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에세이

에피스테메와 나의 글쓰기: 나는 무엇을 알고 있다고 믿는가?

thetraveleroftheuniverse 2025. 5. 16. 03:21

 

 

에피스테메와 나의 글쓰기: 나는 무엇을 알고 있다고 믿는가?

 

문학 비평 수업 시간, 교수님은 미셸 푸코의 ‘에피스테메’ 개념을 설명했다. 단지 지식 체계가 아닌, 한 시대의 지배적 담론, 곧 “무엇이 말해질 수 있고 무엇이 진리로 여겨지는가”를 결정짓는 무의식적 구조. 나는 그 말에 붙들렸다. 내가 진리라 여겨온 수많은 것들은 혹시 시대가 내게 들려준 말, 길들여진 사고의 습관은 아니었을까?

나는 교과서를 외우며 자랐다. 도덕과 정의, 역사와 진실, 사랑과 이상이 인쇄된 문장들이 내 사유의 토대가 되었다. 그 모든 것이 불변의 진리인 줄 알았다. 그러나 문학을 읽고 철학을 접하며 깨달았다. 진리라고 불리던 말들조차 누군가에게는 침묵이며, 누락이며, 때로는 폭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지는 것과 말해지지 않는 것 사이에는 분명한 경계가 있었다. 문학 역시 그 질서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어떤 서사는 중심이 되었고, 어떤 인물은 끝내 이름조차 얻지 못했다.

에피스테메라는 말은 고대 그리스에서 유래했다. 플라톤에게 그것은 감각을 넘어선, 이데아에 대한 확고한 인식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에피스테메를 원인과 원리에 따라 설명 가능한 과학적 지식이라 보았다. 두 철학자에게 그것은 변하지 않는 진리, 단단한 앎이었다. 그러나 푸코에 이르면, 에피스테메는 진리 자체가 아니라 진리가 가능해지기 위한 시대의 조건으로 재정의된다.

그에 따르면 16세기까지는 세계를 유사성과 조응의 질서로 이해했고, 이후 재현의 시대가 도래했다. 19세기에는 역사성과 계열성이 중심이 되었으며, 현대에 이르러 인간은 스스로를 분석하는 존재가 되었다. 우리는 이제 인간학적 에피스테메 속에서, 자기를 끊임없이 분해하고 재구성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겠다.

하지만 나는 이 지점에서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에피스테메란, 결국 우리를 가두는 벽이 아닐까?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생각하고 말할 수 있는지를 규정해 주는 동시에, 그 외부의 가능성은 미리 차단해 버리는 질서. 이 물음은 나를 불안하게도, 해방감으로도 이끌었다. 그 벽을 자각하는 순간, 나는 비로소 그 바깥을 상상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에피스테메는 사유의 조건이자, 동시에 사유의 경계다. 그 경계를 감지하고 나서야 우리는 진정 새로운 사유를 시작할 수 있다. 게다가 나는 안다. 진리는 언제나 상대적이며, 시대와 맥락에 따라 변화한다. 절대적인 진리는 없으며, 내가 만들어가고자 하는 에피스테메 또한 언제든 흔들리고, 다시 써야 할 무언가일 것이다.

때때로 나는 그 불안 속에서 길을 잃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진리를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질문을 놓지 않는 태도다. 유동하고 수정 가능하며, 타자의 말에 흔들릴 수 있는 앎, 그것이 내가 바라는 에피스테메의 형상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새로운 사유는, 공동체주의적 감각과 인류세적 인식이라고 믿는다. 인간이 더 이상 중심일 수 없는 시대, 인간과 비인간, 기술과 자연, 생명과 시스템이 얽힌 이 거대한 지층 위에서, 우리는 다른 방식의 앎을 요청받고 있다. 그것은 공존의 언어이며, 서로의 생존을 향한 윤리이고, 고립된 주체를 넘어서 타자와 엮이는 존재 방식이다.

이러한 사유를 안고 떠올리게 된 작품이 있다. 한강의 『채식주의자』.

주인공 영혜는 육식을 거부하는 결단을 통해, 자신의 몸에 각인된 가족 중심의 질서와 여성성의 규범을 해체한다. 그녀는 말하지 않고, 이해되지 않으며, 끝내 식물에 가까운 존재로 변화한다. 하지만 나는 그 변화가 단지 파국이 아니라고 느꼈다. 오히려 그녀는 기존의 에피스테메로는 언어화될 수 없는 존재가 되어, 침묵 속에서 새로운 언어를, 말 바깥의 사유를 제시한다. 『채식주의자』는 우리가 지금까지 옳다고 믿어온 ‘정상적인 앎’이 과연 정당한가를 되묻게 하는 작품으로 읽었다.

나는 생각한다. 내가 글을 쓴다는 것은, 바로 그런 경계에 서기 위해서다. 말할 수 없었던 것을 말하게 하려는 시도, 침묵당했던 것들을 기억의 언어로 되살리려는 열망. 내 문장은 어쩌면 여전히 시대의 질서 안에 놓여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경계에서 계속 흔들리고 싶다. 내 글은 무엇을 드러내고, 무엇을 지우고 있는가. 나는 과연 말할 수 있었는가, 아니면 말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토록 쓰고 있는 것인가.

혼란스럽다. 지금까지 내가 믿어온 말들, 사유의 구조, 글의 윤리마저 낯설어진다. 그러나 어쩌면 이 혼란이야말로 내가 나만의 시간을 시작할 수 있는 자격인지도 모른다. 나는 끊임없이 나만의 에피스테메를 만들어가며, 그야말로 아이러니스트이자 책임 있는 자유주의자가 되기를 바란다.

완결을 향한 글이 아니라, 끊임없이 질문하고, 흔들리고, 사유하는 글을. 나는 그런 글을 쓰고 싶다. 닫히지 않는 문장으로, 멈추지 않는 물음으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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