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싹 속았수다』의 ‘타인의 마음에 닿는다는 것에 대하여’
『폭싹 속았수다』의 ‘타인의 마음에 닿는다는 것에 대하여’
최근 방영된 넷플릭스 드라마, 8부작 『폭싹 속았수다』는 국내외에서 잔잔한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제주도 특유의 정서와 언어, 그리고 관계의 결을 정직하게 담아낸 이 드라마는 해외 시청자들에게도 "이해는 다 못해도 마음은 이상하게 따뜻해진다"는 반응을 끌어냈다. 섬이라는 공간이 품은 고요함과, 말보다 마음이 앞서는 사람들의 태도가 언어 너머의 공감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주변 사람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 진짜 울었다고, 대사 하나하나가 시라고. 제주가 아니라 기억 속 어딘가로 돌아가는 느낌이었다고. 그 말들이 다정했고 설득력도 있었다. 나는 재생 버튼을 눌렀다. 내 일상과는 멀어 보이는 섬의 이야기, 오래전 청춘의 기록이 펼쳐졌다. 드라마 제목부터 낯설고 정겨웠다. '폭싹 속았수다'는 제주어로 '완전히 속았다'는 뜻이라 했다. 그 말의 따뜻하고 구수한 울림이 먼저 다가왔다.
그러나 그들의 감동은 조용히 닿아오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멀어졌다. 5회를 넘기며 집중력은 흐려졌고, 감정은 느슨해졌다. 인물들의 말과 표정은 마음을 지나치듯 스쳐 갔다. 왜 재미가 없을까. 왜 이 서사에 나는 끌리지 않는 걸까. 의심이 생겼고 자책도 따랐다. 감정에 인색한 내가 이상한가. 감동하는 대중과 공명하지 못하는 내가 문제인가. 좋은 글을 쓰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 있는 건 아닐까.
그럼에도 남는 것이 있었다. 애순이나 관식의 로맨스가 아니었다. 주변의 어른들, 곁에 머무는 이들의 조용한 손길이 남았다. 잠녀로 살아가는 이모들, 애순이 몰래 월세 석 달을 내주고 떠나는 염병철의 새 아내 나민옥. 아무 말도 없이 행해진 배려였다. 애순이 그 사실을 알게 되는 건 한참 뒤였다. 말보다 마음이 먼저였고, 사랑보다 살림이 앞섰다. 애순이 셋방을 얻어 살던 노부부는 쌀을 덜어 주었다. 대가를 바라지 않았다. 말없이 나눈 마음이었다.
나는 그 시대를 알지 못하지만, 사람들의 몸에 밴 정서의 방식이 궁금했다. 말하지 않아도 알던 거리감, 바라는 것 없이 내어주던 손길. 그 장면들 앞에서 문득, 돌아가신 아버지가 떠올랐다. 마을의 벙어리 아저씨를 자신이 다니던 공장에 취직시켜 먹고 살게 하던 사람. 이웃들에게 일자리를 알선하며 늘 괜찮다고 말하던 얼굴. 그런 마음이 어쩌면 내 안 어딘가, 유전자의 결 속에 숨어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동시에, 그런 마음을 나는 끝까지 지켜낼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도 들었다. 그 시절 사람들은 말없이 나눴고, 아버지는 그렇게 살아냈다. 나는 글로 그 마음을 기록하면서도, 정작 내 일상에서는 너무 많은 것들을 망설이고 미루는 사람이 아닐까. 조용한 배려보다 차가운 정확함을 선택하는 쪽에 더 가까운 건 아닌지. 부끄러움이 스쳤다.
드라마에서 가장 시 같았던 것은 대사가 아니라, 그들의 몸짓이었다. 말없이 건넨 쌀, 내준 월세, 덜어준 노동. 그 마음의 무늬가 오래 남았다. 나는 이야기에서 언제나 관계의 결에 먼저 반응했다. 오가는 눈빛, 머뭇거리는 손끝, 무심한 말투에 숨은 마음. 완성도 높은 작품에서도 감정을 흔드는 것은 대사가 아니라 거리감이었다. 문장보다 숨결, 플롯보다 방향. 사람과 사람이 나란히 걷는 찰나가 더 오래 남았다. 『폭싹 속았수다』가 내게 남긴 것도 결국, 그런 관계의 냄새였다. 말로 설명되지 않는 정, 이야기보다 깊게 스며든 온기였다.
그리고 제주의 풍경. 그곳의 화면은 이야기보다 먼저 나를 붙잡았다. 감귤나무 흔드는 바람, 안개 낀 바다, 햇살 내리는 돌담. 화면은 말을 아꼈고, 풍경은 말 대신 마음을 흔들었다. 그곳의 시간은 느리게 흘렀고, 침묵은 비어 있지 않았다. 말보다 풍경이 먼저 감정을 이끌어냈고, 그 감정은 설명이 아니라 공기의 밀도로 기억되었다.
그래서 이제는 알 것 같다. 나는 기승전결보다 마음의 이동을 기억하는 사람이다. 문장의 미학보다 문장 너머의 떨림을 좇는 사람이다. 느리게 반응하지만, 한 번 닿은 감정을 오래 품는 사람이다.
이 드라마는 내게 분명 조용히 속삭이고 있었다. 나는 다만, 조금 늦게, 아주 작게 그것을 들었을 뿐이다. 앞으로 나는 인간들 사이의 오욕칠정을 다루더라도, 끝내 지켜지는 관계의 따뜻함에 더 집중해 글을 쓸 것이다. 내 무의식의 원형 속에서 가장 또렷한 색깔이 바로 그것임을, 이 드라마를 통해 다시 확인했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마음에 폭싹 들어가진 못하더라도, 그 마음 근처까지는 닿고 싶은 마음으로, 조용히 쓸 것이다.
지금 이 글을 마무리하는 아침. 5월 초여름의 햇살이 창가에 부드럽게 번진다. 바람이 커튼을 살짝 흔들고, 아파트 마당에서는 조근조근한 생활 소음이 흘러든다. 빨래를 너는 소리, 플라스틱 뚜껑이 닫히는 소리, 어린아이의 투정 섞인 말투. 그 사이를 가르며 작은 새들이 지저귄다. 나는 그 소리들을 듣기 위해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된다. 어느새 나는, 그 소리들에 저절로 마음이 닿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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