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국제 영화제 개막작 『콘티넨탈 '25』 비평문
전주 국제 영화제 개막작 『콘티넨탈 '25』 비평문
– 세계의 부조리, 혹은 잡탕 시대의 초상
지난 4월 30일, 전주국제영화제가 개막했다. 어렵사리 티켓을 구해 친구와 함께 소리의 문화 전당 모악당을 찾았다. 오후 6시 30분부터 시작된 개막식은 장장 한 시간 반 동안 이어졌고, 솔직히 말해 꽤 지루한 순간들이 흘렀다. 그 긴 시간 동안 우리는 중간중간 눈을 마주치며 웃었고, 결국 내가 말했다.
“우리 생전에 이 촌할매들이 국제 영화제 개막식에 다 오다니. 내 버킷리스트 중에 하나 이뤘네.”
우리는 그 말에 깔깔 웃었고, 잠깐의 피곤함도 씻겨 내려갔다. 그리고 드디어, 기다리던 개막작이 시작되었다. 〈콘티넨탈 '25〉. 이 낯선 제목의 영화가, 어쩌면 우리 삶에도 낯선 질문을 던질 것임을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루마니아 출신 라두 주데 감독의 영화 〈콘티넨탈 '25〉는 2025년 전주국제영화제 개막작이자, 2024년 베를린 국제영화제에서 은곰상(각본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스마트폰 하나로 전편을 촬영한 이 영화는, 노숙자 퇴거라는 단순한 사건을 중심으로, 사회적 약자, 민족주의, 디지털 감시, 전쟁, 철학, 인간의 죄책감과 같은 동시대의 거의 모든 구조적 모순을 겹겹이 껴안는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법원 중재관 오르솔랴는 ‘콘티넨탈 부티크’ 호텔 건설 프로젝트로 인해 거리에서 거주 중인 노숙자에게 퇴거 명령을 전달하라는 임무를 맡는다. 노숙자는 “짐을 정리할 시간을 조금만 더 줄 수 없습니까?”라고 요청하면서 그는 결국 자살한 상태로 발견된다. 그후 영화는 중재관 오르솔랴의 죄책감을 배경으로 이 사건을 단순한 개인의 비극으로 축소하지 않고, 구조적 무관심이 인간을 어떤 절단의 지점으로 밀어붙이는지를 드러낸다.
이 노숙자가 처음 등장하는 장면에서, 그는 도심의 공원 한가운데 세워진 공룡 모형들 사이를 걷고 있다. 공원 공룡 조형물 사이에는 묘한 긴장감이 흐르는데, 나는 왜 동물 플라스틱 모형이 등장할까, 궁금할 수밖에 없었는데, 영화를 마지막 까지 보았을 때에는 그 상징, 즉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공룡이라는 존재와, 사회에서 지워진 노숙자라는 존재가 ‘현실에서 배제된 존재들’로서 은유적으로 겹쳐지는 순간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공룡은 이후 영화의 마지막에도 등장한다. 오르솔랴는 사건 이후 다시 그 공원을 찾고, 동일한 공룡 모형들을 바라본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그 침묵 속엔 명확한 감각의 흔들림이 있다. 처음엔 무심히 지나쳤던 풍경이, 이제는 다시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반복 구조 속에서 공룡은 단지 배경이 아니라, 이 세계에 더 이상 쓸모 없다고 여겨지는 모든 존재들을 상징하는 형상으로 자리한다. 사라졌지만 남아 있는 존재, 잊혔지만 여전히 시야 속에 있는 존재. 노숙자, 소수민족, 패배한 사상, 쓰다 버려진 윤리, 실패한 혁명과 같은 것들이 공룡의 이미지 안에 겹쳐진다.
또한 영화의 중간 장면에서 전혀 다른 맥락으로 등장하는 대사
“깡통처럼 죽었다.”
는, 루마니아 맥락과는 무관하게, 한국 사회의 노동 현실에 대한 감독의 비판으로 별도로 읽힌다. 라두 주데 감독은 실제 인터뷰에서, 한국의 한 노동자가 죽음을 당한 뒤 감정 없이 ‘처리’되는 현실에 충격을 받았다고 밝힌 바 있다. 이 대사는 노숙자의 자살과는 연결되지 않지만, 한국의 노동 현실이 생명을 어떻게 관리 가능한 객체로 취급하는지를 강하게 고발하는 장치로 삽입된 것이다.
영화는 이처럼 다양한 국가의 현실을 병렬적으로 구성하며, 민족, 계급, 감시, 혐오, 철학, 전쟁 등 서로 이질적인 요소들을 하나의 혼란한 시공간에 병치한다. 나는 처음엔 이 영화가 하나의 예술 형식을 모독하는 잡탕 같은 인상을 주었다고 느꼈다. 그러나 영화가 끝날 무렵, 그 과잉된 병치와 불협화음 자체가 오늘날 세계의 진실에 더 가깝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트란실바니아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헝가리에서 루마니아로 편입된 지역으로, 오늘날까지 헝가리계 소수민족이 존재하는 민족 갈등의 상징지이다. 영화 속 오르솔랴는 헝가리계 루마니아인으로, 사이버 공간에서 ‘헝가리 여자’로 낙인찍히고 혐오 발언을 듣는다.
“우리는 물과 공기만으로도 감사해야 한다고?”
이 대사는, 혐오가 어떻게 겸손이나 감사의 말투로 포장되어 유포되는지를 보여주는 강력한 장면이다.
또한 영화 속에, 우크라이나 드론이 러시아 병사를 급습하는 장면을 담아낸다. 하지만 그것은 전쟁 묘사가 아니다. 러시아 군인은 드론이 다가오는 순간, 자신 스스로 드론 공격에 대비하는데 자신이 소유한 폭탄을 머리가까이에 두어 즉사를 택한다. 그는 부상을 입고 삶을 끌고 가기보다는, 그 자리에서 즉사하기를 선택하는 것이다.
이 장면은 한 인간이 더 이상 존엄 있는 삶을 기대할 수 없는 조건 아래서 어떤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지에 대한, 가장 비극적인 철학적 장면이다. 죽임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죽기를 결정하는 주체로서의 전환, 그 자체가 영화 전체의 윤리적 긴장과 연결된다.
이 영화는 또한, 중반 이후 동양철학과 선(禪) 사상에 대한 토의를 길게 이어가며, 전통적 지혜와 오늘날의 윤리 사이에 놓인 단절과 충돌을 포착한다. 등장인물들은 선사상의 “비움”과 “지켜보는 자의 태도”를 논하면서도, 실제로는 자기 위치에서 무엇도 비우지 못하고, 무엇도 외면하지 못하는 서구적 자의식의 곤란을 반복한다. 영화는 이 장면을 통해 ‘동양’이라는 타자적 사유의 전통조차도 어떤 감각의 욕망으로 소비되는 현실을 비판적으로 응시한다. 이는 단순한 동서양의 대비가 아니라, 세계화된 윤리의 공허함에 대한 자의식적 탐문에 가깝다.
등장하는 대사들 중에는 놀랍게도 2023년작 영화 〈퍼펙트 데이즈〉의 주인공 ‘히라야마’에 대한 언급이다. 오르솔랴는 친구와의 대화 속에서 일본의 공공화장실을 청소하는 히라야마의 고요하고 단정한 하루를 부러워하면서, 자신은 왜 그런 삶을 살 수 없었는지를 자문한다. 그러나 이 장면은 감정적 동일시를 유도하기보다는, 현대인의 불안한 욕망이 타인의 '완결된 고요함'을 어떻게 소비하고 대리만족하는지를 드러낸다. 〈퍼펙트 데이즈〉의 ‘고요함’이 이 영화에선 다르게 읽힌다. 정리되지 못한 죄책감, 중재자로서의 무기력, 언어로 포착되지 않는 현실의 무게 속에서 ‘히라야마’는 관념적 이상향으로만 남는다. 오르솔랴는 결국 그 고요에 다가가지 못한 자로, 자신의 불완전한 삶과 화해해야만 하는 상황과 연결되는 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영화는 이와 나란히, 오르솔랴는 끊임없이 묻는다.
“나는 옳은 일을 한 걸까?”
그녀의 질문은 자책이자 고백이며, 아니, 어쩌면 변명을 찾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는 제도 속에 살아가는 모든 인간이 내면에서 경험하는 윤리적 동요다. 영화는 이 물음을 통해 관객 자신에게 되묻는다. 너라면 과연 멈춰설 수 있었을까?
이 모든 이야기들은 스마트폰이라는 장치를 통해 촬영된다. 스마트폰은 현대인의 시선, 감시의 도구, 기록과 소통의 도구이며, 동시에 사이버 폭력의 매개체이자, 죄책감의 방관자이기도 하다. 영화는 이 매체를 단순한 촬영 장비로 쓰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윤리가 어떻게 중계되고, 조작되고, 소비되는지를 시각적으로 구현하는 방식으로 사용한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다시 공룡이 등장한다. 처음과 같은 공원, 같은 모형들. 그러나 그 앞에 선 오르솔랴는 이제 다르다. 공룡은 말이 없지만 존재한다. 그것은 묻는다.
“너는 이 존재들을 보았는가?”
공룡은 더 이상 쓸모 없는 존재들에 대한 상징, 혹은 사라졌지만 아직 끝나지 않은 질문이다. 실패한 혁명, 묻힌 윤리, 잊힌 존엄. 공룡은 영화 속에서 이 시대의 유령들이다.
〈콘티넨탈 '25〉는 조화롭지 않다. 그러나 그 불협화음 속에서 오늘의 세계가 진실하게 드러난다. 예쁘지 않지만 정직한, 불편하지만 필요한 질문. 이 영화는 그런 영화다.
우리는 그것을 보고, 지나칠 수도 있고, 멈춰 설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건, 공룡은 여전히 거기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본 이상, 우리는 이전과 같은 눈으로는 세계를 다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영화는 끝났다. 스크린이 꺼지고 불이 켜진 순간, 나는 한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 혼란스러웠다. 과연 이것이 예술인가? 이토록 조악하고 과잉되고 조화롭지 않은 서사와 장면들, 어떤 것은 너무 직접적이었고, 어떤 것은 너무 모호했다. 나는 예전부터 예술은 완결되고 밀도 있는 세계여야 한다고 믿어왔다. 고요하고 내적인 진실, 형식의 정제와 감정의 절제 속에서 오는 미학적 울림을 나는 ‘예술’이라 생각해 왔다.
그러나 〈콘티넨탈 '25〉는 나의 그런 예술관에 작은 틈을 냈다. 그 틈은 조용하지 않았고, 예쁘지 않았으며, 논리적이지도 않았다. 오히려 시끄럽고, 불균질하며, 불쾌한 울림을 남겼다. 그리고 바로 그 불쾌함이 내가 지금까지 놓쳐왔던 동시대의 윤리, 존재의 정치성, 죽음의 구체성을 불쑥 내 눈앞에 들이밀었다.
나는 지금도 고민한다. 이것이 정말 예술일까? 예술은 이런 식으로 세상을 말해도 되는 걸까? 그러나 확실한 것은, 이 영화가 나에게 질문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예술이란 정답이 아니라, 질문이 되어야 한다는 것. 정제된 감탄보다, 불편한 성찰이 먼저여야 한다는 것. 아니, 최소한 예술이란, 내가 꺼리던 질문들을 다시 나 자신에게 던지게 만드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
〈콘티넨탈 '25〉는 내게 그러한 예술이었다. 내가 몰랐거나, 외면했거나, 감당할 수 없었던 현실들을, 예술의 이름으로 비집고 들어온 낯선 질문이었다. 나는 지금, 그 질문 앞에 서 있다. 공룡처럼 오래된 질문이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는 질문. 지금-여기의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는, 예술이라는 부조리한 생명체.
이제 막 시작된 5월의 눈부심이 나를 멈춰 세운다. 모든 것이 살아나는 이 계절에, 나는 한 편의 영화 속에서 죽음과 배제, 폭력과 질문을 마주했다. 잎들은 연두를 지나 초록으로 번지고, 햇빛은 너무도 밝아 눈을 감게 만든다. 나는, 그 눈부심 속에서 오히려 보지 않으려 했던 것들을 다시 보게 되었다. 5월이라는 계절은 원래 찬란해야만 했으나, 이 찬란함 속에 비집고 들어온 공룡의 침묵, 노숙자의 자살, 참호 속의 결단, 그리고 나의 흔들리는 예술관을 함께 안고 서 있다. 그 모든 부조리함이 역설처럼 나를 더 깨어 있게 만들었다.
눈부신 5월, 나는 예술을 다시 묻는다. 그 질문 앞에서,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예,
이것 역시 예술이었을지도 모른다고. 그 경계 없음이 오히려 예술의 본질일 것이라고.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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