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넘어서: 공동체주의의 철학과 현재
『나』를 넘어서: 공동체주의의 철학과 현재
5월 중엽의 연둣빛 계절은 유난히 사람의 마음을 사유로 이끈다. 창밖으로 번지는 햇살은 아직도 봄이 다 가지 않았다는 듯 나뭇잎의 결을 비추고, 사람들의 걸음도 한결 느려진다. 철학과에 입학한 지 3년이 되어가는 지금, 나는 문득 지금껏 내가 공부해온 개념들을 되돌아본다. 수업 시간에 배운 플라톤의 이데아, 아리스토텔레스의 덕 윤리, 루소의 일반의지와 헤겔의 주체 형성 이론까지. 그리고 틈틈이 혼자 읽었던 아감벤, 고리타니 고진, 로티 같은 현대 철학자들.
그러나 이상하게도 내 마음을 가장 오래 붙든 것은, '공동체'였다. 어쩌면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어 보이는 이 주제에 자꾸 집착하는 이유는, 내가 속하지 못했다고 느낀 적이 많았기 때문일까. 웃길지 모르겠지만, 나는 종종 세상이 어떤 구조로 돌아가야 더 평화롭고, 더 인간다울 수 있을까를 상상했다. 그것은 내 사유의 수준을 훌쩍 뛰어넘는 '이상사회'의 그림이었고, 말하자면 감히 '미래 사회'를 꿈꾸는 일이었다.
그러한 사유의 중심에 '공동체주의'라는 단어가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그것은 과거로부터의 회귀가 아니라, 앞으로 다가올 어떤 사회를 향한 징후처럼 보였다. 그래서 나는 지금 이 글을 쓰기로 했다. 내 안에 어설프게나마 쌓여온 질문들, 무엇이 인간을 연결짓는가, 왜 우리는 함께 있어야 하는가, 공동체란 언제 가능하고 또 언제 불가능해지는가를 따라가다 보면, 어쩌면 그 끝에 아주 작은 단서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으로.
철학의 시작 ― 플라톤과 공동선의 이상
플라톤은 『국가』에서 공동체의 이상형으로 "정의로운 국가"를 제시한다. 그에게 정의란, 각자가 자신의 고유한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상태이며, 이는 공동체 전체의 조화와 질서를 통해 실현된다. 수호자(군인), 생산자(농민·상인), 통치자(철인)의 세 계급이 각자의 위치에서 기능할 때, 국가는 하나의 유기체처럼 작동한다.
가장 논쟁적인 부분은 수호자 계급에게 가족과 사유재산의 철폐를 요구하는 대목이다. 플라톤은 이 계급에게 "아이와 아내의 공동 소유"를 제안하며, 심지어 아이의 부모가 누구인지도 모르게 하여, 모든 아이를 전체 공동체의 자식으로 만들자고 주장한다. 이는 사적 욕망, 혈연적 편애, 재산 상속 등으로 인해 정의로운 판단이 흐려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사적 소유는 분열을 낳고, 공유는 조화를 낳는다.” 플라톤은 그렇게 믿었다. 그는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개인의 감정과 소속감을 해체하려 했다. 이때 공동체는 감정의 연대라기보다는 정치적, 윤리적 장치로서의 공동체였다. 이는 20세기 전체주의 국가들의 집단주의와도 닮아 있어, 현대의 시선에서는 위협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예컨대, 알도스 헉슬리의 소설 『멋진 신세계』에서 아기들은 시험관에서 태어나고 '어머니'라는 말은 외설로 간주된다. 개개인은 유전자에 따라 계급화되고, 모든 감정은 통제된다. 플라톤의 이상국가는 이 디스토피아적 상상력의 전신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에 대해 『정치학』에서 날카롭게 반박한다. 그는 “모든 것이 공유될 때, 아무것도 진정으로 소중히 여겨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플라톤의 공유 이념은 현실적인 사랑과 책임의 윤리를 약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질문 하나, 우리는 정말 누구의 아이인지 모른 채 그 아이를 사랑할 수 있을까? 부모가 사라진 공동체에서, 윤리는 보편화되는가 아니면 무너지는가?
그 질문에 대해 나는 아직도 완전한 확신은 없다. 그러나 하나는 분명하다. 사랑은 정체성을 모를 때 오히려 더 깊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피붙이로서의 사랑이 아닌, 존재 자체로 마주하는 감각. 누구의 아이인지 몰라도, 그 아이가 울고 웃고 자라는 모습을 본다면, 인간은 그 자체로 감응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닐까. 윤리는 정체성과 관계의 밀도에서만 파생되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고통과 기쁨에 감응하려는 감수성에서 출발할 수 있다. 공동체는 그런 감수성이 훈련되고 보존되는 공간이어야 한다.
플라톤의 구상은 공동체를 윤리적 질서로 조직하려는 철학의 첫 시도였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개인의 다양성과 정체성을 제도적으로 억압할 수 있는 기획이었다. 이 장은 공동체에 대한 철학의 출발이 ‘전체’의 조화를 지향하는 만큼, 그것이 ‘부분’인 개인에게 어떤 부담을 강요하는가를 묻는 데 초점을 둔다. 플라톤의 공동체론은 개인의 감정, 소속, 정체성을 분해함으로써 조화를 꾀했지만, 바로 그 점에서 인간을 하나의 부품처럼 다루는 경향을 드러낸다. 수호자 계급은 사랑할 권리도, 선택할 자유도, 개별적 목소리도 허용되지 않는다. 그는 조화를 추구하며 인간의 고유성을 지운 것이다. ‘전체의 이익’이라는 이름으로 ‘부분’을 침묵시키는 이 구조는, 훗날 전체주의 체제의 이상적 설계도로 오독될 위험마저 안고 있다. 그러므로 플라톤의 기획은, 공동체의 윤리를 묻는 동시에, 그 윤리가 어떻게 쉽게 폭력으로 전환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예고한다.
근대의 전환 ― 계약과 자율성의 공동체
중세의 신 중심 질서가 붕괴된 이후, 철학은 인간을 스스로 사고하는 주체로 세우기 시작했다. 홉스, 로크, 루소로 이어지는 사회계약론의 전통은 바로 그런 변화의 산물이다. 공동체는 더 이상 신이 부여한 자연적 질서가 아니었고, 자유로운 개인들이 '계약'을 통해 인위적으로 구성한 합의체로 간주되었다.
홉스는 『리바이어던』에서, 인간은 자연 상태에서 서로를 두려워하는 존재이며, 생존을 위해 절대적인 주권자에게 자신의 권리를 위임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의 공동체는 '공포의 계약'을 기반으로 한 국가였다. 반면 로크는 인간이 생명, 자유, 재산이라는 자연권을 지니고 태어난다고 보았고, 이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정치 공동체를 구성한다고 본다. 그의 국가관은 홉스보다 훨씬 더 자유주의적이며, 제한된 정부를 지향한다.
루소는 조금 다른 입장에서 인간의 자유를 강조한다. 그는 『사회계약론』에서, 개인이 자신의 이익이 아닌 '일반의지'에 따라 행동할 때 진정한 자유가 실현된다고 보았다. 이때 공동체는 단순한 계약의 결과물이 아니라, 도덕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자율적으로 형성한 윤리적 공간이다.
그러나 사회계약론의 전통은 동시에 중요한 한계를 드러낸다. 그것은 인간을 '계약 이전의 고립된 자아'로 가정하며, 공동체를 도구적 관계로 환원한다는 점이다. 내가 타인과 함께 있는 이유가 오직 나의 이익을 지키기 위함이라는 가정은, 공동체의 윤리를 현저히 축소시킨다.
이 시점에서 이는 질문은, 우리가 계약을 맺기 전, 정말 고립된 존재였을까? 인간은 언제나 이미 관계 안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 질문에 대한 나의 생각은 이렇다. 인간은 결코 '계약 이전'에 고립되어 있었던 존재가 아니었다고 믿는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관계 속에 놓인다. 부모의 품 안에서, 말 없는 시선 안에서, 울음과 미소를 통해 우리는 이미 타자와 연결된 존재로서 출발한다. '계약'은 그러한 본원적 관계를 사후적으로 설명하려는 하나의 정치적 장치일 뿐이다. 공동체란 계약의 조건이 아니라, 삶의 조건이다.
그렇기에 공동체를 오직 개인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바라보는 시각은, 공동체가 본래 지니고 있는 감정적, 도덕적 깊이를 삭제해버린다. 우리는 계약을 맺기 이전에 이미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아간다. 이 사실을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공동체에 대한 이해는 전혀 다른 결을 지닐 수 있다.
이 장은 근대적 사유 속에서 공동체가 어떻게 '합리적 계산'의 결과로 이해되었는지를 살펴보았다. 공동체가 개인의 합리적 이해관계 위에 놓인 계약의 산물로 간주될 때, 우리는 본질적인 감정, 소속, 책임을 사라지게 만들 위험을 안고 있다. 타자와의 관계는 계약서에 명시될 수 없는 고통, 우연, 애정의 층위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므로 근대의 계약론은 공동체에 대한 설명으로서 유효하면서도, 그 깊이를 충분히 담아내기엔 결코 충분하지 않다. 바로 그러한 한계 속에서, 현대 공동체주의 철학자들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공동체주의의 복원 ― 현대의 비판자들
근대의 사회계약론이 공동체를 합리적 자율성의 산물로 축소했을 때, 그로부터 밀려나 있던 감정과 윤리, 기억과 소속의 문제들이 서서히 되살아나기 시작한다. 이러한 회귀는 단지 과거로의 복귀가 아니다. 그것은 현대의 복잡한 정체성과 문화, 정치적 분열 속에서 ‘함께 산다는 것’의 의미를 재구성하려는 시도였다. 마이클 샌델,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 찰스 테일러는 그러한 비판적 복원을 시도한 대표적인 철학자들이다.
샌델은 『자유주의와 정의의 한계』에서 롤스의 자유주의를 비판하며, 인간은 결코 ‘맥락 없는 자아’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는 자아는 언제나 공동체적 맥락 속에서 구성된다고 말한다. “나는 나의 역할, 나의 이야기, 나의 관계들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이 말은 개인의 자유가 공동체적 소속과 분리될 수 없다는 그의 입장을 잘 보여준다. 공동체는 자아의 억압이 아니라, 정체성의 조건인 것이다.
매킨타이어는 『덕의 상실』에서 현대 사회가 도덕적 통일성을 잃었다고 진단한다. 그는 전통 안에서의 ‘덕’과 ‘삶의 이야기(narrative)’를 강조하며, 우리가 어떤 공동체 안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하며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서사가 결여된 시대를 비판한다. 그는 “우리는 이야기 안에서 태어나며, 이야기를 통해 살아가며, 이야기로 죽는다”고 말한다. 이는 도덕이 논리나 원칙 이전에, 삶의 구조 안에서 살아 움직여야 한다는 주장이다.
찰스 테일러는 ‘인정의 정치’를 통해 정체성은 타자의 응답 속에서 성립된다고 주장한다. 『자기 해석적 인간』에서 그는 우리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능력은 타자와의 관계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인정받지 못한 정체성은 무화되고, 억압된다. 그렇기에 공동체는 단지 제도적 틀이 아니라, 타자의 응시에 응답하는 윤리적 장(scene)이다. 그는 정체성을 이야기하고 인정받을 수 있는 장이 사라질 때, 개인은 고립되고, 사회는 파편화된다고 경고한다.
이 세 철학자는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지만, 공통적으로 근대적 개인주의가 망각한 ‘관계성의 존재론’을 회복하려 한다. 우리는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그렇기에 공동체란 억압적 틀이 아니라, 우리를 의미 있게 구성하는 삶의 조건일 수 있다.
여기서 이런 질문은 어떤가? 나는 어떤 이야기의 일부로 살아가고 있는가?
나의 윤리는 그 무대 위에서, 수없이 어긋나고 다시 만나는 관계의 순간들 속에서, 조용히 형성되어 온 것이다. 돌이켜보면, 나의 윤리는 대단히 사소한 장면들 속에서 만들어졌다. 예컨대, 친구가 넘어졌을 때 망설임 없이 손을 내밀었던 순간, 가족과의 갈등 끝에 말없이 건넨 한 끼 식사, 낯선 사람의 친절에 눈물이 핑 돌았던 그 오후. 그것들은 철학서에 적히지 않지만, 내게는 가장 깊은 윤리의 근거였다. 나의 윤리는 이론이 아니라, 내가 몸으로 겪은 관계의 흔적 속에서 자라났다. 그렇게 생각하면, 공동체란 제도가 아니라 감각이며, 누군가와 눈을 마주쳤을 때 생기는 그 떨림과 침묵이야말로 윤리의 출발점일지도 모른다.
이렇듯 지금까지 나는 나 자신을 비교적 독립적인 존재라고 여겼지만, 실제로는 내 삶의 거의 모든 감정과 판단이 어떤 이야기의 연장선 속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친구와 가족, 스승과 책들, 내가 지나온 도시와 골목들, 그 속에서 일어난 수많은 만남과 상실들. 그것들이 없었다면 나는 지금의 나로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공동체는 단지 제도적 공간이 아니라, 나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윤리를 형성한 정서적, 서사적 장이었다. 공동체는 나를 구속하기도 했지만, 그보다 먼저 나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렇기에 나는 이제 공동체를, 억압의 구조가 아닌 서로의 삶이 교차하는 무대로서 바라보고 싶다. 나의 윤리는 어떤 공동체적 장면 속에서 형성된 것인가? 공동체는 단지 제도적 공간이 아니라, 나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윤리를 형성한 정서적·서사적 장이었다. 공동체는 나를 구속하기도 했지만, 그보다 먼저 나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렇기에 나는 이제 공동체를, 억압의 구조가 아닌 서로의 삶이 교차하는 무대로서 바라보고 싶다.
도래하는 존재들 ― 아감벤의 탈정체성 공동체
조르조 아감벤은 현대 정치철학의 비판적 전통을 계승하면서, 공동체 개념을 가장 급진적으로 해체하고 다시 사유하려 했던 철학자다. 『호모 사케르』와 『도래하는 공동체』에서 그는 공동체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배제와 폭력의 구조를 정당화해왔는지를 집요하게 추적한다. 그가 주목하는 핵심은 ‘예외 상태’이다. 이는 주권자가 법의 효력을 일시적으로 정지시키고, 인간을 법의 바깥으로 몰아냄으로써 생명을 관리의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메커니즘이다.
그 결과 탄생하는 존재가 바로 호모 사케르(homo sacer), 죽일 수는 있으나 희생제물로 바칠 수 없는, 법과 종교의 보호 밖에 놓인 인간이다. 난민, 수용소의 수감자, 제도 밖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 그들은 공동체의 경계에서 배제되면서도 동시에 그것의 유지에 필수적인 존재들이다. 아감벤에게 공동체란 바로 그런 포함된 배제(inclusive exclusion)의 정치로 작동해 왔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비판에 머물지 않고, 『도래하는 공동체』에서 전혀 다른 가능성을 제시한다. 그것은 정체성이나 소속, 경계의 기준을 요구하지 않는, 이름 붙일 수 없는 존재들 간의 느슨한 연대이다. 그는 이를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존재들”(whatever beings)의 공동체라 부른다. 이 공동체는 정체성을 강요하지 않으며, 분류하지 않으며, 단지 함께 있는 존재들의 공존 상태를 가리킨다.
아감벤은 말한다. “공동체는 어떤 것을 공유함으로써가 아니라, 함께 있음 그 자체로 구성된다.” 이는 철저히 탈정체성적이고 탈영토적인 공동체론이다. 그것은 제도적 틀도, 혈연도, 국적도 아닌 존재의 울림과 흔들림 안에서 만들어지는 공동성이다.
질문으로는, 우리는 반드시 누군가가 되어야만 함께할 수 있는가? 존재가 이름을 가지지 않아도 연대는 가능한가?
그 질문에 대한 나의 생각은 이렇다. 오히려 '누군가가 되려고 애쓸 때' 우리는 더 자주 단절되고, 소외된다. 아감벤이 말했듯, 공동체는 어떤 것도 공유하지 않아도 함께 존재할 수 있는 장소일 수 있다. 이름을 갖지 않고도, 경계를 만들지 않고도, 우리가 함께 숨 쉬는 그 순간 자체로 연대는 발생할 수 있다. 나는 타인의 정체성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그 존재의 떨림에 반응할 수 있고, 그 고통에 함께 아파할 수 있다. 정체성은 연대의 조건이 아니라, 때로는 연대를 가로막는 벽일 수도 있다. 그렇기에 나는 이제, 연대를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공통의 정체성이 아니라, 공감의 여백이라고 믿는다.
우발성과 공감 ― 로티의 ‘아이러니스트 공동체’
로티는 공동체를 윤리나 전통의 틀로 고정하지 않는다. 그는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에서 인간 존재의 본질이 본래 우발적이며, 우리가 믿는 것조차 항상 철회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보편 진리를 추구하는 대신, 서로의 고통에 감응할 수 있는 감정적 연대를 통해 공동체를 상상한다.
자신을 '아이러니스트 자유주의자'라 부른 로티는, 우리가 언제든 자신의 신념을 수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겸허해져야 하며, 그 겸허함이야말로 윤리의 출발점이라고 본다. 공동체는 도덕적 정답에 대한 합의가 아니라, 서로 다른 고통을 상상하는 능력, 다시 말해 상호 감응의 언어로 형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가 강조한 핵심은 “잔인함의 최소화”다. 로티는 우리가 철학적 논증이 아니라 문학, 이야기, 서사를 통해 타인의 고통을 상상할 수 있다고 본다. 다시 말해, 공동체란 제도가 아니라 감정의 언어로 유지되는 연대의 장이다. 이때 '윤리'는 어떤 이상적 기준이 아니라, '타인을 덜 아프게 하려는 마음'에서 시작된다.
로티의 공동체는 그래서 명확히 정의되지 않는다. 정체성, 규범, 제도보다 우선하는 것은 타자와의 접촉, 서로의 서사에 대한 경청, 말과 말 사이의 조용한 울림이다. 철학이 아닌 문학이 더 윤리적일 수 있다는 그의 주장은, 윤리와 공동체를 생각하는 우리에게도 깊은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같은 이야기를 믿을 때 함께 있는가, 아니면 서로의 이야기 앞에서 머뭇거릴 때 함께 있는가?
그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은, 우리는 오히려 '서로의 이야기 앞에서 머뭇거릴 때' 비로소 함께 있을 수 있다고 믿는다. 같은 이야기를 믿는 것은 안락함을 주지만, 때로는 차이를 보지 못하게 만든다. 그러나 낯선 이야기 앞에서 멈칫하는 순간, 우리는 타인의 세계를 상상하고, 그 세계와 나의 간극을 자각하며, 그 거리 안에서 연대를 고민하게 된다. 머뭇거림은 거리의 인정이고, 그 인정에서 비로소 윤리는 생겨난다. 우리는 동일함 속에서가 아니라, 다름 속에서 더 깊이 함께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질문 하나, 우리는 주고받는 것이 같을 때 공동체를 이루는가, 아니면 주고도 받지 못할 때 진정한 공동체가 시작되는가?
그 질문에 대한 나의 응답은 이렇다. 우리는 대체로 주고받는 것이 균형을 이룰 때 안심하고, 안정된 관계를 떠올린다. 그러나 진정한 공동체는 그 균형이 무너진 곳, 손해를 감수하고도 누군가를 받아들일 때 비로소 시작되는 것 아닐까. 아무런 대가 없이도 타인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 그 관계는 계약이 아닌 윤리로 움직인다. 진정한 공동체는 보상을 기대하지 않는 주체들 사이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관계를 맺으려는 의지로부터 생성된다. 고리타니 고진이 말한 '교환되지 않는 것'을 수락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서로의 타자성을 존중하며 함께 존재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교환을 넘어서 ― 고리타니 고진의 '세계공화국'
고리타니 고진은 공동체를 기존의 정체성이나 문화적 연대가 아니라, 관계의 교환양식이라는 구조적 틀로 분석한다. 그는 『세계공화국으로』와 『트랜스크리티크』를 통해 인간 공동체를 구성해온 세 가지 교환양식을 정리한다. 첫째는 혈연·친족 기반의 상호성의 교환, 둘째는 법과 제도에 의한 재분배, 셋째는 자본주의의 등가교환이다.
그러나 이 세 가지 교환양식 모두, 일정한 폭력과 배제를 수반한다. 고리타니는 이를 넘어서기 위한 제4의 교환양식을 제안한다. 그는 '교환되지 않는 것'—즉, 손해와 불균형, 일방성조차 감내하는 무상의 환대—를 통해 진정한 공동체가 도래할 수 있다고 본다. 그것은 계약 이전의 윤리이며, 소속과 동일성의 강제에서 벗어난 존재들 간의 느슨하고도 절실한 연결이다.
이때 공동체는 완결된 구조가 아니라, 끊임없이 열리고 응시되는 열림의 장이다. 고리타니의 세계공화국은 국경을 넘고, 문화와 종교, 민족적 분할선을 초월하며, 오직 ‘함께 있음’의 가능성만으로 유지되는 급진적 윤리의 공간이다.
질문 하나, 우리는 주고받는 것이 같을 때 공동체를 이루는가, 아니면 주고도 받지 못할 때 진정한 공동체가 시작되는가?
그 질문에 대한 나의 응답은 이렇다. 우리는 대체로 주고받는 것이 균형을 이룰 때 안심하고, 안정된 관계를 떠올린다. 그러나 진정한 공동체는 그 균형이 무너진 곳, 손해를 감수하고도 누군가를 받아들일 때 비로소 시작되는 것 아닐까. 아무런 대가 없이도 타인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 그 관계는 계약이 아닌 윤리로 움직인다. 진정한 공동체는 보상을 기대하지 않는 주체들 사이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관계를 맺으려는 의지로부터 생성된다. 진정한 공동체는 결국, 타인을 이해하려는 몸짓, 그로 인한 불균형을 감내하려는 감정, 그리고 응답 없는 응답을 기다리는 기다림에서 비롯된다. 나는 오늘, 이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의 선택과 태도 속에서, 아주 작고 느린 방식으로 그 공동체를 꿈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진정한 공동체는 결국, 타인을 이해하려는 몸짓, 그로 인한 불균형을 감내하려는 감정, 그리고 응답 없는 응답을 기다리는 기다림에서 비롯된다.
나의 사유 ― 공동체는 어떻게 도래하는가
우리는 지금, 공동체라는 단어를 말하기조차 망설여지는 시대를 살아간다. 기후 위기와 생태 파괴, 전 세계 곳곳의 전쟁과 제국주의적 분쟁, 신자유주의 체제 아래 심화되는 불평등과 분열, 그리고 트럼프와 같은 권위주의적 리더들의 부상은 ‘함께 존재하는 것’이 얼마나 불안정하고 위태로운가를 보여준다. 기술과 자본은 사람들을 더욱 빠르게 연결하면서도, 동시에 그 연결의 깊이를 앗아가고 있다. 타인을 ‘공유’하고 ‘소비’하는 플랫폼의 세계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는 방식 대신, 평점을 매기고 차단하는 방식에 익숙해져 버렸다.
그러나 나는 믿고 싶다. 공동체는 여전히 가능하다고. 그것은 완성된 형식이 아니라, 우리가 다시 묻고 다시 응답하려는 순간마다 도래하는 감각일 것이다. 나는 철학자들의 사유를 따라 걸으며, 공동체가 반드시 제도나 문화의 동일성 위에 놓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배웠다. 그것은 윤리적 결단이자, 감정의 선택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로만 겨우 버텨지는 연대의 감각이다.
공동체는 나에게 하나의 질문으로 남는다. 나는 어떤 공동체를 꿈꾸고 있는가? 그 꿈은 지금 이 순간 나의 태도와 선택 안에 어떤 방식으로 도래하고 있는가? 나는 이 질문에 대한 완전한 대답을 아직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공동체는 머나먼 이상이 아니라, 매일의 사소한 관계와 응시 속에서 작고 조용하게 도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나는 내 방식으로 공동체를 실천하고 싶다. 내가 가진 것은 미약한 언어뿐이지만, 나는 매일 쓰는 글을 통해 누군가에게 닿기를 바란다. 누군가의 상처를 어루만지거나, 누군가의 고립에 말을 건넬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공동체의 가장 작고 구체적인 출발 아닐까. 때로는 ‘보잘 것 없다’고 느껴지는 나 자신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지껄이고, 쓰고, 건네고자 하는 의지. 바로 그 반복과 정직함이 공동체의 씨앗일 수 있다는 희망이 나를 움직인다.
이 글도, 그 소박한 실천 중 하나로 남기를 바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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