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을 넘어 머무름으로― 『빛과 멜로디』가 가장 깊었던 이유
침묵을 넘어 머무름으로
― 『빛과 멜로디』가 가장 깊었던 이유
나는 이번 학기 복수 전공으로 국문과 수업을 듣고 있다. 현대소설강독이라는 과목을 유 교수님께 수강하고 있는데, 수업의 흐름은 먼저 현대소설에 대한 이론 강의를 진행한 뒤, 조경란의 『그들』, 백온유의 『반의반의 반』, 김멜라의 「이응이응」, 조해진의 『빛과 멜로디』, 이 네 작품을 차례로 읽는 방식이었다. 강의 후반부, 교수님께서는 이들 중 자신이 가장 인상 깊게 읽은 작품 하나를 골라 그 이유를 중심으로 에세이를 써보라고 하셨고, 나는 그 요청에 조응하여 다음과 같은 글을 쓰게 되었다.
“태엽이 멈추면 빛과 멜로디가 사라지고 눈도 그치겠죠.” (책 10쪽)
나는 바로 이 한 문장의 매혹으로부터 『빛과 멜로디』를 읽기 시작했다. 이 작품을 통해 내가 가장 깊이 감각하게 된 것은, ‘살아 있는 존재를 마주한다는 것’의 무게였다. 그 무게는 단지 버겁거나 무거운 것이 아니라, 그것만으로도 어떤 책임을 발생시킨다. 그리고 그 책임은 완수되거나 설명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가 외면할 수 없고, 피할 수 없으며, 결국은 ‘응답해야만 하는’ 부름이다.
나는 그 응답을 때때로 회피했고, 너무 쉽게 잊었다. 그러나 조해진은 말한다. 잊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다시 세계를 감아야 한다고. 빛과 멜로디는 누군가의 손끝에서 시작된다고. 그 손끝의 떨림을, 나는 이제 안다. 그것은 확신의 몸짓이 아니라, 망설임의 선명함이다. 말보다 오래 남는 응시, 설명보다 깊이 각인되는 침묵 속에서, 조해진의 문학은 작고 느린 진동처럼 나를 흔들었다.
조경란의 단편 『그들』은 침묵과 감정의 유예, 타자성과의 거리라는 철학적 주제를 매우 정교하게 다루지만, 그 감정은 끝내 회복되지 않는다. 종소, 영주, 최 교수, 상현 모두는 말하지 않고, 감정을 유보하며 관계의 윤리를 탐색하지만, 독자로서 내가 느낀 것은 끝내 닿지 않는 거리였다. 삶은 유지되지만, 함께 있다는 감각은 느껴지지 않았다.
반면 『빛과 멜로디』는 살아남은 자들이 곁에 머무르는 것만으로도 삶을 회복시킬 수 있다는 조용한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말없이도,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누군가의 손을 붙잡고 머무를 수 있는 관계. 이 점에서 『그들』이 “함께 있으면서도 끝내 외면하는 공동체”를 그렸다면, 『빛과 멜로디』는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곁에 있는 존재들”을 보여주었다.
백온유의 『반의반의 반』은 삼대 여성의 시점을 통해 가족이라는 공동체 내부의 감정 균열을 깊이 있게 탐색한다. 특히 모성과 돌봄, 기억과 책임에 대한 질문이 날카롭고도 조심스럽게 제기된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끝내 가족이라는 한정된 틀 안에서만 순환한다. 그 고통은 너무 익숙하고, 너무 안으로만 파고든다. 나는 그 순환 구조 안에서 어떤 정직함과 슬픔을 감지했지만, 더 이상은 나아가지 못하는 감정의 한계를 느꼈다.
이에 비해 『빛과 멜로디』는 가족을 넘어선 세계, 타자와의 연대라는 윤리적 지평을 확장시킨다. 낯선 타자(살마, 나스차)를 기억하는 일, 전쟁이라는 비인간적 조건에서도 인간의 손을 놓지 않으려는 감각이 담겨 있다. 이 감정은 단지 개인의 것이 아니라, 세계의 가장자리에 열려 있다. 서사의 배경이 된 난민캠프, 눈발 흩날리는 거리, 사진기 너머의 응시는 나에게 감정이 공간을 바꾸고, 공간이 감각을 바꾼다는 사실을 다시금 가르쳐주었다.
김멜라의 「이응이응」은 언어의 해체와 감각의 잔상 속에서 상처받은 주체의 감정 층위를 보여준다. 이 작품은 오히려 서사보다는 감각, 의미보다는 발화의 불가능성에 주목한 시적 문학에 가깝다. 그러나 그래서일까, 독자로서 내가 느낀 감정의 파장은 조용히 맴돌기는 했지만, 삶을 다시 감아 올리는 구체적인 윤리의 감각이나 관계의 회복 가능성은 느끼기 어려웠다. 그 고통은 오히려 ‘형식’ 안에 봉인된 채, 해방되지 못한 채 남겨진다.
그에 비해 『빛과 멜로디』는 감정이 응축된 언어로 쓰였음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서사의 진보, 그리고 감정의 재구성이 있었다. 특히 전쟁이라는 역사적 비극과 권은이라는 인물의 재기, 살마와의 조용한 손 맞잡음은 철학과 서사, 감정과 윤리가 완전히 결합된 순간이었다.
『빛과 멜로디』는 누군가의 생을 기록하려는 의지가 아니라, 누군가의 존재 곁에 조용히 머무르려는 마음이었다. 그리고 그 존재가 잊히지 않도록, 내가 그를 기억하는 방식으로 세계를 다시 감아 올리는 일이었다.
나에게 글쓰기는 멈춘 시간을 다시 움직이게 하는 일이다. 잊히지 않기 위해, 놓치지 않기 위해, 사라진 감각들을 다시 불러내기 위해 나는 문장 하나하나를 조용히 이어 붙인다. 오늘도 나는 마음의 작은 태엽을 천천히 감아 올린다. 언젠가 그 문장이 누군가에게 닿아, 한 줄기 빛처럼, 낮은 음표처럼 스며들기를 바란다.
그렇게, 다시 시작된다.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가볍게 내리는 이슬처럼, 오래 머무는 숨결처럼. (끝)
#글쓰기의윤리 #감정의기억 #세계의감각 #조용한연대 #문장으로감아올리기 #빛과멜로디 #타자의존재 #침묵의몸짓 #다시쓰기 #감정의회복 #태엽감기 #말없는응답 #존재의책임 #서사의철학 #현대소설강독 #국문과에세이 #문학의윤리 #기억의문장 #눈발처럼 #느린진동 #응시와머무름 #관계의예술 #국립군산대학교 #군산대국문과 #군산대철학과 #lettersfromatravel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