-루에(Carry-le-Rouet)에 있는 그녀의 별장에서 오랜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소망대로 유해는 아프리카의 여러 곳에 뿌려졌다. 매사추세츠대학으로부터 음악과 인류애에 대한 명예박사학위를 받은 니나 시몬은 바로 최후의 전승시인의 한 사람으로서 그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역사적 지위를 얻었다. 최고의 여류시인, 우리시대의 음악작가로 그녀는 영원히 우리의 기억 속에 살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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