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더 수행성(gender performativity)이란?>
<젠더 수행성(gender performativity)이란?>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가 『젠더 트러블(Gender Trouble, 1990)』에서 제시한 개념으로, 젠더는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수행되면서 구성되는 것이라는 이론이다. 이 개념은 젠더를 생물학적 성(sex)의 자연스러운 표현이 아니라, 사회적 규범에 따라 행해지는 일련의 행위들(performance)로 본다는 점에서 급진적이다.
즉, 젠더는 존재가 아니라 행위이다. 즉, 우리는 ‘여성이라서 여성처럼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처럼 행동함으로써 '여성'이 되어간다. 이러한 수행은 일회성이 아니라 반복적이고 규범화된 사회적 실천이다.
예를 들면, 치마를 입고, 목소리를 낮추며, 감정을 절제하고, 돌봄을 실천하는 일련의 행위들이 '여성다움'이라는 사회적 젠더를 구성한다. 따라서 젠더는 본질이 있는 게 아니라, 사회적 규범에 따라 구성되고 강요되며 반복되는 행위의 효과이다.
왜 중요한가?
이 개념은 이성애 중심의 고정된 성별 체계를 해체하고, 젠더 정체성은 본질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다라는 페미니즘 이론의 중심을 이루게 되었다. 또한 퀴어 이론의 기초 개념으로서, 트랜스젠더, 논바이너리, 드래그 퍼포먼스 등 다양한 젠더 정체성을 설명하는 데 핵심적인 도구로 사용된다.
예시로 이해하기
어떤 사람이 ‘여성스럽다’는 평가를 받을 때, 우리는 그 사람의 몸(생물학적 성)이 아니라, 그가 하는 행동들—말투, 옷차림, 몸짓, 감정 표현 등을 보고 그렇게 판단한다. 이 행동들의 축적이 바로 ‘젠더 수행’이다.
버틀러의 급진성
버틀러는 단순히 ‘여성다움’이 사회적으로 구성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구성의 과정 자체가 규범적 폭력이며, 그에 저항하는 새로운 젠더 수행이 정치적 가능성을 연다고 본다. 즉, 젠더 수행성은 단지 설명 개념이 아니라, 해체와 저항의 가능성을 여는 급진적 개입이다.
한 줄 요약
젠더 수행성이란, 우리가 사회적으로 정해진 방식으로 ‘여성처럼’, ‘남성처럼’ 행동할 때, 그 반복적 행위 자체가 젠더 정체성을 ‘만들어낸다’는 개념이다.
젠더 수행성(gender performativity) 개념은 주디스 버틀러의 이론 중 가장 널리 알려지고 영향력 있는 개념 중 하나지만, 다양한 비판도 함께 받아왔다. 그 비판들은 대체로 이론의 추상성, 물질적 신체에 대한 간과, 정치적 실천 가능성, 역사적 맥락의 부족 등에서 제기된다.
1. 신체의 물질성을 무시한다는 비판
버틀러는 “성별(sex)조차 수행의 효과”라고 주장하며, 생물학적 성 자체가 구성된 것이라고 보았지만, 일부 페미니스트 이론가들은 신체적 경험의 실재를 너무 쉽게 간과한다고 비판한다.
비판자: 셸리 코헛, 낸시 프레이저 등은
→ “출산, 생리, 성폭력, 임신 등의 경험적이고 물질적인 신체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짐.
→ 수행만으로 신체가 ‘구성’된다면, 여성의 고유한 신체적 경험들은 모두 사회적 환상인가?
2. 추상적이고 이론 중심적이다
버틀러의 글은 철학적이고 해체론적인 언어로 쓰여 있어 현실에서의 구체적 적용이 어렵다는 비판도 받는다.
퀴어 운동이나 페미니즘 활동가들은
→ “‘누가 수행성을 그렇게 인식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가?’ 현실 속 정체성은 그렇게 쉽게 놀이처럼 바뀌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 특히 억압적인 사회에서, 젠더를 수행적으로 구성하고 실험할 수 있는 자유와 조건 자체가 불평등하다는 점에서 이상적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3. 행위 주체의 자율성이 모호하다
버틀러는 규범이 젠더를 구성한다고 보았지만, 그렇다면 누가 수행하는가? 주체는 규범에 의해 이미 구성된 것이라면, 저항하는 주체는 어디에서 오는가?
비판자들은
→ “모든 것이 수행이면, 주체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허상인가?”
→ 수행성과 구조의 관계에서 저항의 가능성이 모호해진다고 본다.
→ 특히 급진적 정치 실천의 주체 형성을 불가능하게 만들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
4. 비서구적 현실에 대한 적용의 한계
버틀러의 이론은 서구 후기자본주의 사회의 성정치 상황을 전제로 한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예컨대, 한국, 이슬람권, 제3세계 등에서는
→ 젠더 이분법이 훨씬 더 강력하고 물리적인 억압 체계로 작동하고 있으며,
→ 거기서 “수행을 통해 젠더를 해체하라”는 방식은 현실적으로 너무 느슨하고 비현실적이라는 지적이 따른다.
5. 급진성의 반작용: 정체성 정치의 해체?
버틀러는 정체성을 해체하지만, 일부 비판자들은 정체성을 해체함으로써 오히려 페미니즘의 정치적 힘이 약화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여성이라는 이름 아래 조직된 운동이 “여성도 구성된 허상이다”라는 주장 앞에서 근거를 잃는다면,
→ 누구의 권리를, 누구의 이름으로 주장할 것인가?
→ 이는 급진적 해체가 오히려 정치적 무력화로 귀결될 수 있다는 딜레마를 낳는다.
정리하면, 버틀러의 젠더 수행성은 젠더 이분법에 대한 급진적 전복 가능성을 열어주었지만, 동시에 신체의 물질성, 정체성의 정치적 기반, 현실 세계의 불평등 조건, 저항의 주체 형성 가능성에 대한 비판적 질문들을 불러일으킨 개념이다.
이와 같은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수행성 개념은 단지 이론의 차원에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 여기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묻는 급진적인 실천의 질문으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이론을 마주한 현실 속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첫째, 우리는 먼저 자신의 젠더 수행을 감각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내가 무심코 선택하는 옷차림, 말투, 몸의 움직임, 감정 표현 방식은 과연 나 자신으로부터 나온 것인가, 아니면 사회가 기대하고 규범화한 '여성다움'이나 '남성다움'을 무의식적으로 재현하고 있는 것인가? 이러한 자각은 젠더 수행성에 대한 첫 번째 실천이다. 매일 반복되는 행동의 틀에 스스로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
둘째, 기존의 젠더 규범을 그대로 따르기보다는 그 규범을 다르게 연기하고 변형해보는 실천이 필요하다. 이는 치마를 입지 말자는 말이 아니라, 치마를 입는 방식조차 새롭게 의미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여성적이라 여겨졌던 태도, 남성적이라 여겨졌던 언어를 비틀고 전복함으로써 우리는 기존의 틀을 흔들 수 있다. 젠더 수행은 단지 역할극이 아니라, 매일의 정치적 몸짓이 될 수 있다.
셋째, 우리는 새로운 젠더 감각을 공유할 수 있는 공동체를 구성해 나가야 한다. 젠더 이분법에 갇히지 않고, 다양한 젠더 정체성과 살아가는 방식들이 안전하게 발현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가는 일이 중요하다. 퀴어, 논바이너리, 트랜스, 젠더 비순응자 등 각자의 고유한 존재들이 존중받는 연대의 장은, 젠더 수행성의 가능성을 실질화하는 공간이 된다.
넷째, 우리는 질문하기를 멈추지 않아야 한다. “왜 여성은 감정을 숨겨야 하지?”, “왜 남자는 약해지면 안 되는 걸까?” 이러한 질문들은 단지 말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규범화된 젠더 체계를 흔드는 언어적 실천이 된다. 버틀러는 말하기 그 자체가 전복이라고 말한다. 그렇기에 우리의 질문은 작지만 중요한 정치적 행위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완벽한 젠더 수행자가 되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젠더 수행은 완전히 벗어나거나 단번에 전복할 수 있는 고정된 대상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 그 규범 속에서 살아가고 있고, 동시에 그 규범을 조금씩 바꾸고 재구성해나가는 존재다. 실수하거나 머뭇거리더라도, 중요한 것은 질문하고 실천하려는 태도 그 자체다.
결국, 우리는 “여자답게”, “남자답게”가 아니라, “나답게” 살아가기 위해 매일 조금씩 전복을 연습해야 한다. 우리의 말, 몸짓, 침묵, 질문 안에 다음 세계의 가능성이 담겨 있다. 젠더 수행성은 단지 철학이 아니라, 그 가능성을 열어젖히는 살아 있는 언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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