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사이드: 지식인, 타자의 자리에서 말하다
《에드워드 사이드: 지식인, 타자의 자리에서 말하다》
(이 글은 문학연구방법론 수업에서 교수님이 나눠주신 자료를 베이스로 확장한 것이다.)
1. 서론: 왜 지금 사이드인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식민지’라는 말이 역사 교과서 속 과거가 아니라, 여전히 문화와 권력의 심층 구조에 스며 있는 현실임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국가의 독립은 이루어졌지만, 자본과 이미지, 언어의 식민화는 끝나지 않았다. 이 지점에서 에드워드 사이드의 사유는 다시금 불려나올 수밖에 없다.
『오리엔탈리즘』(1978) 이후, 그는 단지 문학비평가나 정치활동가의 경계를 넘어, 문화 전체를 둘러싼 권력의 장치를 해부해 낸 지식인이었다. 사이드가 분석한 '타자의 재현'은 단순한 인식 문제가 아니라, 세계를 소유하고 질서 짓고자 했던 서구의 욕망의 발현이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는 왜 여전히 ‘동양적인 것’이라는 표현에 매혹되거나 거리감을 느끼는가? 왜 ‘비서구 세계’의 이미지가 여전히 서구의 시선에 의해 가공되고 소비되는가?
사이드의 질문은 결국, 글쓰기가 무엇을 재현하고 누구를 침묵시키는가에 대한 윤리적 반성으로 귀결된다. 타자를 말하는 자리에 서는 것은 언제나 위험하며, 동시에 불가피한 일이다. 그렇다면 비평가는 어떤 상상력으로 이 위험을 감당할 수 있을까? 지금, 사이드를 다시 읽는 것은 우리가 타자의 자리에 귀 기울이며 말할 수 있는 문장을 어떻게 구성할 수 있을지를 묻는 일이 된다.
2. 사이드의 생애와 지적 궤적
에드워드 사이드는 경계에 선 존재였다. 그는 1935년 예루살렘에서 팔레스타인계 기독교인 가정에서 태어났고, 유년 시절을 카이로와 예루살렘 사이에서 보냈다. 그의 정체성은 언제나 단일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미국 시민, 팔레스타인 혈통, 영어 사용자, 아랍어에 낯선 사람”이라 표현하며, ‘비정합성의 조건’ 속에서 사유하고 존재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이 혼종적 정체성은 훗날 그가 ‘망명자’와 ‘지식인’이라는 위치에서 타자를 말할 수밖에 없었던 내적 동력으로 작용한다.
사이드는 미국 프린스턴과 하버드에서 영문학을 공부하고, 이후 콜럼비아 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비교문학, 음악, 철학, 정치에 이르는 다방면의 비평적 개입을 시도했다. 그의 사유가 전환점을 맞은 것은 단연 『오리엔탈리즘』(1978)의 출간이었다. 이 책에서 그는 서구가 동양을 어떻게 ‘타자화’하고, ‘정복 가능한 대상’으로 재현해 왔는지 폭로하며, 문학·학문·정치가 어떻게 권력의 작동 방식에 복무해왔는지를 드러낸다. 사이드는 문학 작품 속 묘사나 학술 텍스트의 이론을 단지 분석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이 작동하는 권력의 장을 추적했다.
그러나 그의 영향력만큼이나 비판도 뒤따랐다. 일부 학자들은 『오리엔탈리즘』이 서구의 지식 체계를 지나치게 단일한 구조로 환원했다고 비판한다. 즉, ‘서구 vs 비서구’라는 이분법적 구도 속에, 동양 내부의 다양한 목소리와 권력 역학, 반식민 담론의 가능성이 지워졌다는 지적이다. 특히 동양 출신의 학자들 중 일부는 사이드가 오히려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오리엔탈리즘’을 구성했다고 비꼬았다. 또한, 사이드가 푸코의 담론 이론을 비판적 거리 없이 수용함으로써, 식민의 구조가 지나치게 언어적/담론적 차원으로 환원된다는 지적도 존재했다.
사이드는 이후 『문화와 제국주의』(1993)에서 이론을 확장하며, 단지 담론 비판을 넘어서 제국주의가 어떻게 일상의 감정 구조, 문학의 서사에까지 뿌리내려 있는지를 조명한다. 오스틴의 『맨스필드 파크』, 콘래드의 『암흑의 핵심』, 카뮈의 『이방인』 등을 읽는 그의 방식은 문학의 아름다움 속에 스며든 식민의 흔적을 드러내는 예리한 작업이었다.
동시에 그는 현실 정치에 깊숙이 관여한 지식인이기도 했다. 팔레스타인 문제에 지속적으로 발언해온 그는 1980년대부터 유엔 회의에 참여하고, 미국 내 아랍 디아스포라의 목소리를 대변했다. 2000년대 초, 그는 암 투병 중에도 『도전받는 오리엔탈리즘』을 통해 자신의 이론이 서구 내 비판자들에게 어떻게 소비되고 왜곡되었는지를 정면으로 응수했다. 사이드는 죽기 전까지도, 자신이 만들어낸 담론이 제도화되어 탈정치화되는 것을 경계했다.
그의 삶은 학문과 현실, 문학과 정치, 중심과 주변을 넘나드는 긴 여정이었다. 그는 늘 ‘이방인’으로 남기를 자처하며, 학문을 안전한 성역이 아닌 윤리적 응답의 현장으로 만들고자 했다. 그에게 글쓰기란 단지 사유의 방식이 아니라, 세계와의 관계 맺기 그 자체였다.
3. 『오리엔탈리즘』의 핵심 개념 정리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1978)은 하나의 이론서이자 동시에 서구 근대 지식 체계에 대한 급진적 해부였다. 그는 이 책에서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이라는 말을 단지 동양에 대한 연구나 관심을 뜻하는 중립적 학문 용어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서구가 ‘동양’이라는 타자를 구성하고, 재현하며, 통제하는 담론의 체계였다.
사이드가 말하는 오리엔탈리즘은 단순한 편견이나 무지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수백 년에 걸쳐 서구의 문학, 예술, 학문, 정치 제도 속에 구조화된 “지식과 권력의 연합체”였다. 그는 푸코의 담론 개념을 적극 수용하여, “말해지는 방식이 현실을 형성한다”는 전제 아래, 오리엔탈리즘이 단지 동양에 대한 인식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동양을 만들어낸 체계라고 주장했다. 즉, 오리엔탈리즘은 동양이라는 실재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동양적 타자’라는 표상을 생산하고 소비하며, 이를 통해 서구 자신을 규정하고 정당화하는 방식이었다.
사이드가 분석한 오리엔탈리즘의 전략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첫째, 고정화된 이미지. 오리엔탈리즘은 동양을 정적인, 전통적이고 신비한, 비이성적이며 감성적인 존재로 고정한다. 이는 서구의 진보성, 이성, 근대성에 대비되는 부정적 이미지이며, 타자를 경계 너머로 밀어내는 방식이다.
둘째, 대변 말하기의 권력. 오리엔탈리즘은 동양 스스로 말하게 하지 않고, 서구가 동양을 ‘해석’하고 ‘대변’한다. 말하는 자와 말해지는 자 사이의 권력 관계가 유지되며, 타자는 주체가 아닌 객체가 된다.
셋째, 정치적 실천으로서의 지식. 사이드에게 오리엔탈리즘은 결코 순수한 학문이 아니며, 제국주의와 식민정책의 이념적 기반을 제공하는 실천적 지식이다.
그는 『오리엔탈리즘』에서 괴테, 바이런, 휘고, 킹레이크, 지볼트, 거트루드 벨, 그리고 톰슨과 같은 인물들을 예로 들며, 문학이 어떻게 권력의 시선을 강화하고 재생산했는지를 면밀히 추적한다. 하지만 사이드는 단순히 서구를 악마화하거나, 모든 서구 담론을 동일하게 비판하지 않았다. 그는 서구 내부의 모순, 저항, 변증법적 긴장도 읽어내며, 오리엔탈리즘이라는 틀 안에서 벌어지는 권력의 균열 지점을 주목한다.
또한 그는 '타자에 대한 상상력'을 억압적 수단으로만 보지 않고, 새로운 관계 맺기의 가능성으로도 사유하고자 했다. 다시 말해, 그가 말하고자 한 것은 타자에 대한 “표상 그 자체를 금지하자”는 것이 아니라, 누가, 어떤 권력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말하는가를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리엔탈리즘』은 단지 하나의 비평 이론서가 아니라, 문학연구와 철학, 정치적 윤리를 아우르는 사유의 지형도를 제시했다. 이 책이 발표된 이후 문학 연구는 더 이상 '작품 내면의 의미'에만 머무르지 않고, 어떤 시선이 세계를 말하고, 침묵시키고, 구성하는가에 주목하는 전환을 겪게 되었다.
4. 비평가로서의 사이드: 문학과 정치의 접점 ( 『이방인』과 함께 읽는 제국의 침묵)
에드워드 사이드는 언제나 문학을 정치의 배후로 끌어들였다. 그러나 그의 방식은 단순히 문학을 정치적 메시지의 수단으로 환원하는 것이 아니라, 문학이라는 정교한 형식 속에 작동하는 이념의 무의식을 드러내는 일이었다. 그의 대표작 『문화와 제국주의』(1993)는 『오리엔탈리즘』의 이론을 확장해, 서구 문학 텍스트들이 제국주의적 시공간 안에서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추적한 작업이다. 그는 이 책에서 오스틴의 『맨스필드 파크』, 조지 엘리엇의 『로몰라』, 조셉 콘래드의 『암흑의 핵심』, 그리고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분석 대상으로 삼는다.
그중 『이방인』은 사이드의 비평이 갖는 윤리적 긴장감을 가장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는 이 소설이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를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알제리인의 실체적 삶과 목소리가 철저히 부재하다는 점에 주목한다. 이야기의 중심인물 뫼르소는 아무런 감정 없이 아랍인을 살해하지만, 법정에서는 살인의 윤리보다도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은” 뫼르소의 감정 구조가 더 큰 문제로 여겨진다. 사이드는 이 지점을 ‘식민 권력 안의 윤리적 전도’로 해석한다.
즉, 『이방인』에서 아랍인은 이름 없는 타자일 뿐이며, 주인공의 행위가 도덕적으로 평가받는 기준은 결코 ‘타자를 죽였는가’가 아니라 ‘서구적 감정과 윤리의 코드에서 벗어났는가’에 있다는 것이다. 사이드는 이를 통해 서구 문학이 식민지를 무대로 삼으면서도, 그 공간 안의 타자를 얼마나 철저히 침묵시키고, 지워왔는지를 폭로한다. 뫼르소의 무감각은 단지 실존적 허무가 아니라, 제국주의의 도덕적 마비를 은유한다고 사이드는 읽는다.
사이드의 비평이 특별한 것은, 그가 문학을 ‘제국의 아름다움’으로만 읽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문학이 아름답고 윤리적인 감동을 줄 수 있는 동시에, 침묵의 기술로서 타자를 배제하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는 이중성을 놓치지 않았다. 『이방인』의 문학적 성취는 결코 부정되지 않지만, 그 성취는 누군가의 부재, 말해지지 않음, 객체화된 타자의 희생 위에 구축된 것일 수 있다. 사이드는 독자에게 묻는다. “우리는 무엇에 감동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 감동은 누구의 침묵 위에 존재하는가?”
이렇듯 사이드의 문학비평은 단지 정치적 주장을 문학에 덧씌우는 것이 아니라, 문학 내부에 잠재된 정치의 윤리적 무게를 드러내는 작업이다. 그는 문학이 결코 ‘중립적인 공간’이 아니며, 오히려 세계를 재현하고 구성하며, 침묵을 선택하는 방식에서 가장 깊은 정치성을 드러낸다고 보았다.
5. 지식인의 역할: 말하는 타자에서 듣는 타자로
에드워드 사이드는 비평가이자 정치적 지식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결코 거대한 담론 위에서 지시하고 명령하는 ‘지도자형 지식인’을 자처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자신을 ‘이방인’, ‘망명자’, ‘경계에 선 자’로 정체화하며, 지식인의 윤리를 ‘말하는 자’에서 ‘듣는 자’로, 다시 응답하는 자로 전환하려 했다.
그의 저서 『지식인의 표상』에서 사이드는 지식인의 역할을 “특권적 진리의 전달자”가 아닌, 권력으로부터 거리를 유지하며 말하는 ‘아마추어’로 정의했다. 여기서 ‘아마추어’란 비전문가나 열정가를 뜻하는 말이 아니라, 체제에 내면화되지 않은 자, 순응하지 않는 자로서의 고유한 실천을 의미한다. 사이드는 지식인이 당대의 권력 구조, 제도, 언론, 학문 시스템에 함몰되는 순간, 그 역할이 오히려 타자의 침묵을 더 강화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그렇기에 그는 스스로를 ‘체제에 소속되지 않은 자’, 즉 망명자로서의 비평가로 남기 원했다.
사이드는 지식인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타자의 고통과 침묵 앞에서 대표(represent)하는 것이 아니라, 재현(represent)하는 방식 자체를 질문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목소리를 국제사회에 전달하고자 수없이 강연하고 기고했지만, 그 자신이 “팔레스타인을 대표하는 유일한 목소리”가 되는 것을 거부했다. 지식인의 말하기는 대리 발언이 아니라, 타자의 침묵에 대한 응답 가능성을 열어놓는 것에 가까웠다.
이 점에서 사이드는 ‘듣는 자로서의 말하기’라는 긴장된 위치에 선다. 말하되, 독점하지 않고, 해석하되 지배하지 않으며, 타자를 말할 수 있는 윤리적 감각을 끊임없이 의심하는 비평. 그것이 그가 제안한 지식인의 실천이었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문학 연구자나 작가에게도 중요한 질문을 남긴다. 우리는 언제 타자를 말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 말은 누구를 침묵시키고 있는가? 사이드는 우리가 쓰는 문장, 인용하는 이론, 감동받는 서사 속에, ‘누구의 부재’가 깃들어 있는지를 묻는다. 그것이 ‘세계와 관계 맺는 문학’이 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의 사유는 하나의 선언이라기보다, 글쓰기 자체를 다시 윤리적으로 구성하려는 물음에 가깝다. 사이드가 남긴 질문은 단순하다. “누가 말하는가?” 그러나 그 질문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순간, 어떤 글쓰기도 다시 시작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질문은 오늘의 한국 지식인에게도 유효하게 되돌아온다.
식민의 흔적과 분단, 민주화와 개발주의, 기술 자본의 폭주와 소수자의 침묵이 중첩된 이 땅에서, 지식인은 여전히 체제의 언어에 갇힐 위험과 마주하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지식인은 종종 거대한 담론의 이름으로 말하되, 현장의 목소리를 지워버리는 방식으로 권력을 수행해 왔다. 미디어, 정치, 출판, 학계의 중심에서 발화하는 말들이 오히려 주변을 더욱 침묵시키는 구조 속에서, 진정한 지식인의 역할은 다시 쓰여야 한다.
사이드의 말처럼, 지식인은 권력에 ‘협조하지 않는 언어’로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가장 침묵당한 자의 언어에 귀 기울이는 글쓰기, 그것은 ‘대신 말해주는’ 말이 아니라, 들을 준비가 된 문장으로 타자 앞에 자신을 여는 윤리적 작업이다. 한국의 지식인, 특히 언어의 상처를 감각할 줄 아는 문학적 존재라면 더욱 그렇다. 우리는 지금도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둘러싸여 있고, 그 침묵을 외면하지 않겠다는 태도야말로 가장 시급한 비평의 정치가 아닐까.
그리고 지금, 2025년, 내란 사태 이후의 한국. 이 나라는 한때 ‘광장’이라 불리던 공간을 잃어버렸고, ‘함께’라는 말이 의심의 언어가 되어버렸다. 정치가 혐오를 흡수하고, 진실이 경계선을 잃은 채 허공에 흩어지는 이 시기, 우리는 누가 침묵 당했는지를 다시 묻지 않으면 안 된다.
사이드라면 묻고 또 물었을 것이다.
“왜 그들은 지워졌는가?”
“왜 우리는 그들의 목소리를 너무 늦게 듣게 되었는가?”
그는 알고 있었다. 권력은 늘 “인간의 얼굴을 지우는 방식”으로 말한다는 것을.
오늘의 한국 사회도 예외는 아니다. 진실을 외치는 목소리는 선동으로, 애도의 몸짓은 혼란으로 간주된다. 침묵을 선택한 이들보다, 침묵하게 만든 구조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또다시 ‘정치적 안정’이라는 미명 아래 또 하나의 비극을 축적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이곳의 지식인이란, 화려한 담론이 아니라 작고 불완전한 말들을 지우지 않는 사람, 말해지지 않은 존재를 위해 자리를 비우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것은 어떤 선언도, 해답도 아니다. 다만, 더는 말하지 못하는 이를 위해, 끝내 듣고자 하는 글쓰기, 사이드가 말한 “망명자의 언어”를 잃지 않는 일이다. 그 언어는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지만, 모두를 향해 떨리는 언어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그 떨림 앞에 얼마나 정직할 수 있는가를, 우리 자신의 문장으로 증명해야 한다.
6. 사이드의 유산과 오늘의 과제: 비평이 ‘지금, 여기’에서 다시 시작되어야 한다면
에드워드 사이드가 남긴 가장 강력한 유산은 아마도 비평은 삶의 가장 깊은 윤리적 실천이라는 믿음일 것이다. 그는 이론가로서가 아니라, 시대와의 윤리적 긴장을 끝내 포기하지 않은 한 사람의 ‘목소리’로 남았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단지 말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누구를 향해, 무엇을 감당하며 말했는가로 인해 여전히 진동하고 있다.
그의 사유는 단순히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이론 틀에 머물지 않는다. 사이드가 남긴 질문들은 오늘날의 문화 콘텐츠, 학문 제도, 언론 보도, 그리고 문학 텍스트에 이르기까지 재현의 모든 장면에서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는 지금도 수많은 이야기 속에서 타자를 표상하고, 침묵시키며, 때로는 존재 자체를 삭제하는 방식으로 세계를 구성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사이드는 ‘한 시대의 비평가’가 아니라, 모든 시대에 질문을 남기는 사람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유산은 도전받고 있다. 비서구 세계 내부의 복잡성과 권력 구조, 젠더와 계급, 디지털 자본의 문화적 재식민화와 같은 새로운 문제들이 등장한 지금, 사이드의 틀은 더 정교하고 다층적인 분석을 요구받는다. 오늘날의 비평가는 ‘서구 대 비서구’라는 구도를 넘어서, 표상의 다중성, 관계의 비대칭성, 그리고 감응의 윤리에 대해 더 섬세한 언어를 찾아야 한다. 사이드의 이론을 계승한다는 것은 그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질문을 다시 던지는 방식으로 동시대를 통과하는 일이다.
그렇기에 지금의 우리, 특히 이 땅에서 언어로 살아가려는 이들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나는 누구의 자리를 대신 말하고 있는가?”
“내 문장은 누구의 목소리를 무대에서 밀어내고 있는가?”
“나는 그 침묵의 윤리를 감당할 수 있는가?”
비평은 학문의 활동이 아니라, 살아 있는 존재의 응답이다. 우리는 사이드의 책을 읽는 동시에, 자신의 문장을 다시 읽게 된다. 그는 이론을 남긴 것이 아니라, 문장을 쓰는 방식 자체를 뒤흔드는 사람이었다. 그의 유산은 이론서 속이 아니라, 우리가 쓰고 있는 지금 이 문장에서 살아 있다.
7. 결론: 사유의 국경을 넘는 비평: 누구의 자리를 대신하지 않고, 그 옆에 머무르는 글쓰기
에드워드 사이드는 사유의 국경에서 머무르기를 선택한 비평가였다. 그는 결코 중심에 서지 않았고, 이론의 이름으로 타자를 지배하지도 않았다. 대신 그는 늘 경계에 선 자, 말해지지 않는 존재 곁에 서려는 사람이었다. 이방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단지 정체성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윤리적 위치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겠다는 다짐이었다.
그의 글을 따라 걷는다는 것은 결국, 우리 자신의 글을 되묻는 일이 된다. 나는 지금 누구를 위해 쓰고 있는가? 나는 어떤 침묵을 감싸안고 있는가? 내 문장은 누구의 존재를 감추고 있는가? 그 질문을 끝내 감당할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문학이, 비평이, 철학이 현실과 관계를 맺는 방식에 다가설 수 있다.
지금, 우리는 다시 쓰는 문장마다 세계를 새롭게 재현하고 있다. 그 속에서 어떤 목소리가 들리고, 어떤 침묵이 울리는가. 사이드는 말한다. 말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누군가의 침묵 앞에 멈출 줄 아는 감각이라고. 그리고 바로 그 멈춤 속에서, 언어는 다시 시작된다.
지식인의 윤리란, 대신 말해주는 언어가 아니라 함께 침묵해 줄 수 있는 문장, 끝까지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유일 것이다. 지금, 우리가 다시 비평을 시작해야 한다면 그것은 세계를 정리하기 위함이 아니라 세계의 틈에 귀 기울이기 위한 시작이어야 한다.
나는 그렇게, 누구의 자리를 대신하지 않고 그 옆에 조용히 머무르는 문장을 쓰고 싶다. 그러나 이 소망 앞에서 나는 너무 자주 머뭇거리고, 무지함을 핑계 삼아 등을 돌리거나, 게으름을 창백한 침묵이라 오해하곤 한다. 매일 새벽, 문장 대신 침대에 더 오래 눕고 싶어질 때도 있다. 의심이 먼저 손을 뻗는 날에는 쓰는 일이, 마치 내가 감당할 수 없는 타인의 고백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늘도, 6월의 아침을 건넌다. 햇빛이 나뭇잎을 건드리며 쏟아지고,
묵은 커피향 사이로 아직 쓰이지 않은 문장이 떠오른다. 바람은 조용히 등을 밀고, 어디선가 고양이 울음 같은 문장 하나가, 나를 향해 들려온다.
나는 알고 있다. 이 글쓰기가 빠르지 않으리라는 것을. 누구보다 느리고, 더디고, 자주 멈추는 방식으로만 나는 겨우, 세계와 연결된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거북이처럼 쓰기로 한다. 작고 미약하지만, 결코 되돌아가지 않는 걸음으로. 비틀거리면서도, 결국은 도착하고야 마는, 그 문장의 자리로. 그 자리에 닿는 날까지, 나는 계속해서 머무르며 쓰는 존재이고 싶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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