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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들

세라핀

by thetraveleroftheuniverse 2009. 10. 29.

 한때 페미니즘적 여자 주인공인 영화만 골라 보았던 적이 있었다. 가령 미국의 여류작가실비아 플라스의 러브 스토리를 다룬 '실비아', 뉴질랜드의 여류 작가 자넷 프레임의 자전적 영화인 '내 책상위의 천사', 멕시코 여류화가 프리다 칼로를 다룬 '프리다' 로뎅의 연인이었던 까미유 끌로델을 다룬 '로뎅의 연인'등...

 오늘 소개하는 세라핀은 낯선 이름이었고 영화를 보는 내내 그녀의 삶에 대한 연민과 진흙에서 꽃피던 예술성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순수한 열정으로 천재성을 태우다
[영화속 미술이야기] 영화 <세라핀>과 미술동네의 아웃사이더 소박파 (Naive Art)
미술교육 받지 않고 본능과 무의식을 통해 작품 완성
 
글/ 정준모(미술비평, 문화정책)

 

미술사에 등장하는 많은 화가들은 자신의 예술을 펼쳐나가고자 많은 노력과 희생을 필요로 했다. 하지만 그렇게 염원했던 화가로서의 영예를 누려보지도 못하고 이내 세상을 떠나거나 아니면 세상을 떠난 뒤 그 존재조차 희미해진 경우도 많다.

 

하지만 생전에 미술수업을 한 번도 받지 않은 채 자신에게 몰입해서 스스로의 그림을 그려나간 화가들이 의외로 많다. 이런 화가들을 미술사는 ‘원생예술가’라 부른다.

 

이들은 세상이 알던 모르던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을 그림에 바쳤는데 후에 미술사에 이름을 올린 화가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일요화가로 출발해서 소박파 화가로 미술사에 등재된 앙리 루소(Henri Rousseau,1884~1910), 측량 기사였던 앙드레 보샹(Andre Bauchant,1873~1958), 자신의 그림을 길거리에 늘어놓았다 화상의 눈에 들어 화가가 된 카미유 봉부아(Camille Bombois, 1883~1970)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여성으로 이런 나이브 아트(Naive Art)화가로 이름을 남긴 이가 있으니 그가 바로 ‘상리스의 세라핀’(Sraphine de senlis)으로 불리는 세라핀 루이스(Seraphine Louis,1864 ~1942)이다. 파리 북동쪽의 작은 마을 상리스에서 양치기로, 하녀로 살았던 그녀는 미천한 신분과 어려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화가로 등극하였는데 그녀의 그림에 대한 천재성과 광기 그리고 그를 발견하는 또 다른 눈을 지녔던 화상이자 미술사가인 빌헬름 우데(Wilhelm Uhde,1874~1947)를 만나면서 부터이다.

 

바로 이런 그녀의 범상치 않은 삶을 그린 영화가 최근 개봉되었다. 바로 그의 이름을 그대로 제목으로 사용한 ‘세라핀’(2008년작)이 그것이다. 영화 속 세라핀은 수도원에서 생활하던 중 그림을 그리라는 영적 계시를 받고 수도원을 나온다. 그리고 남의 집 궂은 일을 도맡아하면서 생계를 이어가는 세라핀의 일과는 하루종일 노동을 하고 그리고 일과가 끝난 밤이면 그림을 그렸다. 그림을 통해 신을 만날 수 있다는 믿음으로.

 

그녀는 불 땔 나무를 팔고 집세를 털어 그림 재료를 사들이고 들판을 뒤져 꽃과 풀에서 안료를 채취한다. 때로는 교회의 촛농까지 훔쳐다 스스로 물감을 만들어 사용한다. 그리고 그것들을 가지고 들꽃, 나무, 풀, 야생의 열매 등을 그린다. 그녀는 신성한 자세와 생각으로 구도자처럼 경건하게 그림을 그리지만 주변사람들은 그녀를 비웃을 따름이다. 이렇게 아무런 목적 없이 소박하게 그림을 그려온 그녀에게 화가가 될 길을 알려주는 ‘키다리아저씨’가 나타난다. 바로 ‘우데’이다.

 

1908년 후에 미래주의 화가 로베르 들로네(Robert Delaunay,1885~1941)와 결혼한 소니아 터크(Sonia Terk)와 결혼했지만 1912년 우데는 조용한 곳에서 글을 쓰기 위해 상리스에 작은 방을 빌려 이사를 온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미술사를 공부한 학자 겸 화상으로 ‘피카소’와 ‘브라크’의 작품을 처음 구입했고 1911년 앙리 루소의 첫 개인전을 열어줄 만큼 눈이 밝은 독일인이었다. 1928년 처음으로 소박파 화가들의 전시를 기획하기도 했던 그는 입체파와 나이브 미술의 발견과 발전에 큰 공을 세웠다.

 

이런 그가 이사 온 새집의 하녀가 바로 ‘세라핀’이다. 이날 저녁초대를 받은 우데는 우연히 그림 한 점을 발견하고 누구의 그림이냐고 묻는다. 주인은 세라핀의 것이라고 하찮게 대답하지만 우데는 직감적으로 그녀의 천부적 재능을 알아본다. 이렇게 만나게 된 세라핀과 우데의 관계는 우정도 사랑도 아닌 묘한 관계로 이어지고 그녀의 천부적 재능은 우데의 지원에 힘입어 빛을 발한다.

 

하지만 전쟁이 일어나고 시간이 흐른 후 그녀의 그림을 통해 다시 만나게 된다. 그녀의 그림은 이미 지난시절 세라핀의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개인전을 열어줄 계획을 세우지만 전쟁으로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이 계획은 자꾸 미루어진다. 그래서 세라핀은 더욱 불안하고 초조해하며 자신을 그림을 통해 태우면서 정신착란증에 시달리기 시작한다.

 

결국 1927년 우데의 지원으로 첫 개인전을 가지면서 명성을 얻기 시작할 즈음 그녀는 아무것도 모른 채 정신병원에서 삶의 시간을 소진한다. ‘신성’으로 그림을 그렸던 그녀가 ‘광기’로 심신이 허물어질 즈음 우데도 1930년대 경제공황으로 그녀를 더 이상 지원 할 수 없는 형편이 되고 만다.

 

이런 두 사람의 관계를 통해 영화는 그림이라는 것이 단순하게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심정을 최대한 자제하고 보이는 것을 순수하게 묘사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또 참된 묘사를 통해 진정으로 자신을 대상에 몰입하는 세라핀의 모습은 미술의 또 다른 속성과 창작의 신비감을 전해주는 동시에 항상 화가는 그를 알아주는 눈 밝은 이를 만나야 세상과 교감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왜 항상 화가들의 삶은 이렇게 극적이어야 하는 걸까?

감독 마르탱 프로보스트(Martin Provost)는 소박파 화가 세라핀의 이야기를 가감없이 일상적으로 그려낸다. 하지만 세라핀의 일상은 다소 지루하다고 느낄 만큼 차분하지만 그의 그림이 주는 것처럼 자제된 감성은 화려한 색채로, 소박하지만 열정이 느껴지는 영화이다.

 

또 순수하게 그림을 그린다는 행위를 통해 자신의 모든 것을 투영하는 세라핀의 그림을 향해 뿜어나오는 주체할 수 없는 열정을 주연을 맡은 욜랭드 모로(Yolande Moreau,1953~ )는 2009 세자르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할 만큼 완벽하게 세라핀의 영혼을 연기한다.

 

또한 남다른 안목을 가졌던 우데 역의 울리히 터커(Ulrich Tukur, 1957~ )의 역할은 매우 진중하면서도 학자적인 면모 그리고 그 안에 감추어둔 세라핀을 여성과 광기서린 천재 둘로 보아야 하는 고통을 연기한다. 세라핀은 그의 사랑에 이렇게 답한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사랑하는 법이 다릅니다.” 라고

 

영화 속 세라핀처럼 미술교육을 받지 않은 채 그림을 그리는 아마추어 화가들을 당시에는 약간 경멸하는 듯 한 말투로 ‘일요화가’라고 칭했다. 하지만 이들 작품이 전통적인 미술의 원칙을 떠나 본능과 무의식을 통해 작품을 제작한다는 점 때문에 주목을 받게되고 소박파(素朴派)라고 불리면서 미술사에서 대접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이들 작품은 어떤 유파로도 자유롭게 오직 자신만의 언어로 자신의 창조적 동력에 몸을 맡겨 작품이 완성된다는 점이다. 이들은 현대미술의 원리와 원칙과는 거리가 먼 문외한이며 아웃사이더이다. 그래서 이들을 미국에서는 아웃사이더 아트(Outside Art)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들은 큐비즘이 아프리카 조각에서, 표현주의가 남태평양의 원시예술에서 영향을 받은 것처럼 소박파 미술도 논리적이고 사변적인 현대미술의 2% 부족함을 매워주는 이미지의 보고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비주류 미술을 통칭 아르뷔르(Art burt)라고 하는데 정신 분열증환자와 아마추어 화가들의 그림에서 발견되는 순수하게 꾸밈없이 그려내는 “순수한 미술”을 의미한다. 사족, 영화를 보면서 피카소와 앙리 루소의 그림을 찾아보는 것도 재미있다.

 

 

[유지나의 필름 포커스] '세라핀'

무학의 하녀에서 화가로…숭고한 예술적 삶 조명

  • 우리는 왜 삶을 유지할까? 고달픈 인생산책을 어떻게 수행해내야 좋을까? 이 시기 절박하게 마음을 두드리는 질문들이다. 그런 점에서 고단한 삶의 비루함을 절박하고도 신묘하게 풀어낸 ‘세라핀’은 영감과 위안을 주는 작품이다.

    실화에 기초한 이 영화는 그림공부는 물론 학력조차 전무한 세라핀이란 여성이 타고난 기질대로 그림을 그려 일가를 이룬 신비한 예술적 삶에 대한 숭고한 기록이다.

    1910년대, 프랑스 작은 마을 상리스에서 하녀일을 하며 근근이 살아가는 세라핀(욜랭드 모로)의 삶의 핵심은 그림그리기이다. 그녀는 빵보다 그림재료를 사는 데 힘겨운 노동으로 번 돈을 다 쓰며 누추한 작은 공간에서 쉬지 않고 그림을 그린다. 살코기의 피와 성당 촛농, 모래와 흙을 이용해 물감을 만들어, 손으로 색깔을 발라 넣은 그녀의 그림들, 동물처럼 육감적으로 움직이는 나뭇잎과 과일, 꽃들…. 그것들은 자연이 피워낸 화려한 장식적 미학으로 화폭을 불타오르게 만든다. 광포한 아름다움의 찬란함이 고흐를 연상시키는 세라핀의 그림은 제도화되지 않은 자연미와 본능적 꿈틀거림의 발현이다. 이런 신비한 그림의 생성과정을 보는 것만으로도 영화보기는 매혹적이다.

    하녀 주제에 그림을 그린다며 그녀를 비웃는 부르주아 속물들, 속칭 예술애호가를 자처하는 사모님들의 비루한 평가를 젖히고 세라핀의 재능을 발굴하고 지원해준 미술평론가 빌헬름(울리히 터커)과의 관계가 깊이있게 펼쳐진다. 자신을 깊이 알아봐주는 인간 한 명만 있어도 삶은 살아낼 만할지도 모르니까. 그러나 종교적 열정이 에로스 억압으로 작동하여 광기 속에 자기 파멸담을 써나가는 세라핀의 말년은 카미유 클로델을 연상시키며 심장을 옥죈다.

    고된 하녀일 속에서도 동산에 올라 자연 속에서 바람과 풀과 대지의 향기를 고요히 음미하는 그녀의 모습은 우리를 숙연한 자연미학 속으로 초대한다. 어떤 고달픈 상황에서도 우리는 자신을 호모루덴스, 즉 ‘놀이하는 인간’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는 위대한 깨우침이다.

    세라핀에게 접신한 듯 거친 모습 속에서 장엄한 예술가의 모습을 구현해내는 욜랭드 모로의 외모와 제스처, 내면 표정이 화면을 압도한다. 영성까지도 이미지로 포착하는 마르탱 프로보스트 감독의 명민하고 깊은 시선에 경탄을 보낼 만하다.

    하나의 팁. 이 영화는 프랑스의 아카데미 격인 ‘세자르영화상’에서 최우수 작품상을 비롯하여 7개 부문을 수상했고, 카이로영화제 등 유수한 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휩쓸었다. 이런 영화야말로 비루한 행상판이 된 영화세상의 방부제이다. 꼭 보시라고 권해 드린다.

Seraphin Louis (1864~1942 프랑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