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에세이

🌿 《르상티망》

thetraveleroftheuniverse 2025. 5. 30. 05:15

 

 

 

🌿 《르상티망》

 

이 글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

복수전공 국문학 ‘영상문학론’ 수업. 16부작 드라마 《더 글로리》(2022)를 분석하던 중이었다. 교수님은 질문을 던졌다.

“더 글로리는 왜 전 세계 시청 공동체에 선택받았는가?”

그중 하나의 대답으로 등장한 구절이 있었다.

“공분을 유발하는 장치들: 재벌과 르상티망, 공권력의 가해, 신을 능욕하는 종교가 문동은의 복수에 명분을 부여한다.”

 

✍️ 📚 르상티망.

낯선 단어였다. 니체를 그렇게 읽었다고 자부해왔지만, 그 말 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었다. 얼굴이 붉어지고, 뒷덜미가 서늘해졌다. 나는 책장을 넘겼던 것이지, 사유의 골짜기를 건넌 것이 아니었다. 그 부끄러움이, 바로 이 글의 출발점이다.

 

르상티망은 프랑스어 ressentiment에서 유래된 말이다.

🎞️ 🧠 단순한 분노가 아니다. 말하지 못하고 삼켜낸 감정이, 오랜 시간 반복되고 응축되며 윤리나 정의의 언어로 바뀌는 것. 니체는 『도덕의 계보』에서 이 개념을 통해 ‘노예 도덕’의 기원을 설명한다. 강자는 자신을 긍정하며 ‘나는 선하다’고 말하지만, 약자는 강자에 대한 증오를 ‘악’이라 부르며, 그 반대편에 선 자신을 ‘선’으로 둔갑시킨다. 감정은 도덕이 되고, 억압은 이상이 된다. 이때 만들어진 윤리가 바로 르상티망의 윤리다.

 

그렇다면 《더 글로리》의 문동은은 어떠한가. 그녀는 분명 이 구조의 안쪽에 서 있는 인물이다. 폭력을 당하고도 바로 반응하지 못했던 시간, 눈물과 분노를 품은 채 고요히 살아낸 세월. 그 시간은 단지 피해자의 시간이 아니었다. 복수를 구상하고, 감정을 조율하며, 차가운 계산으로 고통을 직조해내는 과정이었다. 그녀의 복수는 단순한 응징이 아니라, ‘기억되기 위한 설계’였다. 🫀 😶

 

“내가 왜 복수를 하는지 알아? 18년 동안 너희가 나를 잊었더라. 그래서 하는 거야. 기억되려고.” <더 글로리> 16화 中

 

문동은은 말한다. 이 대사는 단순한 복수의 고백이 아니다. 존재가 지워진 자, 타자의 기억에서 밀려난 자가 던지는 절규다. 그녀는 잊히지 않기 위해 복수하고, 사라지지 않기 위해 고통을 연출한다. 이 순간, 복수는 감정의 배설이 아니라, 존재의 증명으로 바뀐다.

 

문동은은 감정에 파묻히지 않는다. 그녀는 분노를 정교한 서사로 변환시킨다. 즉각 반응하지 않고, 기다리고, 기획한다. 복수는 그녀에게 감정의 응답이 아니라, 세계에 보내는 윤리적 질문이 된다.

“나는 여전히 여기 있다. 나는 너희가 외면한 시간을 기억한다.” 🌫️ 🤫 🧩

이 말은 단지 피해자의 말이 아니다. 그것은 사라진 자의 언어이자, 존재의 철학이다.

 

문동은은 니체가 말한 ‘르상티망의 인간’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 감정을 자각하고 사유하는 인간이다. 그녀는 복수에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복수를 껴안고 질문하는 자다. 니체가 비판한 것은 르상티망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정당화하는 태도였다. 문동은은 그 감정에 대해 끝까지 생각하고, 고통스러워하고, 그것을 타자에게 도달하는 방식으로 만든다.

나는 생각한다. 문동은은 초인은 아니다. 그러나 초인을 향해 걷는 자다. 감정을 부인하지 않되, 그것을 초과하려는 자. 무너지는 자신을 끌어안고, 그것으로 타인에게 말을 거는 자.🌫️ 🗣

 

나는 나 자신의 르상티망을 떠올린다. 나는 할머니 만학도다. 어느 교실에 앉아 있든, 나는 끊임없이 나를 의식한다. 내가 너무 오래 말하고 있는 건 아닌지, 젊은 교수님께 불편을 드리는 건 아닌지, 같은 조의 학우들이 내 나이에 부담을 느끼는 건 아닌지. 내 존재가 그들의 학문적 리듬에 작은 균열이 되지는 않을까, 스스로를 점검한다. 🕯️ 🪞

 

글을 써 내려갈 때도 마찬가지다. 이 문장이 혹여 진심과 다르게 읽히지는 않을까. 내가 너무 잘난 척을 하진 않았을까. 말하지 말아야 할 것을 말하고 있는 건 아닐까. 나는 조심하고, 또 조심한다. 질문 하나, 발언 하나조차 삼키고 되삼키며, 끝내 말하지 않거나, 다 쓰고 나서 지워버리기 일쑤다.

 

그러면서도 나는 안다. 나는 참는 사람이라 믿어왔지만, 사실은 그 침묵을 끝까지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걸. 결국 말하고, 그리고 후회한다. 말을 하지 못해 후회하고, 말을 하고 나서도 후회한다. 그 사이에서 흔들린다. 어떤 내가 진짜 나일까. 나는 아직 그것을 모른다.

그러다 밤늦은 시간, 젊은 친구들이 서로를 향해 농담을 주고받는 모습을 떠올리면 그들 사이에 나도 자연스럽게 웃을 수 있었던 시절이 있었던가, 되묻게 된다. 그 외로움의 끝에서,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튀어나온다.

“나는 그냥 조용히 있을 걸 그랬나.”

 

나는 종종, 나라는 존재 전체가 관계의 민폐가 되지는 않을까, 두려워진다. 하지만 나는 그 감정을 감춘다. 어른스러운 얼굴로 미소 짓는다. 그 감정은 말이 되지 못한 채, 내 안에서 조용히 침전되고, 발효된다. 겸손이라는 이름으로, 또는 인내라는 미명으로. 나는 그것을 성숙이라 믿었지만, 지금에 와서야 안다.

 

그 감정이야말로 르상티망이었다. 나는 이해하지 못한 채 이해한 척했고, 끓어오르는 마음을 눌러가며, 그것을 정의라 착각했다.

르상티망. 🔍 🌿

그것은 내 사전에는 없었지만, 내 삶 속에는 오래도록 거주해 있었다.

 

당신은,

당신의 감정과 말들을 어디에 두고 살아가고 있는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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