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초반의 일이다. 군산 시민문화회관의 무대 위, 양희은님의 노래가 끝나자 객석은 박수 소리로 출렁였다.
익숙한 선율에 마음을 내어주던 관객들은 어느덧 몸을 들썩이며 그 순간을 누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어진 말로님의 차례(이때 말로님은 정말로란 이름으로 활동했다).
하지만 그녀가 첫 음을 내뱉기도 전에 객석은 서서히 비어갔다. 하나둘 슬그머니 빠져나가는 사람들, 적막해지는 공간, 그러나 그녀는 흔들림 없이 노래했다. 텅 비어가는 객석이 아닌, 여전히 남아 있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나는 그 소리에 붙들려 숨을 삼켰다. 마치 우리만이 알고 있는 비밀을 간직한 듯한 순간이었다.
그 시절, 한국에서 재즈는 미처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한 채 흔들리는 새싹과도 같았다. 대도시에서도 오직 재즈 매니아만이 찾는 작은 무대만 있었을 뿐인데, 소도시에서는 더욱 생경한 일이었다. 사람들은 익숙한 것에 귀를 기울이고, 새로운 것 앞에서는 주저하는 법. 그러니 공연장을 떠나는 것이 어쩌면 당연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알았다. 그날 말로님의 목소리는 단순한 노래가 아니었다는 것을. 그것은 선언이었고, 한 시대의 가능성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텅 빈 공간 속에서 그녀의 소리를 들으며 기원했다. 언젠가, 언젠가는 재즈라는 음악이 이 소도시의 무대에서도 당당해지기를.
그리고 2024년 12월 22일. 군산 시민회관은 새로이 태어나 '음악 군산'이라는 이름을 달고, 그야말로 기념비적인 밤을 맞이했다. 임인건(피아노), 김순옥(피아노), 남예지(보컬), 송하철(색소폰), 이원술(베이스), 이도헌(드럼), 찰리정(기타). 한국 재즈의 흐름을 만들어온 이들이 한자리에 모였고, 무대는 그 자체로 축제였다.
20년 전, 그토록 적막했던 공간이 이제는 관객들로 가득 차 넘쳐흘렀다. 그들은 더 이상 낯설어하지 않았다. 리듬을 타며 몸을 흔들었고, 연주의 틈 사이마다 환호성을 보냈다. 나는 숨을 고르며 무대 위를 바라보았다.
이건 단순한 공연이 아니었다. 기다림 끝에 맞이한 하나의 전환점, 한때는 꿈처럼 아득했던 순간의 실현. 재즈는 이제 여기서도 충분히 사랑받고 있었다. 그날을 만들어준 이들이 있었다.
송성진님의 섬세한 기획이 없었다면, 이 밤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첼리스트 송상우님의 깊고도 따뜻한 선율이 없었다면, 클래식을 넘어 재즈 속에서도 이토록 아름다운 조화를 이룰 수 있었을까?
그리고 김두수님. 7080의 우상이었던 그가 무대에 올라 조용히 읊조리던 선율이, 밤하늘을 스치며 오래도록 울렸다. 모든 것이 한데 모여 완성된 밤이었다.
과거와 현재가 겹쳐지고, 한때 외롭던 재즈의 목소리가 이제는 당당히 울려 퍼지는 순간. 나는 믿고 싶었다. 이것이 결코 단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될 흐름이라는 것을.
밤은 깊어 갔고, 새 단장을 마친 시민회관의 불빛이 길 위로 부드럽게 번졌다. 재즈의 여운이 공기 중을 감돌았다. 그리고 나는 생각했다. '말로님, 이제 더 이상 미안해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우리의 재즈는, 이곳에서 충분히 빛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다시 이 무대에서 당신의 노래를 듣고 싶군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