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오후 네 시
#아무짝에도쓸모없는그러나세상구경을하고싶은, 여하튼 쓰기
(13화) 오후 네 시
실내에는 나른한 분위기의 재즈 선율이 감돌고 있었다. 현실에서 살짝 벗어나 그들만의 세계에 빠져드는 듯한 분위기였다.
“자네, 이 노래 들어본 적 있나?”
이 교수는 의자에 앉자마자 음악에 심취한 표정으로 지원에게 물었다.
“네, 익숙한데 정확히 어디서 들었는지는 모르겠어요.”
“영화 My Blueberry Nights의 O.S.T 중 하나인 ‘The Story’라는 곡이지. 노라 존스와 주드 로가 주연으로 나온 왕가위 감독의 영화야. 본 적 있나?”
“아니요. 하지만 왕가위 감독의 다른 작품들은 봤어요. 중경삼림, 화양연화, 아비정전, 해피투게더 같은 영화들요. 할머니가 좋아하셨거든요.”
지원은 이 교수가 언급한 영화를 모른다는 사실이 어쩐지 쑥스러워 너스레를 떨었다.
“아, 그렇군. 할머니 덕분에 그런 명작들을 접했겠네. 지금 들리는 노래는 노라 존스가 직접 부른 곡이야. 그녀의 목소리는 참 달콤하지. 마치 블루베리를 듬뿍 올린 케이크를 먹는 기분이랄까. 그렇지 않은가?”
지원은 재즈에 대해 잘 알지 못했지만, 이 교수의 설명을 들으며 그 분위기에 빠져들고 있었다.
“이 영화에서 노라 존스가 연기한 엘리자베스가 이런 말을 하지. ‘창문을 올려다보면서 깨달았지. 이 길이 아니란 걸. 나는 가끔씩 이 말을 뇌까리네. 선택의 순간에 왔을 때 말이야. 이 길일까, 저 길일까. 늘 인생은 선택을 강요하니까.’”
이 교수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지원은 그의 말이 점점 난해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모호한 분위기에서 벗어나고 싶어 일부러 하품을 했다. 그러나 이 교수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이 영화에서 주드 로와 노라 존스는 키스 장면 하나를 찍기 위해 무려 3일 동안 촬영했다고 하더군. 여러 각도에서, 여러 방식으로 말이지. 특히 주드 로가 노라 존스의 얼굴에 묻은 크림에 키스하는 장면에서는 엔지가 날 때마다 크림을 계속 덧발랐다고 해. 결국 주드 로는 수십 리터의 크림을 먹었고, 노라 존스는 누운 채로 ‘내가 주드 로의 키스를 받고 있다니, 이게 싫을 리 없잖아!’라고 생각했다고 하더군.”
이 교수는 와인 잔을 들고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나직이 덧붙였다.
“어쩐지 오늘 밤엔 그런 키스를 한 번 해보고 싶군.”
지원은 순간 온몸이 얼어붙었다. 교수라는 사람이 학생 앞에서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 혹시 자신을 가볍게 여기는 것은 아닐까? 생긴 모습 때문일까, 아니면 평소의 태도 때문일까? 오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이 교수에게 느꼈던 미묘한 설렘마저 한순간에 후회로 바뀌었다. 자신을 이렇게 대하는 사람에게 호감을 가질 이유가 있을까? 착각이었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교수님, 저 늦어서 가봐야겠어요. 내일 새벽부터 아르바이트가 있어서요.”
지원은 서둘러 핑계를 댔다. 이 교수는 술기운에 자신이 경솔한 말을 했다는 걸 깨달은 듯 몸을 바로 세웠다.
“그런가. 그럼 어서 가 보게. 난 남은 와인을 마저 비우고 가야겠네.”
지원은 서둘러 가방을 챙겨 머리를 숙였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티티카카를 빠져나왔다. 마지막 버스를 놓칠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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