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대녕 『은어낚시통신』을 읽고: 은어처럼 잊혀진 것들을 향해
은어처럼 잊혀진 것들을 향해 — 윤대녕 『은어낚시통신』을 읽고
누군가를 잃었다는 감각은, 내 안의 어떤 문장이 중간에서 사라졌다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잘 쓰이다가 도중에 지워진 한 줄의 글, 혹은 보내지 못한 편지와 같다. 윤대녕의 『은어낚시통신』은 그런 배경으로 이루어진 소설이다. 응답하지 않는 타자를 향해, 계속해서 던져지는 질문들로 구성된 고요한 독백. 나는 그 책을 읽으며, 내 안에도 답장 없는 편지가 한 통쯤은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오래 했다.
이 작품은 오래전에 읽은 단편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시간이 지난 뒤 다시 펼쳤을 때는 전혀 다른 울림으로 다가왔다. 내가 가지고 있는 『은어낚시통신』은 1995년 3월 28일자 1판 1쇄 인쇄본이다. 2010년 같은 출판사에서 다시 출간되었다니, 오랜 시간을 건너 다시 독자 곁으로 돌아온 셈이다. 오래된 책장을 넘기며 나는 이 작품이 어째서 기억 속에서 잊히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천천히 되짚게 되었다.
“그들이 내게 첫 번째 통신을 보내온 것은 수요일의 늦은 밤이었다.”
작품의 서두에 놓인 이 문장은 무언가 시작되기 직전의 낯섦과 불안을 품고 있다. 현실과 비현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도착한 낡은 엽서 한 장처럼, 그 문장은 독자를 으스스한 호기심 속으로 이끈다. 그리고 ‘나’라는 인물의 깊은 결핍, 내면 어딘가의 방으로 들어가는 문이 된다.
소설에서 말하는 이 첫 번째 통신은 단순한 연락이나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주인공을 일상으로부터 이탈시켜, 정리되지 않은 고통과 오래된 질문들을 마주하게 만드는 내면의 호출이다. 표면적으로는 과거의 ‘그녀’로부터 도착한 것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주인공 내부에서 떠오른 무의식적 신호에 가깝다. 잊었다고 믿었던 과거가 낯선 방식으로 돌아왔을 때, 주인공은 마침내 스스로의 상실과 다시 마주하게 된다.
주인공은 한때 예술사진을 했고, 광고사진을 거쳐 지금은 신문사의 객원 리포터로서 ‘길 따라 물 따라’란 기획 코너에 글을 기고하며 살아간다. 도시의 일상에서 스스로 한 발 물러나 있으며, 반복적인 관찰과 기록, 고립과 침묵의 시간을 자처한다.
이야기는 아파트 현관의 우편함에서 시작된다. ‘은어낚시통신’이라는 이름이 컴퓨터 글씨체로 인쇄된 낯선 엽서가 꽂혀 있는 장면. 분명 익숙한 일상의 배경인데도, 그 순간부터 배경은 서서히 비현실의 감각으로 전이된다. 그는 도시 속에서도 고립을 선택하고, 은어 낚시라는 반복과 침잠의 리듬을 통해 자기 안의 세계로 더욱 깊이 들어간다.
그에게 도착한 엽서는 과거 연인이었던 ‘그녀’로부터 온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살아 있는 자의 목소리인지, 아니면 내면 깊은 곳에서 떠오른 망상의 파편인지조차도 분명하지 않다. 엽서는 읽히지만, 응답할 수 없다. 그는 그녀와의 교신을 꿈꾸지만, 실은 상실된 세계와의 조심스러운 접속을 시도하는 중이다. 그 고요한 몸짓은 은어의 회귀성과 닮아있다.
라캉은 말한다. 인간은 결핍을 중심으로 존재한다고. 『은어낚시통신』 속 ‘그녀’는 실재하는 인물이 아닐 수도 있다. 엽서는 분명 그녀를 떠올리게 만들지만, 그것이 진짜 그녀로부터 왔다는 확신은 없다. 오히려 그녀는 주인공의 상상계에서 복원된 타자, 사라진 감각과 결핍이 형상화된 이미지에 가깝다. 그는 타자의 부재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 부재를 통해 자기 내부의 균열을 더듬고, 다시 들여다보며, 마침내 받아들이고자 한다.
윤대녕의 문장은 빠르지 않다. 오히려 멈춰 선다. 설명하지 않고 감싼다. 바람이 불다 멈춘 결의 흔적처럼, 의미를 직선적으로 전달하기보다 정서의 여백을 남기는 방식으로 독자와 접속한다. 이러한 문체는 단지 감상적인 장식이 아니라, 말해질 수 없는 것에 도달하기 위한 윤리적 시도이기도 하다. 독자가 직접 그 여백을 더듬으며 읽어야만 의미가 생성되는 문장들. 소설은 그 자체로 하나의 고요한 은유처럼 존재한다.
작품 서두에 빌리 홀리데이의 음악이 등장하는 장면이 있다. 나는 빌리 홀리데이의 음악을 즐기며 그녀의 삶을 반추하며 나의 삶의 무늬에 대해 생각하는데 전화 속 여자가 “빌리 홀리데이를 듣고 계시는 군요”라고 말했을 때, 작품 속 나는 빌리 홀리데이를 알고 있는 누군가와는 좀 통할 것 같은 기분을 느끼는데 나 또한 이 문장을 읽었을 때 잔잔한 흥분을 느꼈다.
재즈 마니아인 내게 빌리 홀리데이라는 이름만으로도 이 작품에는 뭔가 더 깊은 떨림이 있겠구나 하는 기대였다. 하지만 곧 이어지는 “뇌수에 바늘 끝이 와 닿은 느낌”이라는 문장을 보고는 실소가 나왔다. 감정의 과잉, 혹은 그 시대만이 허용할 수 있었던 문학적 진심. 지금의 시선으로 보면 어쩌면 유치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 진심 어린 문장이야말로 우리가 어느새 잃어버린 감정의 농도, 혹은 절박함의 밀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품의 제목은 ‘은어’가 아니라 ‘은어낚시통신’이다. 여기서 ‘통신’은 단순한 의사소통의 수단이 아니라, 현실과 환상, 생자와 사자, 현재와 과거 사이를 넘나드는 상징적 신호다. 그는 그 신호에 귀 기울이며,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부재를 견디는 법을 배운다. ‘은어’는 강에서 태어나 바다에 살다 다시 강으로 돌아와 알을 낳고 생을 마감하는 생태를 지닌 물고기다. 이 회귀성은 존재의 시원으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과 포개진다. 은어를 낚는 행위는 단지 자연 속 고요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상실을 마주하고 존재의 근원을 더듬는 내면의 제의다.
주인공은 결국 그녀를 찾아 나선다. 그것이 호기심인지, 그리움인지, 아니면 결핍에 대한 무의식의 응답인지 알 수 없지만, 그는 그녀와 연결된 시간의 흔적들을 따라가 마침내 어떤 장소에 다다른다. 그리고 그제야 비로소, 그는 깨닫는다. 그녀의 존재를 통해, 자신 안에 오래도록 남아 있던, 말할 수 없던 상처가 비로소 자각되었다는 것을. “그 먼 존재의 시원, 말하자면 내가 원래 있어야만 하는 장소로 돌아가기까지 나는 보다 많은 밤과 낮을 필요로 해야 했다”고 그는 사유한다.
긴 흐느낌의 시간이 흐른 뒤, 그는 가까스로 그녀에게 다가가, 살아 있는 자의 온기라곤 느껴지지 않는 그녀의 차디찬 손을 완강히 거머쥔다. 아침이 오기까지 그녀의 손을 잡고, 살아온 서른 해를 가만가만 벗어던지며, 내가 원래 존재했던 장소로, 지느러미를 끌고 천천히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는 그들이 보낸 두 번째 통신을 수신했다는 문장으로 이야기는 끝난다.
이 두 번째 통신은 단순한 결말 장치가 아니다. 그것은 첫 번째 통신 이후 주인공이 감내해 온 상실과 애도, 회복과 고백의 시간이 도달한 정점이며, 동시에 ‘다시 사유하는 삶’으로 들어가는 입구다. 주인공이 두 번째 통신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는 더 이상 상실의 수신자이기만 한 존재가 아니다. 그는 이제 존재의 깊은 고요와 마주할 수 있는 사람, 다시 쓰기를 시작할 수 있는 자리에 도달한 것이다.
나는 생각하게 된다. 두 번째 통신이란 과연 타자로부터 온 메시지일까, 아니면 그 타자를 간절히 기다려온 내 안에서 새롭게 떠오른 목소리일까. 윤대녕의 소설은 끝내 응답하지 않는 존재를 향한 끈질긴 사유의 서사이자, 침묵을 끝까지 견디는 언어의 윤리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 끝에서야 비로소, 타자의 부재를 사랑하는 일, 존재의 결핍을 나의 자리로 받아들이는 일이 가능해진다. 어쩌면 두 번째 통신은 다시 쓰는 삶의 첫 번째 문장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는, 이 소설을 통해 무엇을 사유해야 할까.
결국 끝내 응답하지 않는 타자를 향한 기다림은, 그 타자에게 다가가기 위함이 아니라 내 안에 놓여 있는 상처와 결핍을 직면하기 위한 여정이 아니었을까. 내가 그를 기다렸던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깨달음. 윤대녕의 『은어낚시통신』은 그런 방식으로 나를 되돌아보게 했다.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 사이에 흐르는 침묵의 시간, 말해지지 못한 감정의 층위, 잊혔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은 목소리. 그 모든 것에 귀 기울일 때, 비로소 나는 삶을 ‘다시 쓰기’ 시작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사유는 아마도, 우리가 잃어버렸던 언어의 윤리를 다시 찾는 일이 될 것이다.
응답 없는 존재를 향한 인내, 부재와 결핍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감각. 바로 그 감각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여전히 필요하다는 것. 그것이 『은어낚시통신』이 내게 남긴, 가장 조용하지만 깊은 사유의 언어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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