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에세이

내가 파시시스트라고요?

thetraveleroftheuniverse 2025. 5. 18. 18:53

 

 

 

내가 파시시스트라고요?

 

오늘은 월명호수공원 주변을 천천히 산책했다. 부드러운 바람이 호숫물을 만지듯 지나가고, 그 잔물결 위로 햇살이 부서지듯 퍼졌다. 성긴 눈송이처럼 흩날리는 꽃가루는 물 위에 조용히 내려앉았고, 아카시아 향은 바람을 따라 흐르다 나의 코끝을 건드렸다. 이름 모를 산새들의 울음이 숲 너머로 퍼지며 공기 속에 가느다란 떨림을 남겼고, 그 순간 나는 마치 계절의 한 구절 속을 걷고 있는 듯한 기분에 잠겼다. 주말 오전의 한가로움 속에서 내 발길은 점점 느긋해졌고, 삶의 축복이 온 천지에 내려앉은 듯한 충만함이 가슴 깊숙이 번져왔다. 나는 꽃들에게 하나하나 인사라도 하듯 발걸음을 멈춰 사진을 찍고, 바람의 결을 따라 시선을 옮기며 봄을 만끽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계절의 한가운데에서 내 마음은 조금 무거웠다. 산책 전, 나에게 어떤 화두가 던져졌기 때문이다.

 

김은샘도 파시시스트 아닌가요? 아니 저도 파시시스트이고요. 선생님도 파시시스트죠. 우린 파시시스트에게 교육을 받고, 집단 무의식과 사회 이데올로기에 젖어 파시시스트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잖아요. 그렇다면, 우린 이 운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엇부터 해야 할까요?”

 

그 질문은 한편으로는 도발적이었고, 또 한편으로는 너무도 절실했다. 나는 정말 파시시스트일까? 나는 그런 존재인가? 산책 내내 그 물음을 품고 걸었다. 꽃들이 나를 내려다보는 듯했고, 물 위를 스쳐 가는 바람이 나의 사유를 대신 이어주는 것만 같았다.

 

파시즘. 단지 과거의 독재자들이 남긴 유령 같은 단어가 아니다. ‘파시즘이라는 단어는 본래 고대 로마의 파스케스(fasces)’, 즉 다발로 묶은 회초리에서 유래한 말이다. 회초리 하나하나는 약하지만, 묶이면 강해진다. 묶음은 질서와 단결을 의미한다. 파시즘은 바로 그 강제된 일체감에서 태어난다. 모든 개인이 국가, 민족,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하나의 몸이 되는 것, 이때의 유혹은 너무도 달콤하다.

 

움베르토 에코는 파시즘의 정의를 14가지로 나열했지만, 그 핵심은 하나였다. 모든 복잡성을 혐오하고, 모든 차이를 단일화하려는 충동. ‘다르다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모두가 같아야 안전하다고 믿는 감정. 그것은 체제라기보다는 습관이고, 철학이라기보다는 감정이다.

 

나는 점점 생각하게 된다. 혹시 이 감정은 인간의 내면에 원형처럼 새겨져 있는 것은 아닐까? 칼 융은 집단 무의식을 말하며, 모든 인간의 무의식 안에 태초의 이미지들, 원형(archetype)’이 자리하고 있다고 했다. 그 원형 중 하나는 그림자. 자아가 받아들이지 못하고 억압한 것, 내 안의 어둠. 융은 말했다. “우리가 타인에게 투사하는 악은, 종종 우리 자신의 그림자다.” 그렇다면 파시즘이란, 내 안의 그림자를 인정하지 못할 때, 타인을 통해 그것을 제거하려는 충동에서 오는 것은 아닐까? 내가 싫어한 그 다름은, 사실 나 자신 안에 있는 불완전함이었는지도 모른다.

 

레비스트로스는 신화를 인간 정신의 구조라고 보았다. 그는 모든 신화가 혼돈과 질서, 생명과 죽음, 동일성과 차이의 대립을 반복 변형하는 서사 구조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파시즘은 이 구조 속에서 차이와 혼돈을 제거함으로써 완전한 질서를 창출하려는 무리한 시도일 수 있다. 신화가 다름과의 관계 맺기를 연습하는 공간이라면, 파시즘은 그것을 정리하고 배제하는 장치로 오용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신화는 이야기였지만, 파시즘은 이야기를 명령으로 바꿔버린다.

 

그리고 미르치아 엘리아데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항상 신성한 질서를 모방하며 현실을 재현하려 한다.” 엘리아데에게 있어 신화는 반복 가능한 성스러운 모형이다. 그러나 그 신성이 강박적으로 재현되기 시작할 때, 인간은 현실을 신화화하고, 질서의 이름으로 폭력을 정당화하게 된다. 신화가 믿음을 주었을 때는 구원이었지만, 신화가 현실을 정지시킬 때는 독이 된다.

 

그러니 다시 묻는다. 우리 안의 파시즘은 단지 사회의 결과가 아니라, 내면 깊숙이 각인된 이야기의 잔재, 무질서를 두려워하는 존재론적 불안, 그리고 그것을 없애려는 질서의 욕망이 아닐까?

 

신화 속 크로노스가 그랬고, 프로크루스테스가 그랬다. 자신의 기준에 맞지 않는 것을 삼키고 자르고 제거했다. 신화는 그것을 괴물이라 불렀지만, 우리 사회는 때때로 그것을 지도자라 부른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어쩌면, 그 질서의 일부가 되기를 은밀히 원해온 것은 아니었을까.

 

히틀러, 무솔리니, 프랑코. 그들은 단지 과거의 인물이 아니다. 우리는 종종 그들을 괴물로 만들어낸다. 인간이라면 할 수 없던 일을 했다고 믿고 싶어서. 그러나 더 무서운 건, 그들이 우리 안의 가장 일상적인 감정인 불안, 공포, 동일성의 욕망을 조작해, 그것을 사회 전체의 규범으로 만들어냈다는 사실이다.

 

히틀러는 정상성이라는 개념을 철저히 조작했다. 게르만 민족 중심주의, 건강한 신체, 이성애 가족주의를 정상이라 명명하고, 그 밖의 존재들을 비정상으로 규정했다. 국가는 순수한 공동체여야 했고, 타자는 제거되어야 했다.

 

무솔리니는 언론과 교육을 통제했다. 모든 초등학교에는 두체의 사진이 걸렸고, 교사는 충성서약을 하지 않으면 해임되었다. 신문은 검열되었고, 반체제 언어는 불법화되었다. 국민은 사유의 주체가 아닌, 반복 훈련의 객체가 되었다.

 

프랑코는 문학과 예술을 침묵시켰다. 카탈루냐와 바스크어를 금지했고, 수많은 시인과 작가들이 추방되거나 처형당했다.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는 총살당했고, 그의 시는 금서가 되었다. 침묵만이 허락되던 시대, 말은 곧 죄였고, 시는 곧 반역이었다.

 

나는 그들의 방식이 단지 먼 나라, 먼 시대의 일이었다고 믿고 싶지 않다. 오히려, 우리가 지금 이 사회에서 살아가는 방식인 타인을 듣지 않고, 오직 정답을 말하려는 태도 속에 이미 그들의 감정적 유산이 살아 있다고 느낀다. 우리는 정치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점점 더 양극화되어 간다. 정치는 이제 더 이상 함께 사유하는 장이 아니라, ‘적을 이기는 게임이 되어버렸다. 보수는 진보를, 진보는 보수를 적처럼 간주한다. 시민은 사라지고, 진영만 남았다. 타인의 말은 들리지 않고, 나의 말만 울려 퍼진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문제는 정치보다 더 오래된 것, 바로 교육이다. 우리는 다름을 존중받은 적이 없다. 학교는 다양함을 길러내는 곳이 아니었다. 질서, 순응, 암기, 침묵, 경쟁. 우리 모두는 어린 시절부터 줄을 섰고,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법을 배웠다. 그리하여 우리는 언제부턴가, 스스로 억압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우리는 시민이 아니라 수험자로 자랐다. 질문이 아니라 정답을 암기했고, 사유가 아니라 외운 것을 반복했다. ‘다름을 위험하게 여기도록 훈련받았고, ‘질서에 복종하는 것이 미덕인 줄 알았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또 다른 문턱에 서 있다. AI의 시대.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해주는알고리즘이 일상 속에 침투하고 있다. 그것은 아주 빠르고, 정확하며, 반복 가능하다. 그러나 그 안에는 윤리적 감각도, 침묵에 귀 기울이는 태도도 없다.

 

AI정답을 말하는 기계이지만, 정답만이 진실이었던 시대가 파시즘을 낳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AI가 대중의 감정에 부합하는 문장을 더 많이 생산하고, 편향된 데이터에 학습되며, ‘다수결의 정서를 증폭시킬 때, 우리는 다시금 자기 검열하는 인간, 질서에 순응하는 시민, 차이를 인식하지 못하는 존재로 퇴행할 수 있다.

 

파시즘은 언제나 기술을 사랑했다. 히틀러는 확성기를, 무솔리니는 라디오를, 프랑코는 검열 시스템을 활용해 군중을 통제했다. 오늘날 우리는 그것보다 더 정교한 도구를 손에 쥐었다. AI는 의견을 요약하고, 질문을 정리하며, 때로는 선택지를 줄여준다.’ 그 친절함이 언제 폭력으로 바뀌는지, 우리는 그것을 감지할 능력을 갖고 있는가?

 

나는 말하는 존재로서, 이제 더 조심해야 한다. 내가 쓰는 문장 하나, 선택하는 단어 하나가 이미 충분히 유사한 말들에 의해 훈련된 시스템에 또 하나의 기준이 된다면, 나는 어떤 언어를 써야 할까? 무엇이 효율적이지 않더라도 사유로 남기 위한 글쓰기, 그것이 지금 이 시대의 작은 저항이 아닐까?

 

이제서야, 나는 간신히 이렇게 고백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 나는 파시시스트야. 그러나 성찰하는 파시시스트이고 싶어. 이 말은 부끄러운 고백이자, 동시에 다짐이다. 나는 언제든 타인을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두려워하며, 매번 멈춰서서, 물어보고 싶다. 이 말이 누구를 다치게 하는 건 아닌지, 이 문장이 누군가의 침묵을 덮어버리는 건 아닌지.

 

나는 타인을 말하는 글이 아니라, 타인을 들어주는 글을 쓰고 싶다. 나의 정의가 누군가의 고통이 되지 않도록, 조금 더 조심스럽게 쓰고 싶다.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전제를 품고 글을 쓰는 것,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저항이다.

 

성찰하는 파시시스트. 그 모순적인 말 속에, 나는 나의 윤리를 세워본다. 내가 아직도 말할 수 있다는 것, 그 자체가 얼마나 위험하고도 귀한 일인지 알기에 나는 오늘도 조심스럽게 글 앞에 선다. 말하는 자로서가 아니라, 묻는 자로서, 그리고 듣는 자로서.

 

에필로그.

나는 이 글을 쓰는 내내 두려웠다. 나조차도 그토록 경계하던 파시즘의 일부일 수 있다는 사실이, 어느 순간 나의 문장들 사이에서 스며 나올 수도 있다는 가능성 앞에서 나는 떨었다. 그러나 그 두려움이 나를 멈추게 하진 않았다. 오히려 그 두려움은 글을 쓰게 했다. 멈추지 않고 묻고, 의심하고, 돌아보는 것.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윤리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 글은 어떤 해답도 주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해답 없는 불안 속에서, 계속해서 묻고 싶다. 나는 정말 괜찮은가? 내가 쓰는 문장이 누군가에게 지워진 경험은 없었는가? 내가 선택한 단어 하나가, 누군가를 침묵시키진 않았는가?

 

성찰은 완성된 결론이 아니라, 살아 있는 태도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이 문장을 쓰며 나를 다시 묻는다. 나는 여전히 파시시스트일 수 있다. 그러나 그 가능성을 인식하고, 그 안에서 멈춰 서서 다시 말의 윤리를 돌아보는 자, 그것이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이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 모두가 그런 '성찰하는 파시시스트'가 되어야 하는 시대를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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