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영의 소설 《코끼리》를 읽고
다문화의 경계에서 존엄을 잃어버린 삶
― 김재영의 소설 《코끼리》를 읽고
벚꽃잎들이 지고 난 자리에 붉은 버찌들이 열리고, 5월의 햇살은 연초록 잎들에게 한껏 윤기를 더한다. 캠퍼스는 어느덧 축제의 계절을 맞아 생기로 가득 차 있다. 요즘 들어 문득 눈에 띄는 건, 교정 곳곳에서 자주 마주치는 외국인 유학생들의 얼굴이다. 중국을 비롯해 베트남, 스리랑카, 몽골 등 다양한 국가에서 온 학생들이 이제는 낯설지 않다. 그들은 우리와 같은 강의실에 앉고, 같은 하늘 아래에서 같은 미래를 준비한다. 하지만 대학 커뮤니티에서 생각 없이 내뱉는 혐오의 글들을 볼 때마다 섬뜩한 감정이 인다. 누군가의 일상과 얼굴이 그렇게 가볍게 대상화되고, 조롱당하는 모습을 보면 ‘다문화 사회’라는 말이 얼마나 허위로 작동할 수 있는지를 실감하게 된다. 특히 젊은이들 사이의 이러한 상황은 어디서부터 잘못되어온 것일까. 기성세대인 나로서도 책임 의식 같은 것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바로 이런 시점에서 김재영의 단편소설 《코끼리》를 읽게 되었고, 현대소설론 수업의 토론 작품이기에 이런저런 많은 사유를 할 수밖에 없었다.
단편소설 《코끼리》는 13살 외국인 노동자 2세, 너무 이른 나이에 너무 많은 세계를 보아버린 소년 아카스의 시선을 통해 한국 사회에서 이주노동자와 그 자녀들이 겪는 차별과 소외, 그리고 존엄의 상실을 섬세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여름 햇빛은 정수리로 내려오고 가을 햇빛은 가슴에 와 닿는 땅”, 네팔 출신 아버지와 조선족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아카스는, 어머니가 떠난 후 아버지와 단둘이 돼지 축사 근처에서 살아간다.
그는 아버지의 생일을 맞아 네팔 음식을 만들어주고 싶어 하지만, 재료가 없어 슈퍼에서 향신료를 훔친다. 이 작은 사건은 단지 사춘기 소년의 충동이 아니라, 그의 삶이 이미 결핍과 배제로 이루어져 있다는 현실의 단면이다. 아카스는 친구들 사이에서도, 어른들 사이에서도 철저히 혼자이며, 존재의 위치조차 어딘가에 ‘걸쳐 있는’ 경계적 인물이다.
그의 아버지는 아카스에게 있어 한때 든든한 ‘산’ 같은 존재였다. “아빠는 사실 산 같은 사람이었다. 안나푸르나처럼 크고 밝고 든든한 사람. 그런데도 지금은 돼지들보다 더 구석진 데서 산다.” 이 문장은 아버지의 몰락, 더 나아가 이주민 노동자의 현실을 압축한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아카스에게 조용한 방식으로 삶의 윤리를 전한다.
“손으로 먹어라. 그래야 서둘러 먹지 않고 과식하지 않는다.”
이 말은 단지 식사 예절이 아니다. 그것은 손을 통해 음식을 직접 느끼며 절제하고 천천히 살아가라는 몸의 철학이며, 네팔 고유의 삶의 방식, 나아가 문화적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조용한 선언이다. 그 짧은 문장 안에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마지막 존엄의 방식이 담겨 있다. 아들을 타인의 속도에 억지로 밀어 넣지 않고, 스스로의 리듬과 문화로 살아가도록 이끄는 ‘고요한 유산’이자 ‘작은 존엄’인 것이다.
이 작품이 특히 탁월한 이유는, 다문화 공동체 내부의 균열과 갈등까지도 숨기지 않고 정직하게 보여준다는 데 있다. 파키스탄 청년 알리는 같은 외국인 노동자인 비재 아저씨가 아들의 심장 수술을 위해 어렵게 마련한 돈을 훔쳐 달아나고, 비재 아저씨는 또 인도 출신의 ‘노랭이’ 아저씨가 본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모은 돈을 다시 훔친다.
이는 단지 한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경쟁과 위계가 이미 공동체 내부에서도 연속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현실을 보여준다. ‘다문화 사회’는 종종 포용과 연대의 이름으로 미화되지만, 작가는 그 이면에 존재하는 고립과 비정함, ‘살기 위해 누군가를 밟아야 하는 세계’를 솔직하게 드러낸다.
아카스는 비재 아저씨가 노랭이 아저씨를 쓰러뜨리고 그의 앞가슴에서 심장을 뜯어내듯 지갑을 빼앗는 장면을 목격하고, 극심한 공포와 혼란에 사로잡힌다.
“나는 눈을 질끈 감는다. 눈꺼풀 안쪽으로 은색 코끼리 한 마리가 나타난다. 구덩이에 발이 빠진 코끼리는 큰 귀를 펄럭이며 빠져나오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하지만 발버둥 칠수록 뒷다리는 점점 더 깊이 빨려들어간다. 구덩이는 삽시간에 시커먼 늪으로 변하더니 뭐든 집어삼킬 태세로 거세게 휘돌아간다. 아, ‘외(소용돌이)다. 현기증이 일도록 빠르게 소용돌이치는 ‘외……’. 꼬끼리는 맥없이 빨려 들어간다. 미처 비명을 지르지 못하고 눈을 부릅뜬 채, 눈앞이 온통 까맣다.”
이 장면은 단순한 환상이 아니라, 아카스의 심리적 붕괴와 이주민 공동체의 무력감이 상징적으로 표출된 클라이맥스이다. 구덩이에 빠진 은색 코끼리는 존엄을 지키려 발버둥치는 존재가 오히려 더 깊은 늪으로 침몰하게 되는 구조적 현실을 은유한다. 특히 ‘외’라는 소용돌이의 언어는 아카스가 감당해야 했던 타자화의 감각, 사회적 소외의 중심을 함축하며, 은색이라는 차가운 색감은 그 절망의 차디찬 감정을 시각화한다. 코끼리는 끝내 눈을 부릅뜬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로 사라지며, 이는 곧 아카스 자신이 느낀 언어화 불가능한 공포와 침묵의 고통을 드러낸다.
“코끼리는 사실 구름이었다. 신들의 왕 인드라를 태우는 구름이었는데, 브라마가 세상을 만들면서 땅속에 박혀 세계를 떠받치는 기둥이 되었다.”
이 신화적 구절은 한때 존엄했던 존재가 기능적 하부 구조로 격하되는 과정을 은유하며, 오늘날의 이주노동자가 사회를 지탱하면서도 사회로부터는 이름도 얼굴도 기억되지 못하는 존재라는 현실을 뼈아프게 드러낸다. 그것은 곧 존엄을 잃어버린 삶의 구조를 말한다.
2004년 이 작품이 발표되었을 당시, 한국 사회는 ‘단일민족’이라는 국가 신화에 강하게 매몰되어 있었고, 타자에 대한 불편함과 거리를 정당화하고 있었다. 2025년 지금, 외국인 유학생은 캠퍼스의 일상이 되었고 다문화는 하나의 시대적 담론이 되었지만, 여전히 ‘같은 사람’으로 느껴지지 않는 벽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일상의 도처에서, 혐오와 차별의 잔재는 더 교묘한 방식으로 퍼져 있다. 《코끼리》는 이런 현실을 날카롭게 응시하며, 다문화라는 이름 아래 감춰진 불평등과 무관심의 구조를 파고든다.
나는 젊은 시절, 태국에서 약 3년을 지내며 그들의 사회 속에서 수많은 다정한 순간들과 마주했다. 언어도 다르고 문화도 달랐지만, 그들은 나를 ‘외국인’이 아니라 ‘함께 있는 사람’으로 대했다. 시장 골목에서 마주한 웃음, 식탁 위에 놓인 음식을 건네던 손길,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나누었던 울음과 웃음. 그 기억은 나에게 진짜 ‘같이 있음’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었다. 그것은 경계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경계를 서로 인식한 채 마주 앉아 손을 내미는 일,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등을 돌리지 않는 태도였다. 《코끼리》는 그런 기억과 감각을 되살려 주었고, 내가 오늘의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고 살아가야 하는지를 묻는 작품이었다.
문학은 단지 이야기의 재현이 아니라, 우리가 망각한 세계의 이면을 다시 보게 하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 김재영의 《코끼리》는 바로 그런 문학의 윤리와 사유를 우리에게 요구한다.
5월, 연초록이 빛나는 이 교정을 걷는 지금, 나는 우리가 정말로 함께 걷고 있는지를 다시 묻는다. 말로만 외치는 ‘다문화’가 아니라, 그 안에 살고 있는 누군가의 외로움과 침묵까지 마주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같이 있음의 사회에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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