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오후 네시
“영숙씨, 오늘은 어디쯤?”
“어디였더라?”
지원이 요즈음 영숙을 위해 낭독하고 있는 소설 ‘고래’를 펴들고 뒤적거렸다.
“금복이 냄새, 꿀벌이 배회하는 아카시아꽃 냄새, 무성한 풀냄새, 열기가 올라오는 땅 위의 흙과 함께 발효되는 푹신한 솔잎 냄새, 갓 피기 시작하는 장미와 밤에 더 짙어지는 밤꽃 냄새.”
페이지를 펴기도 전에 영숙은 벌써 그 부분을 외워댔다.
“와, 우리 영숙씨, 아직도 기억력이 총총. 이러다 천 년, 만 년 사시는 것 아녀?”
지원은 일부러 호들갑을 떨었다. 요즈음 부쩍 까막거리는 할머니의 기억력이 안타깝기만 했다. 참 이상하게도 어떤 것에 대한 기억력은 이렇듯 놀라울 정도였지만 또 어떤 기억은 몽땅 잊어 가는 것이다.
이미 수년 전에 돌아가신 서용수, 지원의 외할아버지에 대한 것을 물어 올라치면 지원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제는 이 세상을 뜨셨다고 할머니 말대로 소풍 끝나고 먼저 돌아가셨다고 아무리 말하고 또 말해도 할머니는 아직도 서용수 할아버지를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틀림없이 서용수 할아버지에 대해 물을 것인데 어찌 대답해야 할까 지원은 올 때부터 마음이 아렸다.
지원이 할머니를 만나면 규칙적으로 낭독하는 순서가 있었다. 먼저 베스트셀러 소설 한 권을 선택해 10 페이지 정도를 낭독하고, 다음으로 할머니의 서가에 꽂혀 있었던 시집 한 권을 가져와 다섯 편쯤 되는 시를 낭송한다. 마지막으로 할머니 본인이 그동안 써 내려왔던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던 일기인지, 자서전인지, 어쩌면 소설일지도 모를 몇 페이지쯤을 낭독하는 일이 지원이 거쳐야 할 순서였다.
마지막 순서인 할머니 자신이 쓴 글을 낭독할 때면 영숙은 곧 잘 눈물을 흘렸다. 카타르시스라나, 어쩐 다나 핑계를 대고 있었지만 지원은 알았다. 자신이 읽어 내려가는 할머니의 소설은 소설이라기보다는 할머니 인생에 대한 이야기였다는 것을. 할머니는 지원이 자신이 쓴 이야기를 읽을 때면 지나온 자신의 인생을 되새김질하며 앞으로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생을 정리하는 지도 모를 일이었다. 지원은 영숙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던 까닭에 지원도 영숙의 글을 읽을 때는 좀 더 숙연하게 목소리를 가다듬고 정성스럽게 읽어 내려갔다. 때론 할머니와 함께 빙긋이 웃기도 하며 때론 할머니와 함께 눈물을 적셨다. 이제 이런 의식을 삼 년이 넘게 해 왔으니, 할머니가 씀직한 이야기들을 모두 읽었을 듯싶지만 그렇지 않았다. 침대 머리맡에 놓여 있는 할머니의 가장 큰 보물 상자 속엔 할머니의 손때뿐만 아니라 지원이의 손때도 묻어 있는 보물이 있었다. 또 한 사람, 막 70이 넘어가는 할머니의 한 평생 중에 겨우 5년도 함께 살지 못하고 할머니와 지원의 곁을 홀연히 떠난 외할아버지 서용수씨의 손때도 함께 묻어 있는 보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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