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주의 단편소설 『최애의 아이』를 읽고서

이희주의 단편소설 『최애의 아이』를 읽고서
『최애의 아이』는 2025년 제16회 젊은 작가상 수상작(문학동네) 중 하나로, 나는 지금 국문과 현대소설 강독 수업의 일환으로 이 작품을 읽고 있다. 다음 주 우리는 이희주 작가의 이 단편을 두고 토론을 나눌 예정이며, 이 글은 그 사전 독서의 일환이자, 수업 속 깊은 대화를 위한 나의 내면적 응답이다.
1. 개요: 기획의도와 문제 제기
이희주의 단편소설 『최애의 아이』는 현대 사회에서 감정이 어떻게 소비되고, 여성이 그 감정의 중심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지를 예리하게 묘사하는 작품이다. 이 소설은 팬덤 문화 속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과잉된 감정의 흐름, 특히 여성 팬의 열광과 헌신, 그 끝에 도달하는 자기 소멸적 결정을 중심 서사로 삼는다. 주인공 우미는 자신이 가장 사랑한 아이돌 ‘유리’를 향한 절대적 감정의 주체가 되는 동시에, 그 감정을 구매하고 순환시키는 자본주의 시스템 안의 소비자이며, 더 나아가 유리를 '순수한 존재'로 창조해 낸 상상적 작가이기도 하다.
작품은 이러한 삼중적인 위치에 놓인 여성 인물의 내면을 따라가며, 모성적 헌신과 숭배적 사랑, 그리고 윤리적 경계를 넘어선 행위까지를 담담하면서도 날카롭게 포착한다. 우미의 결단은 단순히 극단적인 선택이라기보다는, 우리가 너무도 익숙하게 받아들이는 ‘사랑’이라는 감정이 얼마나 현실과 분리되어 신화화될 수 있는지를 되묻게 만드는 장치이다.
예컨대, 우미가 유리를 바라보며 "이게 유리의 대단한 점이야. 그렇게 밀도 높은 인생을 살았는데 아직 때를 덜 탔다는 거."라고 독백하는 장면은 그 핵심을 잘 보여준다. 이 말은 단순한 칭찬이 아니라, 유리를 현실의 인격체가 아닌 ‘때 묻지 않은’, 이상화된 존재로 보는 우미의 시선을 드러낸다. 이때 유리는 하나의 인간이 아니라, 우미가 스스로 창조한 사랑의 상징, 감정의 신화가 된다. 이처럼 작품은 한 여성이 감정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 또 그 감정에 휩쓸려 자기 존재의 경계를 허물어가는 과정을 통해, 감정과 윤리, 자본과 사랑 사이의 복잡한 역학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2. 줄거리 요약
평범한 직장인 우미는 인기 아이돌 '유리'에게 깊이 빠져 있다. 그 사랑은 단순한 팬심을 넘어서 신화적 헌신으로 변모하고, 결국 우미는 유리의 정자를 기증받아 아이를 갖기로 결심한다. 병원에서의 시술, 임신과 출산, 팬사인회에서의 대면,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벌어지는 극적인 전복까지, 『최애의 아이』는 사랑의 감정이 개인의 윤리를 어떻게 전복하는지 보여준다. 특히 "내가 원한 건 딱 하나라고. 유리의 아이를 갖는 것."이라는 문장은 작품 전체의 동력을 응축한 핵심 선언이라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시술 직전 우미가 "유리에게서 나온 거니까 전부 주고 싶다"고 생각하는 장면은, 그녀가 유리의 정자, 즉 사랑의 흔적이자 생명의 물질에 대해 품는 무조건적 헌신의 감정으로, 사랑의 환상이 자본화된 생식 기술과 충돌하는 지점을 극적으로 묘사한다. 다시 말해, 우미는 유리라는 존재와 자신의 몸을 접속시키는 이 유일한 수단을 전폭적으로 받아들이고, 이를 통해 감정의 소유를 완성하려 한다. 그러나 작품의 마지막에서 그녀는 자신이 낳은 아이가 유리의 아이가 아니라는 충격적인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사랑의 실재를 믿었던 그녀의 세계는 무너지고, 우미는 그 허위의 세계 앞에서 절망하거나 해체되지 않고 오히려 '기분이 나빴다'는 이유로 아이를 제거하는 폭력적 결정을 내린다.
이 결말은 사랑이라는 정념이 현실과 충돌할 때 얼마나 비윤리적이고 파괴적인 파국으로 귀결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며, 독자로 하여금 사랑의 본질과 윤리, 주체성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3. 인물 분석
1) 우미: 타자를 지운 사랑의 형식, 감정의 윤리를 창조하는 존재
『최애의 아이』의 우미는 감정의 소비자가 아니라 감정의 창조자다. 그녀는 사랑을 갈구하지 않고 설계한다. 타인의 감정을 기대하거나 반응하는 데 그치지 않고, 감정의 전체 구조를 스스로의 내면에서 구성해내는 주체이며, 그 구조를 끝까지 실현하려는 실천자이다. 그녀의 감정은 단순한 정념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구성하고 방향 짓는 자기 윤리의 형식이자 실존의 증명이다.
우미의 사랑은 유리라는 대상에게로 향하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를 통해 자신이 견딜 수 있는 감정의 구조를 완성하려는 충동에 가깝다. 이는 라캉이 말한 욕망의 대타자 구조, 즉 타인은 욕망의 '목표'가 아니라, 욕망을 구성하는 방식의 틀이라는 개념과 깊이 맞닿는다. 유리는 실재적 타인이 아니라, 우미가 감정의 서사를 투사하고 회수하는 스크린, 감정의 기호로 작동한다. 그녀는 유리를 “때가 묻지 않은 존재”로 상상하며, 현실에서 발생할 수밖에 없는 결핍과 상호성을 회피하고 자기 완결적 감정의 신화를 유지하려 한다.
이 사랑은 곧 통제의 감정으로 이어진다. 우미가 “주는 건 내가 할게. 내가 널 지켜줄게.”라고 말하는 장면은 단지 헌신의 태도가 아니라, 사랑의 주도권을 쥐려는 자기 선언이다. 감정은 주는 자의 손에 있을 때만 순수하며, 그녀는 그것을 철저히 자신의 방식으로 실현하고자 한다. 이 통제욕은 마침내 모성의 형식으로 구체화된다. 그녀는 유리의 정자일 것이라 믿으며 정자은행에서 아이를 갖고, 그 아이를 유리를 지키는 사랑의 결정체로 삼는다. 하지만 아이가 유리의 아이가 아님이 밝혀지는 순간, 우미의 감정 구조는 기호와 환상의 덫 위에 세워진 허상이었음이 폭로된다.
이 지점에서 메를로퐁티의 지각 이론은 우미의 감정 구조를 더 깊이 들여다볼 수 있게 해준다. 감정은 세계를 인식하고 구성하는 방식이며, 타자를 ‘있는 그대로’ 느끼는 지각의 차원이다. 그러나 우미는 타자를 지각하지 않는다. 그녀는 유리를 감정의 내면적 이미지로 재구성하고, 아이조차 실제 생명이 아니라 사랑의 완성을 위한 상징물로 감각한다. 그녀의 감정은 결국 타자 없는 감정, 자기 내면의 심연을 응시하는 폐쇄적 지각의 구조로 작동한다. 사랑이 관계가 아닌 고립의 형식으로, 응답이 아닌 자기 응시에 머무를 때, 감정은 윤리가 아니라 자기애적 파국으로 치닫는다.
우미는 자기 자신을 “30대 여자의 냉정한 판단력”으로 설명하지만, 그녀의 내면은 “유리 최고!”라고 외치며 벽을 치는 감정의 폭발에 의해 지배된다. 그녀의 감정은 이성을 넘어서고, 감정이 윤리를 대신한다. 특히 다음의 구절은 그녀가 세우고자 한 감정 윤리의 핵심을 드러낸다.
“사랑이란 끝까지 지켜보는 일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사랑은 옆에 있는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떠나지 않고, 그냥 곁에 있어주는 것.”
이 문장은 감정의 윤리를 타자와의 상호 교환이나 응답으로 정의하지 않고, 존재의 지속성과 헌신의 무조건성으로 환원한다. 그러나 이 ‘곁에 있음’은 타자의 주체성을 존중하며 머무는 것이 아니라, 타자를 나의 감정 구조 안에 고정시켜놓으려는 일방적 고립의 형식이 된다. 감정은 윤리를 구성하지만, 그 윤리는 오직 자신만의 규칙으로 작동하며 타자의 실재적 고통과 존재를 지우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여기서 『최애의 아이』는 감정 정치학의 문제로 확장된다. 우미는 사회가 규정한 감정의 규범, 즉 “사랑은 응답받아야 한다”, “모성은 헌신적이고 보호적이어야 한다”, “감정은 현실에 기초해야 한다”는 정상성의 질서를 정면으로 거부한다. 그녀의 감정은 사회적 상식으로부터 이탈한 감정, 즉 ‘비정상’의 범주에 속하고, 그 감정은 결국 사회적으로 제거되거나 조롱받는다. 그러나 우미는 그런 규범을 따르지 않고, 감정이 허락되지 않은 형식으로 사랑을 수행한다. 그녀는 단순히 사회로부터 벗어난 자가 아니라, 사회가 허용하지 않는 감정의 정치적 주체다.
우미는 결국 욕망의 환상을 실현하려다 실패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 실패는 꾸며낸 것이 아니라, 끝까지 감당하고 실현하려 했던 감정의 진정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녀는 타자를 진짜로 사랑한 것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감정 자체를 살아내려 했다. 사랑을 통해 윤리를 무너뜨린 인물이 아니라, 감정을 통해 새로운 윤리적 가능성을 실험한 인물이었다. 그 실험은 허상이었고, 실패했지만, 그 실패 안에는 우리가 감히 살아보지 못한 감정의 진실성, 존재를 가로지르는 어떤 뜨겁고 위험한 감정의 윤리가 깃들어 있다.
2) 유리: 투사의 스크린이자 신격화된 감정의 기호
『최애의 아이』 속 유리는 표면적으로는 아이돌 가수, 연예인이라는 실존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이야기 속에서 그는 현실의 구체성과 실체를 잃어버리고, 점차 우미의 감정이 투사되는 상징적 스크린, 신격화된 이미지, 그리고 존재론적 이상화의 대상으로 변모해간다. 유리는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한 적도, 우미를 인식하거나 응답한 적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소설 내내 우미의 감정 서사를 중심으로 회전하는 상징적 중심축이 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유리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로 사랑스럽게 여겨지는 존재로 자리한다는 점이다. 우미는 말한다.
“유리는 그냥 거기 있는데 사랑스러운 거야.”
이 문장은 유리가 어떤 행위를 했기 때문에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가 사랑의 조건으로 기능함을 보여준다. 이는 바로 우미의 감정 구조가 외부 대상의 실재성과 무관하게 구성된다는 증거이며, 유리는 그 구조 속에서 현실을 지운 감정의 기호, 거울 같은 타자, 즉 ‘거기에 있지만, 실제로는 없는 존재’가 된다. 라캉의 이론을 빌리자면, 유리는 ‘욕망의 대상(a)’로서 기능한다. 그는 결코 충족되지 않는 결핍의 기호이며, 우미는 그를 통해 자신의 감정 구조를 안정시키고, 욕망을 지속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욕망의 대상은 언제나 상징계의 외부에 위치한 실재(the Real)이기에, 그 자체로 파국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 유리는 완벽한 기호로 이상화되지만, 동시에 그 어떤 실제적 접촉도 불가능한 인물이기 때문에, 우미의 감정은 언젠가 반드시 무너질 수밖에 없는 감정의 구조물 위에 서 있는 것이다.
우미는 초반에는 유리를 ‘천사’, ‘빛’, ‘때 묻지 않은 존재’로 표현하며, 그를 철저히 세속으로부터 격리된 감정적 유토피아의 중심으로 위치시킨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그녀의 내면에는 감정의 이상화와 현실의 균열 사이에 틈이 생기기 시작한다. 그 상징적 틈을 드러내는 문장이 다음과 같다.
“그 애의 나르시시즘이 납득됐다.”
이 짧은 문장은 우미의 시선이 유리를 처음으로 ‘인간’의 위치로 끌어내리는 순간이다. 이전까지 유리는 감정의 완전한 신화 속에 있었지만, 이 문장을 통해 그는 욕망하는 존재, 즉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포장하는 누군가로 현실화된다. 이 변화는 미세하지만 결정적이다. 이것은 우미의 감정 서사 내부에 처음으로 세속성과 타자의 주체성이 삽입되는 틈이며, 동시에 그녀의 감정 세계가 점차 허상의 붕괴를 예고하는 서사적 단서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미는 이 균열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녀는 유리를 다시 감정의 절대성으로 회귀시키고, 그를 지키기 위한 극단적 실천으로 나아간다. 바로 그 맥락에서 유리의 아이를 낳겠다는 감정적 윤리가 탄생한다.
그러나 끝내 유리는 그 아이의 생물학적 아버지가 아니며, 그 사실이 밝혀지는 순간, 유리는 더 이상 감정의 구조를 지탱할 수 있는 기호가 되지 못한다. 그럼에도 소설은 유리를 타자로 회복시키지 않는다. 유리는 끝까지 우미의 감정에 의해 구성된 기호로 남는다. 즉, 유리는 실체를 가진 인물이 아니라, 감정의 가능성과 환상의 붕괴를 동시에 내포한 ‘사랑의 구조’ 그 자체이다. 그는 인격적 타자가 아니라, 우미의 내면이 끊임없이 대화를 시도했지만, 실제로는 응답하지 않는 거울이다. 이로써 유리는 단순히 ‘사랑받는 아이돌’이 아니라, 사랑이 어떻게 구조화되는지를 드러내는 장치, 감정의 허구성과 진정성, 그리고 감정의 정치가 어떤 신화를 통해 개인의 욕망을 정당화하는지를 비추는 반사면이 된다.
3) 은정: 감정의 경계에 서 있는 타자
이희주의 단편소설 『최애의 아이』에서 은정은 주인공 우미의 친구이자, 작품 전반을 통틀어 우미의 감정과 윤리를 가장 가까이에서 바라보는 인물이다. 그녀는 이 소설에서 감정의 주체가 되기보다는, 감정을 관찰하고 응시하는 자의 위치에 서 있으며, 독자와 가장 가까운 정서적 거리에 놓인 ‘우리의 대리자’로 기능한다. 우미가 점차 자신만의 감정 신화에 몰입해 현실로부터 멀어질수록, 은정은 그녀를 염려하고, 이해하려 애쓰며, 설득하려 하지만, 끝내 우미의 세계로 들어가지 못한다. 이로써 은정은 감정의 파국을 멈추지 못하는 타자, 그리고 말하지 않고 바라보는 윤리의 지점으로 남는다.
우미는 유리를 향한 감정을 통해 자기 존재를 증명하고자 했고, 그 감정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절대적인 형식으로 굳어져 갔다. 사랑은 더 이상 상호적 관계가 아닌 일방적 숭배가 되었고, 우미는 그 감정을 극단까지 밀어붙이기 위해 모성이라는 형식을 도입한다. 아이를 낳음으로써 유리를 자신의 삶 속에 구현하려 한 것이다. 반면 은정은 이 과정을 끝까지 곁에서 지켜보는 인물이지만, 감정의 그 깊은 함정에 함께 빠지지는 않는다.
작품 중반부, 은정이 우미의 방을 떠올리는 장면은 그녀의 위치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은정은 우미의 방에 붙은 유리의 브로마이드를 떠올렸다.
우미가 그 안에 손을 집어넣어 다른 차원에 있던 유리를 끄집어내는 장면을 상상했다.”
이 장면은 우미가 현실 속 유리를 자신의 감정 세계로 소환하려는 상상을 암시하며, 감정과 현실의 경계가 희미해져 가는 전환점을 포착한다. 그러나 주체는 우미가 아니라 은정이다. 즉, 은정은 이 상상을 직접 하는 것이 아니라 우미가 그렇게 하는 것을 상상하는 인물이다. 이것은 그녀가 우미의 감정을 직면하면서도, 그 신화 속으로 결코 들어가지 못하고 멈춰 있는 위치에 있음을 드러낸다. 감정의 내면이 아니라 감정의 바깥에서 바라보는 시선, 그것이 바로 은정의 자리다.
우미가 점점 은정을 밀어내는 장면들도 중요하다. 문자를 씹고, 전화를 받지 않으며, 현실의 관계를 하나씩 끊어가는 우미의 행동은 단지 고립의 과정이 아니라, 현실의 윤리를 거부하고 감정의 자기 논리로 돌입하겠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정은 끝까지 우미 곁에 남는다. 더 이상 개입할 수는 없어도, 지켜보고, 기억하고, 말할 수 있는 자로.
작품의 말미에 이르면, 은정은 결정적인 사실을 전하게 된다.
우미가 낳은 아이가 유리의 아이가 아니라는 것, 즉 정자은행에서 기증받은 무명의 정자로 태어난 아이라는 사실을 독자에게 알려주는 이는 바로 은정이다. 이 장면은 단순한 서사의 반전이 아니다.
이 사실은 우미가 감정적으로 구축해온 신화를 무너뜨리는 현실의 결정적 목소리다. 즉, 은정은 서사의 끝에 가서야 우미의 사랑이 환상 위에 세워진 허상이었음을 밝혀주는 윤리적 증언자로서 기능하게 된다. 그녀는 감정을 해석하지 않고 과장하지도 않지만, 사실을 말하는 것 자체로 감정의 구조를 흔든다.
이처럼 은정은 감정의 극단에 서지 않지만, 그것을 방관하지도 않는다. 그녀는 타인의 감정을 무시하거나 조롱하지 않으며, 함께 무너지지 않는 방식으로 끝까지 감정 곁에 머무는 인물이다. 그리하여 그녀는 타인의 고통을 공감하면서도, 그 감정을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는 감정의 윤리를 구현한다.
내 생각으로 은정은 우리 독자의 시선에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는 인물이다. 우미를 이해할 수 없으면서도 외면하지 못하는 우리의 마음, 그 불편함과 거리, 그리고 조심스러운 공감의 태도를 은정은 문학적으로 대변한다. 우미가 감정의 절벽 아래로 떨어졌을 때, 은정은 그 절벽 위에 남아 그것을 바라보는 자였다. 그녀는 감정을 실천하지는 않았지만, 그 감정을 끝까지 응시하고 기억함으로써, 이 작품 안에서 윤리와 감정 사이의 가장 섬세한 균형점을 만들어낸다.
4) 우미와 유리: 감정의 생성자와 감정의 기호
우미와 유리는 겉으로는 '팬과 스타'의 관계처럼 보이지만, 본질적으로는 감정 구조의 창조자와 기호 간의 비대칭적 관계다. 우미는 유리를 통해 자신의 감정을 조직하고, 존재의 윤리를 증명하려는 인물이며, 유리는 그 감정 구조 위에 투사된 순수성과 숭배의 기호, 즉 실재하지 않지만 있어야만 하는 존재, 라캉적 용어로 말하면 le petit a(작은 대상 a)이다. 우미는 유리를 사랑하지만, 유리 그 자체를 본 적은 없다. 그녀는 유리를 ‘때 묻지 않은 존재’, ‘그냥 거기 있기만 해도 사랑스러운 존재’로 고정시키며, 그가 인간으로서 가질 수 있는 욕망, 세속성, 실수마저 허용하지 않는다. 유리는 인간이라기보다는, 우미가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현실과 윤리를 대신 감내해 줄 수 있는 감정의 스크린이다. 반면 유리는 단 한 번도 우미에게 응답하지 않는다. 그는 서사 내내 침묵하는 기호로 존재하며, 우미의 감정적 실천(모성의 수행, 아이의 출산, 파국적 결단)에 윤리적 개입이나 감정적 상호작용을 하지 않는다. 그의 무응답은 단지 무관심이 아니라, 감정 구조에서 타자가 응답하지 않을 때 생기는 윤리적 공백, 혹은 감정의 자기 완결성이 만들어낸 자기애의 파국을 상징한다.
요약하자면, 우미는 감정의 생성자이며, 유리는 감정이 완성되기 위해 필요한 존재하지 않는 중심(non-subject)이다. 그들은 결코 만날 수 없는 평행선이며, 그 비대칭성 안에서 우미의 감정은 끝없이 순환하다 자기 붕괴로 귀결된다.
5) 유리와 은정: 무응답의 대상과 윤리적 타자
유리와 은정은 서로 직접적인 관계를 맺지 않지만, 우미의 감정 구조 안에서 정반대의 기능을 수행한다. 이 둘은 각각 응답하지 않는 대상(유리)과 끝까지 응시하는 타자(은정)라는 감정 윤리의 대조축을 이룬다. 유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말하지 않는다. 그는 감정의 객체이자 투사의 표면으로만 존재하며, 우미의 감정이 어떤 형태로 변하든 침묵 속에서 신화화된다. 그의 침묵은 우미에게 ‘절대적인 사랑’을 가능하게 하지만, 그 절대성은 결국 현실의 상호작용을 거부하는 닫힌 감정의 구조로 이어진다. 유리는 타인이면서도 결코 타자성을 가지지 않는 기호이다.
반면 은정은 끊임없이 우미에게 말을 건다. 그녀는 걱정하고 설득하며, 우미가 현실의 경계 너머로 넘어가지 않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녀는 끝내 우미의 감정 구조 안으로 진입하지 못한다. 그녀는 감정을 실천하지 않지만, 끝까지 타자의 고통과 위험을 응시하는 윤리적 타자로 남는다. 특히 마지막에, 아이가 유리의 아이가 아니라는 진실을 드러내는 인물이 은정이라는 점은 상징적이다. 그녀는 감정의 신화를 해체하는 현실의 윤리적 목소리이자, 감정 정치학에서 말하는 ‘정상성의 감정 윤리’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이처럼 유리는 우미의 감정 구조가 끝까지 숭배하려 했던 대상이지만, 은정은 그 감정 구조의 위험을 끝까지 증언하고 기억하는 존재다. 이 둘은 우미의 감정이 타자와 어떻게 만나지 못했는지를 가장 명확하게 드러내는 대조적 축이다.
정리: 우미를 중심으로 한 감정 구조의 삼각 구성
우미 → 유리 : 감정의 이상화, 환상의 중심, 무응답의 기호
우미 → 은정 : 감정의 실패, 현실의 윤리, 타자와의 단절
유리 ↔ 은정 : 타자성의 부재 vs. 타자성의 윤리
이 구도는 감정이 어떻게 현실을 지우고 자기 내면을 신격화하는 방향으로 작동하는지, 그리고 그 감정이 윤리적 한계를 넘었을 때, 타자는 어떤 방식으로 배제되거나 저항하는지를 문학적으로 드러낸다.
이처럼 『최애의 아이』는 단지 팬심과 사랑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감정의 구조가 어떻게 윤리를 구성하고, 동시에 해체하는가에 대한 탁월한 실험이자 윤리적 우화다.
4. 상징 분석
1) 정자:
생명의 씨앗이자, 자본화된 유전자. 유리의 정자는 '소유할 수 없는 존재를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방식'으로 우미에게 주어진다. "도네이터 분 성함은 박유리님 맞으실까요?"라고 묻는 간호사의 질문은 그 상징적 허구성을 강화한다.
2) 사인과 앨범:
실물보다 더 중요한 '증거물'이자, 감정의 접점. "왜 여기다 한 걸까, 속상하게."라는 말은 감정의 환유물이 된 물건이 지닌 의미를 드러낸다. 우미는 유리의 사인이 그의 얼굴 한복판에 덮였다는 이유로 "유리의 피부를 벗겨내지 못할 복제품"이라며 안타까워한다.
3) 2세:
이름이기 이전에 기호이며 서사의 증거. 단순히 생명이 아니라, 우미의 감정적 서사를 후속시킬 상징적 계승자이다. "2세가 아닌 이세라는 이름을 갖게 된 아이에게 소리 내어 말을 걸고 대화하게 됐다."는 문장에서 감정의 실재화가 일어난다.
5. 주제 분석
이 작품은 여러 복합적인 주제를 병렬적으로 다룬다.
1) 사랑과 소유: 우미는 유리를 '소유'하지 않으면서도, 그 아이를 통해 '존재론적 연계'를 구축한다. 이는 육체적 관계 없이 완성된 연애의 형태이자, 윤리적 모성의 실험이다. "사랑을 받는 것보다 하는 게 좋아서 계속 줬다. 어느 날엔 내가 이 사랑을 접는 게 죄가 되겠구나."라는 문장에서 그녀의 일방적 감정이 얼마나 헌신적인지를 볼 수 있다.
상품화된 감정과 인간: 아이돌 산업과 생식 기술이 만나는 지점에서, 감정은 자본과 섞인다. 정자는 상품이 되고, "얼마만큼의 수익을 얻는 걸까. 요리액에서 나온 거니까 전부 주고 싶다."라는 말은 소비와 사랑의 경계 붕괴를 드러낸다.
2) 여성 주체의 자기 결정권:
우미는 타자의 시선과 제도적 한계를 뚫고, 자기 욕망을 실현하는 여성이다. 병원 실장이 묻는다: "어쩌다 이런 결심을 하게 되신 걸까요?" 이에 우미는 답한다. "유리의 아이를 원하니까요." 그 말에는 계산도, 해명도 없다. 단순하고 확고한 욕망만이 있을 뿐이다. 아이 출산 이후에도 그녀는 흔들림 없이 "이 아이는 내 아기야"라고 선언하며, 윤리적 주체로 자신을 재정의한다.
한편, 서른을 넘긴 친구들 중 셋이 월 200만 간신히 넘기며 살아가는 장면은 단지 하소연이 아니다. “쌓아봤자 물경력. 도시 빈민의 기로에 산 여자들”이라는 표현은, 체제 안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구조적으로 불가능한지를 절규하는 사회적 발화이다. 이 앓는 소리는 단지 현실의 푸념이 아니라, 생애 계획 자체가 무너진 시대적 증언이며, 우미가 택한 사랑과 출산의 방식은 그러한 조건 속에서 감정의 윤리를 대안적으로 실현하려는 파격적 시도였다.
또한, 우미의 젠더 감각과 자기 인식은 작품의 다른 장면에서도 선명히 드러난다. 그녀는 “남자 앞에 서는 걸 두려워했던 순간이 여자로 평가하는 눈빛과 마주치면 등골이 오싹해져 움츠리고 다녔던 자신의 20대가 생각나 슬퍼졌다”고 회상하며, 젊은 시절 내내 사회적 응시 속에서 자신을 억압당한 존재로 기억한다. 그러한 억압에 대한 반발로 “미소년을 사랑하게 된 건지도 모른다”고 자인하면서도, 그로 인해 “높은 미적 기준이 거꾸로 자기 자신을 슬프게 했다”고 고백한다. 사회적으로 내면화된 외모지상주의는 그녀가 스스로를 사랑할 기회를 빼앗았고, “그 기회는 앞으로 오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은 깊은 자기 상실감을 드러낸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미는 “이렇게 비참한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아이를 가졌다는 건 얼마나 행운인가. 다른 누구도 아닌 유리의 아이를”이라고 말하며 자기 존재를 다시 긍정한다. 이는 감정적 구원으로서의 모성, 그리고 자기혐오를 극복하려는 감정적 실천으로 읽을 수 있다.
더 나아가, 작품 후반부 팬사인회 장면은 우미의 감정적 실천이 외부로부터 ‘인정’받는 결정적 순간을 보여준다. 유리로부터 “누나 오늘 와줘서 고마워요!”라는 인사를 받는 장면은, 우미가 처음으로 ‘받는 사랑’을 경험하게 되는 계기다. 이는 그녀가 감정의 일방적 제공자에서 벗어나, 감정적 주체로서 존재의 정당성을 확인받는 장면이다. “이걸로 나 평생치 사랑을 받았어. 받는 것도 눈부시게 좋다는 걸 알았어.”라는 내면의 고백은, 우미가 자기 존재를 스스로 축복하는 순간이며, 사랑이란 ‘주는 것’만이 아니라 존중받는 감정의 상호성이라는 깨달음을 통해 완성된다.
이 장면은 사랑이 사회적 규범으로부터 비정상적으로 여겨졌던 감정(“미친 여자”)을 스스로 복권하는 장면이기도 하며, 억압당했던 감정이 정당화되는 해방의 순간이기도 하다. 눈물은 단지 감정의 표현이 아니라, 사회가 금지해 온 감정에 대한 적극적인 수용, 그리고 감정 주체로서의 자기 인정을 상징한다. 이처럼 『최애의 아이』는 우미의 감정적 실천을 통해, 주체적 사랑과 자기 회복의 윤리학을 끝까지 밀어붙인다.
3) 성별 위계와 감정의 자기검열:
“물론 인간 대 인간이 아닌 남자와 여자로 접근하면 좀 달랐다.” 이 문장은 이성애적 성별 관계 안에서 작동하는 위계와 불균형을 드러낸다. 팬과 아이돌이라는 관계는 기본적으로 일방향적이지만, 이성이 개입되는 순간 우미는 자기를 여성으로 의식하며 '패배할 것'이라는 두려움에 빠진다. 이는 감정의 자기 검열이 어떻게 젠더 구조에 의해 작동하는지를 드러내며, 여성 주체가 타자의 시선 앞에서 욕망을 말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상징한다.
‘미친 여자’로 보일까 두려운 자기검열:
“정말 운이 좋아서 최애가 다를 여자로 봐준다 해도 그건 미친 여자가 되는 지름길이었을 것이다.” 이 문장은 여성 팬이 남성 아이돌을 연애 대상으로 바라보는 일이 사회적으로 조롱받고 비정상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문화적 분위기를 드러낸다. 우미는 그 시선을 내면화하고 있으며, 사랑의 감정조차 사회적 규범에 의해 철저히 억눌러야 한다는 자기 검열의 실천을 보여준다.
4) ‘미개봉 중고’라는 자기인식:
“이게 참 나이 덕으로 해야 할까? 세월이 우미를 미개봉 중고로 만들어준 탓에 용기 낼 수 있었다.”라는 자조는, 자신의 성적 가치가 세월과 함께 상품처럼 평가된다는 사회적 규범을 냉소적으로 받아들이면서도, 그 안에서 자신을 보호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이는 나이, 결혼 여부, 성적 경험 유무 등으로 여성을 평가하는 문화에 대한 반감이자, 그 안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어적 명명이다.
5) 모성적 정당화의 장치:
이는 “어쨌든 아이에게 아빠 얼굴 한 번은 보여줄 필요도 있었다.”는 말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 문장은 우미가 팬사인회에 참석한 이유를 모성이라는 가치로 치환하며 자신의 감정적 욕망을 정당화하는 장면이다. '엄마'로서의 역할은 사회적으로 승인받기 때문에, 우미는 '여성 팬'으로서가 아닌 '예비 엄마'로서 자신의 선택을 변호한다. 이 장치는 감정과 욕망이 승인받기 위해 어떤 정체성의 전략을 동원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우미가 팬사인회에서 정체불명의 남성을 '남편'이라고 소개하는 장면은 단순한 거짓말이 아니다. 그것은 그녀가 감정의 파국을 막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복합적인 심리적·사회적 장치다. 우미는 유리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안다. 그녀가 품은 사랑은 사회적으로는 비정상적이거나 조롱의 대상이 되기 쉬운 감정이기 때문에, ‘결혼한 임신부’라는 설정은 그녀 자신을 ‘정상적인 여성’으로 포장하려는 시도이자, 타인의 의심을 피하려는 사회적 방어막이다.
이 장면은 또한 팬으로서의 위치를 넘어 ‘평범한 인간’으로 다가가려는 우미의 감정 전략을 보여준다. 유리를 만나 ‘아빠의 얼굴’을 아이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의지는 진심이지만, 그 진심을 직접 고백하기에는 감당할 수 없는 두려움이 따른다. 따라서 ‘남편’이라는 가짜 설정은 감정의 무게중심을 분산시키는 장치이며, 우미가 현실에서 감정이 폭주하지 않기 위해 고안한 ‘각본’이기도 하다.
감정의 위협을 모성이라는 사회적으로 승인된 가치로 무마하는 방식은, 우미가 자신의 선택과 감정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복잡한 자기 연기를 수행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는 그녀의 사랑이 단지 개인적인 일탈이 아니라, 사회적 억압과 규범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감정적 생존 전략’임을 시사한다.
6) 감정과 현실의 충돌
더 나아가 팬사인회 이후의 장면에서, 감정의 고조와 현실의 온도 차는 우미의 내면에서 또 다른 균열을 일으킨다. “자리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섞여 우미는 오늘의 순간을 천천히 복귀하며 펜스 밖으로 나갔다. 남자가 다가와 부축하듯 가볍게 팔짱을 꼈다.” 이때 우미는 ‘정상적인 외부 세계’로 복귀하는 순간을 맞이한다. 그러나 곧 이어지는 장면에서 “우미는 지갑을 꺼내 현금을 건네며 생각했다. 분명 멀쩡한 남자로 넣어 달라고 했는데 멀쩡함의 기준이 다른가”라는 말은 그녀가 감정의 극적 정점 이후, 현실의 평범함 혹은 어설픔에 대해 느끼는 실망감과 분노를 드러낸다. 이는 감정의 몰입 상태에서 벗어난 순간, 감정의 진폭이 더욱 증폭되어 반작용으로 표출되는 심리 구조를 반영한다.
“조심히 가세요. 배부른 여자의 배너에 남자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물러났다. 찜찜한 표정으로 돌아서는 뒤통수를 노려보며 우미는 속으로 욕했다. 내가 널 왜 태워주냐. 개새끼. 인생 편하게 살려고 하네.”
이 장면은 사랑의 절정에서 일상으로 복귀한 우미가 느끼는 불일치와 이질감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감정의 고양이 끝났을 때 마주한 현실은 너무 덧없고 불완전하다. 그녀의 분노는 단순한 대행 서비스에 대한 불만이 아니라, 자신이 설계한 사랑의 서사에 맞지 않는 요소에 대한 거부감이다. 이는 자기 감정의 시나리오를 철저히 통제하려는 우미의 내면 욕망, 그리고 현실과 감정 사이의 틈을 견딜 수 없어 하는 감정적 파열로 읽힌다.
그리고 그날 밤, “임산부가 된 이래, 아니 태어난 이래 젊고 꾸민 남자들에게 제일 관심 받고 대접받는 하루였다.”는 문장은 우미가 ‘여성으로서의 자기 존재’가 사회적으로 어떠한 방식으로 승인되고 지각되는지를 냉정히 반추하는 대목이다. “물론 성적 긴장감이 제거된 대접이었지만, 그게 어디냐. 내가 그냥 여자였으면 그러지 못했을 거야.”라고 고백하는 장면은, 우미가 여전히 사회의 성적 시선으로부터 도망치면서도, 동시에 그 시선에서 파생되는 ‘존재감’을 필요로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유리로부터 받은 사인을 보며 “왜 여기다 한 걸까. 속상하게.”라고 중얼거리며, 사진 위에 그어진 유성펜 자국을 매만지는 행위는, 그녀가 그토록 동경한 사랑의 실체가 결국은 복제품 위에 남겨진 흔적임을 깨닫는 순간이다. “그래도 유리의 얼굴이다. 이 한 장마저 아끼고 싶다. 언젠가 쓰레기가 되더라도 내 손이 닿는 동안만은 귀하게 여기고 싶다.”는 말은, 우미의 사랑이 얼마나 일방적이고 환상적인 동시에, 현실의 더러움 속에서도 유일하게 자신을 지탱해준 감정적 ‘기념비’였는지를 웅변한다.
또한, 우미가 출산 이후 아이와의 일상 속에서 마주한 변화는 중요한 내면의 전환점으로 기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전환은 완결이 아닌 진행 중인 균열의 일부이며, 작품 말미에 드러나는 우미의 극단적 선택은 그 전환이 궁극적으로 실패했음을 암시한다. “공부는 다치지 않고 세계를 넓히는 가장 쉬운 방법이었고, 우미는 알에서 갓 깨어난 새처럼 눈에 보이는 걸 다 쪼아 먹었다.”는 문장은 그녀가 새롭게 마주한 현실을 지식과 감정의 감응으로 채워나가는 방식을 잘 보여준다. 맘카페를 들락거리며 “이 여자 진짜 미친 여자네”라며 서로를 판단하고 불안을 공유하는 커뮤니티 속에서 우미는 “황제처럼 높은 자리에서 떨어져 다 바보 같다 그치”라고 생각하며, 일종의 탈속적 시선을 견지한다. 그러나 “자식 위한다고 하지만 결국 다 자기 만족을 하려는 여자들뿐이었다”고 평하는 태도는 우미 자신이 감정의 윤리를 ‘주는 것’으로 구성하며, 기존의 모성 내러티브에 반기를 들고 있음을 시사한다. 결국 “넌 나의 구원 투시가 될 필요가 없어. 받으려는 자식을 낳는 사람도 있지만 난 아냐. 주는 건 내가 할게. 내가 널 지켜줄게.”라는 선언은, 아이에게 기대지 않고 자신이 주체가 되어 사랑하겠다는 의지이며, 이는 타자에 대한 지배나 보상을 전제하지 않는, 감정의 자기 완결적 실천으로 읽힌다.
7) 모성 본능 신화에 대한 위장된 수용과 내면의 기만
“내 아기야. 응, 내 아기야.”라는 우미의 단호한 말은, 정자 바꿔치기라는 충격적인 진실이 드러난 직후의 장면이라는 점에서 더욱 의미심장하다. 은정은 이 말을 듣고 안심한다. “울고불고 난리를 피울 줄 알았는데 진짜 엄마가 되었구나.” 그녀는 ‘배 아파 낳으면 모성이 생긴다’는 오래된 신화를 다시 받아들이며, 우미가 마침내 엄마가 되었다고 믿는다. “그게 누구의 어떻게 만들어진 아일지라도 근원적으로 자식은 엄마일 것이다.”라는 서술은, 사회가 여성에게 기대하는 감정적 역할을 그대로 반영한다.
그러나 독자는 안다. 이 수용은 위장된 것이다. 우미는 실제로 감정을 수습한 것이 아니라, 마지막 방어로서 ‘정상적인 모성’의 연기를 택했을 뿐이다. 이 장면은 모성 신화가 얼마나 위태로운 허상 위에 구축된 것인지, 그리고 그 신화에 잠시라도 기대려는 사람들(예: 은정)이 결국 얼마나 안이하게 낙관하는지를 드러낸다.
우미의 단호함은 감정의 안정이 아니라, 파국 직전의 억제였으며, 결과적으로 이어지는 행동—아이를 제거하는 폭력적 선택—은 이 ‘기만적 모성’의 환상이 완전히 붕괴되었음을 뜻한다. 이 장면은 모성이 본능이 아니라 사회적 각본이며, 감정의 진실을 위장하는 언어일 수 있음을 강렬하게 증언한다.
8) 결말 분석: 감정의 파국과 모성 신화의 붕괴
작품의 결말은 우미가 아이를 직접적으로 파괴하는 충격적인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이는 단순한 모성의 실패가 아니라, 자신이 믿었던 감정의 윤리마저 무너진 상태에서 벌어지는 절망의 선택이다. 아이의 생명이 유리의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우미에게 '사랑의 증거'가 결여되었음을 의미한다. “내가 원한 건 딱 하나라고. 유리의 아이를 갖는 것. 끝.”이라는 핵심 문장이 무력화되는 순간, 그녀의 세계는 무너진다.
이때 우미가 아이를 바라보며 느낀 감정은 "그냥 기분이 나빴던 거다", "너희들이 시키는 대로 내가 할 것 같아"라는 냉소적인 내면 독백으로 드러난다. 이는 우미가 체제가 요구하는 '모성적 여성상'에 끝내 저항하고, 감정적 파국을 행위로 전환한 순간이다. 작품은 이 장면을 통해 모성은 본능이 아니라, 통제된 각본이며, 그 각본이 깨질 때 얼마나 잔혹하고 비윤리적인 폭력이 터질 수 있는지를 드러낸다.
우미의 행동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것이지만, 그 근거에는 그녀가 살아온 사회, 성별 위계, 감정의 왜곡, 환상이 상품화된 문화가 깔려 있다. 즉, 이 작품은 우미를 단죄하기보다는 그녀가 '그럴 수밖에 없게 된' 정서적 구조와 사회적 조건을 응시하게 한다. 그 점에서 『최애의 아이』는 단순한 여성 서사나 팬픽의 확장물이 아니라, 사랑, 모성, 욕망이라는 감정의 정치학을 전면적으로 해부하는 작품으로 기능한다.
6. 윤리의 가능성과 감정 서사의 한계
『최애의 아이』는 감정의 심연을 끝까지 응시하려는 야심 찬 시도다. 우미라는 인물은 감정을 살아낸다. 그것도 이 세계가 쉽게 이해하거나 수용하지 못할 방식으로. 그녀는 감정을 갈망하지 않고 창조하며, 그 감정을 윤리의 수준까지 끌어올리고자 한다. 그러나 이 작품이 정말로 윤리의 가능성을 열어 보였는지, 아니면 감정이라는 이름으로 윤리를 삼켜버린 것은 아닌지, 우리는 비판적으로 물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이 작품에서 타자는 침묵한다. 유리는 단지 우미의 감정을 투사하는 스크린일 뿐이며, 아이는 말할 수 없는 존재로 사라진다. 은정조차 끝까지 감정의 내부로 들어가지 못한 채, 윤리적 경계 밖에 머문다. 감정을 조직하는 주체는 있지만, 그 감정에 응답하는 타자가 없다. 이 지점에서 『최애의 아이』는 감정의 윤리를 말하지만, 사실상 그것은 타자 없는 감정의 독백으로 수렴된다.
더 나아가, 작품은 우미의 극단적 선택을 일종의 감정적 결연으로, 또는 감정의 진정성으로 암시하는 듯한 위험을 감수한다. ‘모성을 통해 사랑을 완성하려는 감정’은 생명을 지우는 선택으로 이어지고, 작품은 이 과정을 마치 감정의 불가피한 귀결처럼 그린다. 이것은 윤리를 감정의 극단으로 환원해버리는 서사적 장치이며, 정서적 고조가 도리어 현실적 상상력의 윤리적 긴장을 무디게 만든다. 파국이 곧 진정성이라는 착시는 문학이 종종 경계해야 할 감정의 정치이기도 하다.
또한 감정의 반복성은 문제적이다. 우미의 감정은 서사 중반 이후부터 동일한 구조 속에서 반복되고 심화되지만, 그 감정이 세계와 충돌하거나 변형되는 과정을 충분히 보여주지 않는다. 감정은 내부적으로 고조되지만, 외부 세계와의 대화 속에서 어떤 갱신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는 감정의 폐쇄성을 드러내는 동시에, 서사 자체의 정서적 피로감을 유발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결핍은 모성의 현실성에 대한 상상력이다. 이 작품은 모성을 감정 윤리의 정점에 놓지만, 임신과 출산, 양육에 대한 구체적 서사는 거의 생략되며, 아이는 감정의 도구로서 기능하고 곧 사라진다. 이로 인해 모성은 존재론적 층위에서 사유되지 못하고, 단지 감정의 은유로만 작동한다. 모성은 여기서도 또 한 번 신화가 되고, 여성의 몸과 실천은 기표의 뒷면으로 밀려난다.
이처럼 『최애의 아이』는 감정의 윤리를 끝까지 밀어붙이지만, 그 윤리는 타자에 의해 검증되지 않으며, 세계와의 상호작용 속에서 성숙되지 않는다. 윤리의 가능성이 감정의 서사 속에서 실험되기는 하지만, 그것은 타자를 지운 채 자기만의 세계 속에서만 완결되는 폐쇄적 구조로 머물러 있다. 감정은 뜨겁지만, 윤리는 말이 없다. 이 불균형이 바로 이 작품의 가장 심오한 매혹이자, 동시에 비판의 지점이기도 하다.
7. 맺음말: 윤리적 전복과 감정의 진정성
이희주의 『최애의 아이』는 감정의 근원을 윤리와 충돌시키며, 독자로 하여금 끊임없이 묻게 만든다. 우리는 무엇을 사랑하고, 왜 사랑하는가? 그리고 그 사랑을 실천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미의 선택은 사회적으로는 분명 비정상이며 파괴적인 행위로 보인다. 그러나 그녀의 내면에는 무언가 절절하게 진실한 감정, 혹은 자기 파괴적일 만큼 결연한 생명 윤리가 들어 있다. 그녀는 감정의 논리를 끝까지 밀어붙이며,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모든 것을 감당하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너무도 쉽게 받아들이는 '모성'이나 '헌신'의 관념은 낱낱이 전복되며, 오히려 감정의 가장 비논리적인 지점에서 현실의 가장 날카로운 진실이 드러난다.
나는 우미를 끝내 온전한 정신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의 선택은 너무도 충격적이었고, 윤리의 한계를 가볍게 넘어섰다. 하지만 그 ‘이해할 수 없음’은 곧 나의 사유가 시작되는 자리였다. 나는 멈추었고, 그 멈춤 안에서 묻기 시작했다. 그녀는 왜 그렇게까지 갔을까? 어떤 현실이 그녀를 그 벼랑 끝까지 몰아세웠을까?
우미는 스스로의 존재를 유지하기 위한 방식으로 ‘유리를 향한 사랑’이라는 절대적 감정을 택했다. 그 감정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밀도 높게 그녀의 정체성을 잠식했고, 결국 더는 확장할 수 없게 되었을 때, 그녀는 모성이라는 또 다른 신화를 구축한다. 아이를 품음으로써, 유리를 지키는 감정의 새로운 형식을 완성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내 아기야”라는 그녀의 선언 앞에서 나는 숨이 멎는 듯한 먹먹함을 느꼈다. 그것은 돌봄이 아니라, 감정의 잔혹한 자기 완결이었다. 그녀는 아이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사랑의 구조 속에 배치된 ‘증명’의 도구로 아이를 소환했다. 그리고 나는,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과연 그를 있는 그대로 바라본 적이 있었던가? 그 사람은 어쩌면 내 욕망의 투영물에 불과했던 것은 아닐까? 나는 나의 결핍을 메우기 위해 타인을 호출하고, 내 감정의 서사를 완성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래서 나는 부끄러움을 느끼며 이렇게 고백하게 된다. 미안해요. 당신에게 나의 욕망을 투영했어요. 나의 한계를 느끼면서도 극복할 수 없는 나 자신이 싫지만, 그래도 더 노력해 보려고요. 당신을 있는 그대로, 당신 자체로 사랑할 수 있는 그날이 올 때까지. 이 고백은 단지 후회가 아니라, 윤리적 사랑에 대한 다짐이다.
사랑은 본래부터 파국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 우리는 타인을 향한다고 믿지만, 그 감정은 종종 나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장치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욕망의 그림자를 감각하며, 타자의 고통과 침묵을 응시할 수 있는 존재다.
우미는 그 경계에서 무너졌지만, 나는 아직 그 경계에 서 있다. 완전한 사랑은 없지만, 나는 그 경계 위에서 사랑을 다시 생각하고, 욕망을 숨기지 않되, 그것이 타인을 지우는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도록 감각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최애의 아이』는 나로 하여금 사랑이라는 감정을 가장 근본적인 물음으로 다시 부르게 했다.사랑이란 무엇인가? 나는 누구를, 왜, 어떻게 사랑해 왔는가? 나는 이 질문을 붙잡고 살아가고자 한다. 그리고 그 물음 안에 머무르기 위해, 오늘도 나 자신을 다시 쓴다. (끝)
#이희주작가 #최애의 아이 #문학동네 #2025제16회젊은작가상수상작품집 #현대소설강독 #유보선교수님 #감정윤리 #타자성의결여 #비판적독해 #감정정치학 #모성신화 #감정의폐쇄성 #문학과윤리 #감정의파국 #비정상성의서사 #서사적비판 #사랑과폭력 #여성성과감정 #윤리적거리두기 #문학비평 #현대소설론 #국립군산대학교 #군산대국문과 #군산대철학과 #lettersfromatravel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