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무엇을 예술이라 부르는가:글쓰기, 그 경계와 이유에 대하여
우리는 무엇을 예술이라 부르는가: 글쓰기, 그 경계와 이유에 대하여
이번 주를 끝으로 이번 학기 수강 과목들을 마무리하게 된다. 이번 학기는 18학점만을 이수하였으며, 모든 과목을 복수전공인 국문과 강의로만 구성하였다. 그 선택은 나에게 절실한 것이었고, 결과적으로 매우 밀도 높은 사유의 시간들이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이번 학기를 되돌아보면, 나의 내면이 얼마나 성장했는지 스스로 감탄하게 된다. 다양한 이론들을 접하고 탐색하는 가운데, 나만의 해석의 틀과 사유의 방식이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는 것을 느꼈다. 이론은 머물지 않았고, 문장으로, 시선으로, 감각으로 이어졌다. 그 속에서 나는 이전보다 더 분명하게 나의 길을 의식하게 되었고, 그 길이 조금은 더 반짝이기를 소망하게 되었다.
특히 영상문학 수업은 나에게 새로운 시야를 열어준 계기였다. 이전까지 나는 문학을 시와 소설 같은 인쇄된 언어로만 이해해 왔다. 그러나 이번 수업을 통해 '영상문학'이라는 개념을 처음 접하면서, 익숙한 장르였던 영상물들 속에서도 문학적 층위와 감정, 사유, 서사의 밀도를 읽어낼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게 되었다. 영상은 더 이상 오락의 대상이 아니라, 읽히고 해석되어야 할 하나의 텍스트임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동안 가볍게 소비하던 장면들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고, 일상적으로 즐겼던 영상들이 문학적 질문으로 확장되는 순간들을 경험하게 되었다.
오늘 이 글은 교수님께서 제시하신 질문,
“우리는 어떠한 기준으로 예술과 예술이 아닌 것을 구분하는가”
에 대한 나의 사유를 정리하는 작업이다. 동시에 한 학기 동안 수업을 통해 축적된 이론적 감각과 철학적 탐색을 스스로 정돈해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나아가 이 글은, 깊은 통찰과 날카로운 질문을 아낌없이 나누어주신 교수님의 노고에 대한 나의 조심스러운 답신이기도 하다.
교수님의 수업 자료 《9주차_영상문학과대중성》 에서는 예술을 정체성, 형식, 기능, 향유 계층 등 다양한 기준으로 분류하는 전통적 시도를 소개하면서, 결국 예술은 더 이상 분류할 수 없고, 분류할 필요도 없다고 말한다. 예술은 고정된 본질이 아니라, 시대의 미학, 자본의 구조, 감각의 변화 속에서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유동적인 장르이기 때문이다.
예술이란 “사물을 재현하거나 형식을 구축하거나 경험을 표현하는 의식적인 인간 행위”이며, 동시에 “재료, 기교, 양식 등을 통해 아름다움을 표현하려는 인간의 활동”이라는 사전적 정의도 제시된다. 그러나 오늘날 예술은 이러한 정의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바틴(Battin)은 “예술은 당대의 예술계가 예술로 인정하고 예술로 여기는 것이다”라고 하였고, 아서 단토는 브릴로 상자의 사례를 통해 예술이란 결국 ‘예술계의 승인과 해석의 맥락’ 안에서 성립된다고 주장하였다. 예술은 기술이 아니라, 해석의 자리에서 결정되는 것이다.
대중예술은 이 경계를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PDF 자료는 대중예술을 “대중성과 상업성을 지향하는 오락적인 예술”로 정의하며, 감정과 쾌락의 체험, 단선적 의미 구성, 통속성과 자극성 등의 특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대중예술이 저급하다는 이분법은 낡은 것이다. 나는 예술의 깊이는 형식이 아니라 누구에게 어떤 진동을 남기는가, 감각과 감응의 층위에서 판단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예술을 ‘정체’가 아니라 ‘운동’이고, ‘해답’이 아니라 ‘응시’라고 여긴다. 나는 예술을 ‘이름 붙일 수 없는 감각의 불꽃’이라 부른다. 그것은 언어로 완전히 포획되지 않으며, 논리로 조립되지 않는다. 예술은 내가 ‘쓴다’고 말할 수 없는 어떤 순간에 스스로 문장을 써지게 만들고, 내가 ‘보다’고 말할 수 없는 장면 앞에서 나를 응시하게 한다.
그래서 나는 예술을 분류하거나 정의하기보다, 예술을 통해 내가 어떻게 변화되는가, 무엇에 감응하고 어떤 질문에 멈춰 서게 되는가에 더 깊은 관심을 둔다. 그것이 나의 글쓰기이며, 나의 감각이며, 나의 응답이다.
나는 예술을 단지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묻는’ 행위라고 믿는다. 그렇다면 나에게 글쓰기는 무엇을 묻는가. 나는 왜 쓰는가.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세상에 없던 말을 창조하려는 야망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이미 잊힌 말들, 말해지지 못한 감각들, 누구의 언어로도 환원되지 않는 침묵을, 다시 불러오려는 시도 속에서 글을 쓴다. 쓰는 행위는 나에게 세상과 조응하는 방식이며, 말해지지 않은 고통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 위한 윤리적 자세다. 때로 나는 누군가의 부재를 기억하기 위해 쓰고, 어떤 얼굴을 다시 불러오기 위해 문장을 짓는다. 나에게 쓰기는 현실을 설명하는 언어가 아니라, 현실을 견디기 위한 몸짓이다. 무언가를 남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 무언가를 감각하고 있다는 증거로서 쓰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쓰는 이유를 완전히 알지 못해도 계속해서 써야 한다. 이해보다 응답이 먼저인 삶처럼, 나의 글 또한 그 알 수 없음 속에 계속되어야 한다. 그 ‘계속됨’ 속에서 나는 인간이 된다는 감각을 배운다. 글을 쓰는 것은 세상에 대한 나의 방식이며, 그것이 곧 나의 예술일지도 모르겠다.
참으로 아름다운 계절이다. 시간이 유난히 천천히 흐르는 듯한 6월 초의 공기 속에서, 나는 나를 둘러싼 것들에 새삼 감응하게 된다. 아침의 햇살은 창가에 길게 눕고, 커피를 내리는 손끝은 하루의 시작을 예고하듯 분주하지만 조용하다. 그 고요한 순간들 사이로 문득, 이 모든 것이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지 생각하게 된다.
함께 사유하고 웃고 이야기했던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들은 내게 지식을 넘어선 존재의 온기를 건네준 이들이며, 질문하는 삶의 태도를 나누어준 인연들이었다. 강의 중, 혹은 강의실 문을 나설 때, 나누었던 짧은 농담과 눈빛의 교감, 함께 본 영화와 그에 대한 이야기들, 그것들은 모두 문장이 되지 않아도 충분히 의미 있는 문장들이다. 또는 달디단 아이스크림을 나누어준 그 마음들!!!
나는 지금, 이 계절의 정중앙에서 내가 살아 있음을 느낀다. 생각하고, 배우고, 쓰고, 누군가의 말에 귀를 기울일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일상의 가장 은밀한 축복이자, 나라는 존재가 세상과 맺는 가장 아름다운 접촉면이다. 아마도 이 모든 감각과 인연은, 이름 붙일 수 없는 하나의 '축복'으로 내게 다가오는 중이다. 계절은 다시 지나가겠지만, 지금 이 순간, 나는 이토록 또렷한 삶의 감도 속에서 내가 걸어온 길을 응시하고, 걸어갈 길을 조용히 받아들이고 있다. 이 순간을 온전히 받아들이며, 나는 지금 여기를 산다. 그것은 어쩌면, 가장 문학적인 삶의 태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나는 또 하루를 시작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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