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캉 이론에 근거한 사적 분석
말해지지 않는 것을 쓰기 위해: 라캉 이론에 근거한 사적 분석의 시도
문학비평연구 수업에서 자크 라캉의 정신분석 이론을 공부하게 되었고, 그중에서도 ‘욕구, 요구, 욕망’이라는 개념이 유독 나를 사로잡았다. 단순한 심리학 이론이 아닌, 인간이 언어를 통해 자신을 인식하고,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형성하며, 결코 충족되지 않는 결핍을 안고 살아가는 방식 전체를 통찰하게 하는 개념이었다.
나는 자연스레 내 삶의 한 중심에 놓여 있는 글쓰기에 대해 떠올리게 되었고, “나는 왜 이렇게 쓰고 싶어하는가”라는 질문 앞에 섰다. 이 글은 그 질문을 철학적으로 천천히 사유해 보려는 시도이며, 라캉의 이론을 토대로 문학과 영화 속 인물들의 욕망을 비평하고, 그 속에서 나 자신의 글쓰기 욕망을 해석해 보려는 사적 분석의 시도이다.
라캉에 따르면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결핍된 존재이다. 우리는 욕구(besoin), 요구(demande), 욕망(désir)이라는 세 층위 속에서 살아가며, 언어라는 상징계 속에서 자신을 구성한다. 욕구는 배고픔, 수면, 체온 같은 생리적 필요에 해당하며 충족되면 사라진다. 하지만 인간은 단순히 배를 채우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보살핌 받기’, ‘사랑받기’, ‘응시되기’를 갈망하며, 이때 욕구는 언어로 전환되어 요구가 된다. 아기는 배가 불러도 계속 운다. 젖을 먹고 난 뒤에도 엄마의 품을 원하고, 목소리를 듣고 싶어한다. 그것은 단지 신체적 욕구가 아니라, 사랑받고 싶다는 감정이 섞인 언어적 요청이다.
그러나 어떤 요구도 완전히 충족될 수는 없다. 타인은 나를 끝내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언어는 언제나 뜻을 미끄러뜨리며 어긋난다. 그래서 남는 것이 욕망이다. 욕망은 충족되지 않은 요구의 잔여이며, 정확히 무엇을 원하는지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계속해서 대상을 바꾸며 미끄러지는 정동이다. 라캉은 말한다.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 이는 곧, 내가 원하는 것은 사실 내가 주체적으로 고른 것이 아니라, 타자가 욕망하는 것을 나도 욕망하게 되는 구조 속에서 생겨난다는 뜻이다.
이러한 개념을 문학과 영화에 적용하면, 작품 속 인물들의 내면을 한층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예컨대 한강의 『채식주의자』에서 주인공 영혜는 어느 날 갑자기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이는 단순한 식욕의 거부가 아니다. 그것은 사회가 여성에게 부과한 ‘정상성’과 ‘온순함’, ‘희생’을 거부하고, 자신의 몸을 통해 자신을 말하려는 시도이다. 영혜의 욕구는 음식을 거부하는 행위로 표현되지만, 그 이면에는 자기 존재를 인정받고자 하는 강렬한 요구가 있다. 하지만 그녀의 요구는 남편도, 가족도, 사회도 이해하지 못한다. 결국 그녀는 인간으로 존재하는 것 자체를 포기하며, ‘식물 되기’를 욕망하게 된다. 그것은 인간이기를 거부함으로써 오히려 존재를 확인받고자 하는 역설적인 욕망이며, 말할 수 없는 것을 몸으로 대신 발화하는 시도이다.
김승옥의 『무진기행』에서도 라캉의 욕망 구조는 선명하게 드러난다. 도시에서 성공한 듯 보이는 주인공 ‘나’는 고향 무진으로 돌아가지만, 그곳에서 그는 자신이 욕망하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한 채 안개의 풍경 속을 떠돈다. 무진의 안개는 기표가 기의에 닿지 못하는 욕망의 은유이자, 의미의 지연을 시각화한 이미지이다. ‘나’는 무언가를 회복하고자 하지만, 그게 어머니인지, 사랑인지, 고향인지 끝내 말하지 못한다. 결국 그는 다시 도시로 돌아간다. 그가 돌아간 곳은 자율적인 삶이 아니라, 타자의 욕망에 편입된 세계이다. 그는 여전히 자신의 욕망이 아니라, 타인이 설정해 놓은 욕망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영화 『올드보이』는 라캉 이론의 극단을 보여준다. 주인공 오대수는 자신이 감금당한 이유를 알고 싶고, 복수하고 싶어 한다. 그는 자신이 주체적으로 욕망을 수행하고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사실 그가 욕망한 것은 이우진이라는 타인이 미리 설계해 놓은 욕망 구조에 불과했다. 그는 타인의 욕망을 따라 움직인 결과로 파국에 이른다. 이 영화는 인간의 욕망이 얼마나 외부적이며, 자율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구적인지를 냉혹하게 드러낸다. 타자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으로 착각한 순간, 그는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의 주인공이 된다.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에 등장하는 인물 재희 역시 라캉적 욕망 구조를 통해 읽을 수 있다. 그녀는 퀴어 남성 병수를 향해 “네가 너인 게 어떻게 약점이 될 수 있어?”라고 말하며, 그의 존재를 긍정하라고 조언한다. 이 장면은 단순한 위로를 넘어, 병수가 자신을 향한 타자의 시선과 사회적 규범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 정체성을 주체적으로 받아들일 것을 촉구하는 말이다. 하지만 이 장면은 동시에, 재희 자신이 오랜 시간 동안 경험해 온 욕망의 충돌을 반영한다. 그녀 역시 타자의 시선 속에서 상처 입고, 사랑을 통해 자신을 증명하려는 욕망과 맞서왔다. 그녀의 존재는 사랑 자체보다 사랑을 통해 ‘나로 존재하기’를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의 구조 위에 서 있다. 그녀가 욕망하는 것은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을 통해 비로소 형성되는 자기 자신이다. 재희는 끊임없이 타자의 시선과 규범적 질서에 부딪히며, 그 충돌 속에서 자신을 증명하려 한다. 라캉의 말처럼, 그녀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에 응답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해체하고자 하는 내적 긴장 속에 존재한다.
서장원의 단편소설 『리틀 프라이드』에 등장하는 화자 토미는 트랜스젠더 남성으로, 자기 존재를 타자의 시선 속에서 조심스럽게 구성하고 있다. 그는 오스틴이라는 인물을 통해 사회가 이상적으로 설정한 남성성, 그리고 자본주의적 욕망 구조가 어떻게 반복되고 재생산되는지를 비판적으로 관찰한다. 오스틴은 외모, 자본, 관계 등에서 사회적으로 승인된 이상적인 남성상을 구현하는 인물로 보이지만, 토미는 그 이상이 실은 타자의 욕망을 그대로 내면화한 결과라는 사실을 직감한다. 그는 오스틴을 욕망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런 방식의 남성성 자체를 부정한다. 토미는 오스틴처럼 되지 않으려는 내적 거리감을 유지하면서, 그가 살아가는 세계의 기준과 언어에 대해 의문을 던진다. 그의 욕망은 동일시가 아니라, 기존 질서에 저항하면서 자신만의 위치와 언어를 모색하려는 시도이다. 그의 '리틀 프라이드'는 이름 그대로 작고 연약하지만, 결코 소멸되지 않고 언어와 몸짓의 층위에서 살아 있는 흔적처럼 남는다.
이러한 맥락으로 볼 때, 나의 글쓰기 욕망은 철저히 결핍 위에 서 있다. 나는 문장을 통해 나 자신에게 묻는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결핍에서 이 욕망을 추구하게 되었을까. 아마도 그 시작은 보잘것없었던 나의 삶에 대한 회한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누구보다 성실하게, 때로는 분투하며 살아왔지만, 내 손에 남겨진 것은 허망하고 공허한 시간들이었다. 열심히 살아왔다는 사실조차 스스로 위로가 되지 않을 만큼 삶은 나를 비껴갔고, 그 남은 자리에 나는 문장을 앉혔다. 내 글은 그러한 허무의 자리에 심은 작고 단단한 의지이기도 하다. 욕망은 나를 부추기는 것이 아니라, 나로 하여금 내가 살아온 삶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거울처럼 존재한다. 라캉은 욕망은 결코 충족되지 않는 구조라고 보았다. 흔히 “욕망은 충족되는 순간 사라진다”는 식의 요약으로 그의 사유가 설명되기도 하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라캉은 욕망을 어떤 특정한 대상으로 향하는 감정적 열망이라기보다는, 끝없이 미끄러지고 대체되는 상징적 결핍의 구조로 이해했다. 욕망은 충족되기 위해 움직이지만, 그 충족은 언제나 잠정적이며 불완전하다. 어떤 대상을 얻는 순간 욕망이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 충족이 곧 또 다른 결핍을 불러오고, 욕망은 다시 미끄러진다. 욕망은 죽지 않고, 다른 이름과 다른 형상으로 자신을 재구성한다. 그러므로 욕망은 실체라기보다 움직임이며, 반복이고, 끝없이 밀려나는 언어의 흔적이다.
그렇다면 나는 이 글을 쓰는 지금, 어떤 욕망 속에 있는가. 글을 통해 무엇을 얻고 싶은가. 아마도 ‘이해받고 싶다’, ‘살아 있다는 증거를 남기고 싶다’, ‘누군가에게 닿고 싶다’는 갈망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욕망은 충족되지 않을 것이다. 혹은 충족되는 듯한 순간, 나는 곧 새로운 글, 새로운 인정, 새로운 목소리를 향해 다시 몸을 기울일 것이다. 그것은 패배가 아니라 구조다. 나는 나의 욕망을 소멸시키려 하지 않고, 그 미끄러짐을 따라 쓰고, 쓰고, 또 쓸 것이다. 더불어 나는 더 이상 욕망을 해소하려 하지 않는다. 나는 욕망을 견디는 일, 돌보는 일, 그리고 그 결핍을 말의 형태로 건너가는 일에 집중하고 싶다. 그것이 내게 글쓰기란 무엇인가를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글쓰기란 말해지지 않는 것을 끝내 말해보려는 시도이며, 타자의 욕망에서 나를 떼어내어 다시 나만의 언어로 숨 쉬게 하려는 사적인 저항이다.”
그렇기에 이 글은 단순한 이론 적용도, 자기 고백도 아니다. 라캉이라는 타자의 사유를 통해 나 자신의 욕망을 사유해보려는, 하나의 사적 분석의 시도였다. 그리고 나는 이 사적인 시도를 통해, 다시 쓰고 싶은 나의 욕망을 조금 더 이해하게 되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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