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l Giardino Del Lamore Rain
Patty Pravo (패티 프라보)
패티 프라보는 카테리나 카셀리와 함께 60년대 후반부터 이태리 비트계의 양대산맥을 형성했던, 대표적인 여왕의 타이틀을 거머쥐고 활약했던 아티스트였다. 카테리나의 음악은 앨범 [Primavera]의 라이센스로 이미 소개된 바 있지만 그에 비해 패티 프라보의 앨범발매는 상당히 늦은 감이 있다.
이 들은 초창기부터 이태리의 대다수 청중들이 애정 어린 관심과 진정한 사랑을 받았던 여가수들이었다. 가냘픈 듯 도전적인 이미지의 Pravo는 60년대 말 로마의 정열적인 밤을 수놓았던 꿈 많은 소녀이자 확고한 "파이퍼 클럽의 소녀"로 부각되었다.
1948년 4월 9일 Mestre에서 태어난 Patty Pravo는 Nocoletta Strambi라는 이름으로 불리웠으며 그녀에게서 두드러진 예술적 재능을 느낀 할머니는 음악 학교에 그녀를 입학시켰다. 어린 시절 그녀는 피아노와 무용, 오케스트라 음악 공부를 했으며, 가족으로부터 멀리 떠나 런던에 서 머물면서 히피의 유행스타일을 답습한 후 로마로 돌아온다.
Guy Magenta라는 가명으로 활동하게 된 소녀 패티는 소녀들만으로 구성된 밴드 Le Pupille와 데뷔공연을 가졌으며 그 후에 Shel Shapiro를 알게되어 잠시 Rokes와 함께 활동한다. 1965년에 Guy는 Piper 클럽에서의 잦은 공연으로 대표적인 가수가 되었는데 물론 그 배후에는 Piper 클럽의 실질적인 소유자 Alberico Crocetta가 그녀에게 아티스트로서의 가능성과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영국출신의 Cyan Three를 동반한 패티는 비트(Beat)의 화려한 무대 위에 서게 되며 록과 리듬앤 블루스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다양한 레퍼토리들로 청중들을 열광시킨다.
Gianni Boncompagni는 Strambelli에게 가수로서의 기회를 마련해주었고 Patty Pravo라는 새로운 이름도 지어주었으며 Sonny Bono의 'But You're Mine'을 번안한 'Ragazzo Triste'라는 곡을 그녀에게 만들어준다. 이러한 선택은 RCA의 신생 레이블 ARC로 잠시 재적했던 1966년에 싱글 이 발매되어 다음해에 이태리 힛 퍼레이드에서 가장 많이 팔린 음반 20위안에 드는 기록을 세운다. 그러나 Patty Pravo는 평등을 부르짖는 반기회주의, 복장의 자유와 젊은이다운 반항의 상징과 함께 젊은이들의 우상으로 대표되어 혹평을 부채질하기도 했다.
한편 1967년에는 'Qui E La'로 Cantagiro 페스티발에 참가, 1968년에 발표된 'La Bambola'가 무려 23주간 히트차트에 머물면서 최정상의 자리를 획득한다. 그러나 그녀는 바로 그 정상의 자리를 기점으로 하여 젊은이의 음악과 비트의 세계로부터 급격히 멀어져갔다. 이윽고 1970년에 들어서면서 그녀의 데뷔앨범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아름다운ㅁㅏ법ㅅ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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