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과 봉준호, 그리고 나의 관계맺기: 지금 여기, 스크린 너머의 철학》
《박찬욱과 봉준호, 그리고 나의 관계맺기: 지금 여기, 스크린 너머의 철학》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그동안 영화를 그저 ‘관객’으로만 감상해 왔다. 감정이 흔들릴 때면 스크린 속 누군가의 눈빛에 몰입했고, 가끔은 줄거리의 반전을 즐기며 친구들과 이야깃거리를 나눴을 뿐, 그 이면의 세계, 감독의 의도, 내러티브의 구성, 철학적 함의까지는 좀체 들여다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번 학기, 복수전공 국문과 수업 중 수강한 ‘영상문학’은 나에게 작은 전환점이었다. 철학이라는 학문이 늘 추상적인 고지대에서 나를 유혹해 왔다면, 영상문학은 마치 내 일상 깊숙이 들어와, 아주 구체적인 언어와 이미지로 말 걸어오는 듯했다. 그리고 그 속엔 내가 미처 몰랐던 심오한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건, 이 귀한 수업을 다음 학기에는 들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4년 내내 이런 수업을 들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다운 교수님께 직접 듣는 영상문학의 세계는 그야말로 '지금, 여기'를 사는 내게 철학 못지않은 사유의 길을 열어주었다.
이번 학기 내내 가장 깊이 다가온 지점은 ‘작가론’이었다. 드라마 작가 김은숙의 세계를 다시 바라보게 되었고, 늘 이름은 알고 있었지만 내 사유의 변두리에만 머물러 있던 박찬욱과 봉준호 감독의 세계를 ‘읽게’ 되는 귀한 시간이기도 했다.
그 경험이 너무도 멋져서인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려니, 좀처럼 잠이 오지 않는다. 뒤척이다가 결국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자, 잠깐.
이 밤에,
그동안 교수님께 배운 것을 바탕으로
내가 풀어보는 썰 한 자락!
<괴물을 응시하는 두 작가: 박찬욱과 봉준호>
박찬욱과 봉준호. 두 감독은 같은 시대를 살아가며 비슷한 한국 사회를 배경으로 삼지만, 그들이 응시하는 ‘괴물’은 전혀 다른 얼굴을 지니고 있다. 박찬욱의 괴물은 죄의식과 윤리적 파탄으로부터 생성되는 내면의 기형이고, 봉준호의 괴물은 체제와 구조적 폭력 속에서 태어난 외부의 괴리이자 불청객이다. 이 괴물들은 단순한 존재가 아니라, 세계를 비추는 거울이며, 존재를 파열시키는 타자이다.
<박찬욱: 복수의 윤리와 심미적 잔혹성>
박찬욱은 복수를 다룬다. 그러나 그의 복수는 결코 단죄의 쾌락이나 영웅 서사로 귀결되지 않는다.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 그리고 「박쥐」에 이르기까지 박찬욱은 인간이 복수라는 감정에 사로잡히는 과정을, 죄의식과 자기파괴로 확장시킨다. 그의 인물들은 복수를 수행하면서 괴물이 되고, 그 괴물됨 속에서 더 이상 인간이라 불릴 수 없는 어떤 윤리적 지옥에 도달한다.
레비나스의 말처럼, 인간은 타자의 고통 앞에 윤리적 존재가 된다. 그러나 박찬욱의 세계에선, 그 윤리가 철저히 무너진 뒤에야 고통의 윤리가 도래한다. 타자의 얼굴은 이미 훼손되었고, 응답은 너무 늦었다. 그 결과, 박찬욱의 복수는 결코 해방이나 카타르시스를 제공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타락한 윤리의 미장센 속에서 벌어지는 인간성의 파탄이다.
그의 영화는 시각적으로도 ‘윤리의 붕괴’를 표현한다. 미장센은 지나치게 아름답고 정교하며, 때로는 그 탐미가 폭력의 윤리를 삼켜버릴 듯 강렬하다. 외화내빈(外華內貧)이라는 평은 단순한 미학적 논평이 아니다. 그것은 ‘아름다움 속의 공허함’, 즉 인간 존재의 본질이 비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봉준호: 시스템의 해부자, 관계의 정치학자>
반면 봉준호는 시스템을 해부한다. 그의 인물들은 괴물로부터 시작하지 않는다. 오히려 체제 속에서 점차 '괴물화'된다. 「괴물」의 가족, 「설국열차」의 빈자들, 「기생충」의 반지하 사람들은 모두 구조적으로 배제된 존재들이다. 이들은 제도적 시선 속에서 이미 불완전한 타자가 되어 있으며, 영화는 그 배제의 정치학을 장르의 문법 안에서 해체한다.
푸코가 말한 것처럼, 현대 사회는 권력과 시선의 그물망 속에서 주체를 구성한다. 봉준호는 이러한 구조의 기제를 해부하면서, 인간이 어떻게 체제 속에서 비가시적인 타자로 전락하는지를 보여준다. 그의 리얼리즘은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사회적 윤리를 가시화하는 장치다.
또한 봉준호의 영화는 ‘관계’를 중요한 주제로 삼는다. 봉준호가 그리는 세계는 고립이 아니라 얽힘이다. 그 얽힘은 때로 갈등과 착취의 구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변화의 가능성을 잉태한 관계망이다. 그의 인물들은 파국을 맞으면서도 끈질기게 관계를 복원하려 애쓴다. 이 지점에서 봉준호는 철저한 리얼리스트이면서도, 여전히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윤리적 낙관주의자다.
<스타일의 교차점과 갈라지는 시선>
박찬욱은 내면으로부터의 붕괴를 조형적 탐미로 응시하며, 봉준호는 외부 구조로부터의 붕괴를 장르적 유희로 해부한다. 전자가 미학적 잔혹성이라면, 후자는 정치적 아이러니이다. 전자가 인간의 본성에 회의하는 염세적 철학자라면, 후자는 세계의 구조를 비판하면서도 변화 가능성을 놓지 않는 비판적 사회학자이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한 ‘되기(becoming)’ 개념은 두 감독을 나란히 놓고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틀이 된다. 박찬욱의 인물들은 윤리의 붕괴를 통해 ‘괴물되기’로 나아가며, 봉준호의 인물들은 체제의 압력 속에서 ‘타자되기’를 수행한다. 이 ‘되기’는 모두 고정된 인간 본질을 해체하고, 새로운 존재 조건을 묻는 시도다. 바로 이 지점에서 두 감독의 세계는 서로 교차하면서도 갈라진다.
<나의 사유로>
바로 그 점에서, 나는 오늘 이 새벽, 이 두 거장의 영화를 떠올리며 또 한 번, 사유의 깊은 호흡을 내쉰다. 이렇게 사유하는 것, 이토록 뒤늦게라도 그 세계와 만나는 것. 그것이 이번 학기, 내가 얻게 된 가장 크고 찬란한 '각성'이었다. 그리고, 문득 내 글쓰기에 대해 질문하게 된다. 나는 지금까지 무엇에 천착해 왔던가? 곰곰이 들여다보니, 뜻밖에도 ‘관계맺기’였다.
관계를 두려워하고, 되도록 혼자 있는 쪽을 택하던 내가, 왜 이토록 집요하게 인간 사이의 관계를 써왔을까. 그 모든 서사는 결국 누군가와의 얽힘, 타자와의 조우에 관한 것이었다. 나는 관계맺기에 서툰 사람이면서도, 글에서는 그것을 끊임없이 호출하고 있었다. 어찌 이럴 수가 있을까.
레비나스가 말한 ‘타자의 얼굴’처럼, 나에게 글쓰기는 관계의 부재를 자각하는 윤리적 행위였다. 타자를 향한 말걸기, 너무 늦은 응답, 서툰 악수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들뢰즈가 말한 것처럼, 관계는 고정된 구조가 아니라 끊임없이 생성되는 흐름이다. 나는 그 흐름 속에서 의미를 건져 올리고자 애써왔다.
나는 내가 써온 이야기들이 인간 그 자체라기보다, ‘인간들 사이’에서 생겨나는 사건, 감정, 균열, 그리고 잠정적인 화해였다는 것을 이제야 선명히 깨닫는다. 타인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고, 나 또한 온전히 이해받을 수 없다는 전제 아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깐의 연결을 꿈꾸는 방식으로 나는 계속해서 글을 써왔다.
아마도 철학은 그 관계의 불가능성과 가능성을 동시에 묻는 학문이고, 문학은 그 질문에 감각적으로 응답하는 장르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학기 영상문학 수업은 내게 가장 적확한 삶의 은유였다. 나는 작품 속 인물들의 얽힘을 따라가며, 동시에 나의 얽힘들을 되짚었다. 그리고 그때, 문득 이런 질문이 떠올랐다.
나는 누구에게 말하고 있었던 걸까.
곰곰이 들여다보니, 내가 써온 문장들은 결국 응답받지 못할지도 모르는 타자를 향한 부단한 말걸기였다. 아무리 간절히 써도, 타인은 결코 나의 내면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고, 나 또한 그들의 고통에 온전히 닿을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어쩌면 그것이 글쓰기의 윤리인지도 모른다. 불가능한 응답을 기다리는 태도, 그것을 포기하지 않는 끈질긴 말걸기.
그러나 말은 항상 불완전하다. 어떤 말은 너무 이르고, 어떤 말은 너무 늦으며, 때로는 말하지 않음이 더 많은 것을 전달한다. 나는 이제야 알게 되었다. 내 글의 일부는, 내가 끝내 쓰지 못한 문장들이었다는 것을. 침묵과 말 사이, 그 어정쩡한 간격에서 나는 나름의 관계를, 나름의 감정을 구축해왔고, 그 틈에서 타자를 마주하려 애써왔다.
그렇게 마주한 타자는, 늘 외부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종종 내 안에도 있었다. 내가 나조차 이해할 수 없었던 그때의 나, 말이 아닌 어떤 느낌으로만 존재했던 나의 조각들. 나는 글쓰기를 통해 타인을 바라보는 동시에, 나 자신이라는 타자를 응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하는 ‘되기(becoming)’는 고정된 자아나 타자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고 생성되는 존재의 흐름이다. 내 글도 그러했다. 나는 어떤 확정된 의미나 결론을 좇기보다, 관계의 긴장과 흔들림, 어긋남과 다시 이어짐의 리듬을 썼다. 완성되지 않은 상태로 존재하는 인물들, 결정되지 않은 채 흘러가는 감정들, 영원히 미완인 대화들, 그 안에서 나는 나를 발견했다.
이와 같이 나에게 글쓰기란 이해와 오해 사이의 공간에 기꺼이 머무는 일, 타자를 향한 끊임없는 질문이자, 그 질문 앞에 머무는 침묵의 윤리였다. 그 모든 과정이, 어쩌면 내가 배운 것들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관계맺기’였는지도 모른다. 나에게 글쓰기란 이해와 오해 사이의 공간에 기꺼이 머무는 일, 타자를 향한 끊임없는 질문이자, 그 질문 앞에 머무는 침묵의 윤리였다.
그 모든 과정이, 어쩌면 내가 배운 것들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관계맺기’였는지도 모른다. 지금, 이 조용한 새벽의 사유가 앞으로의 내 글, 내 삶, 내 선택 위에 어떤 색으로 번져들지 모른다는 설렘 속에서 나는 아직 쓰이지 않은 문장들을 향해, 천천히 손을 뻗는다. (끝)
#영상문학 #작가론 #박찬욱 #봉준호 #영화비평 #철학과영화 #관계맺기 #레비나스 #들뢰즈 #되기 #타자의윤리 #미장센 #사회구조비판 #복수서사 #괴물되기 #글쓰기란무엇인가 #문학적사유 #철학적글쓰기 #침묵의윤리 #응답불가능한타자 #국문과수업 #이다운교수님 #지금여기 #새벽의사유 #스크린너머 #내면탐색 #관계의철학 #윤리적응시 #미완의문장 #타자와나 #국립군산대학교 #군산대국문과 #군산대철학과 #lettersfromatravel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