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

Lester Young, Buddy Rich의 스튜디오 앨범 - The Lester Young Buddy Rich Trio(1955년)

thetraveleroftheuniverse 2018. 3. 22. 02:56





레스터 영
버디 리치
                                                   냇킹 콜





Coleman Hawkins, John Coltrane 등과 함께 사망한지 수십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세계 3대 테너 색소포니스트라는 칭호를 받고 있는 Prez인 레스터 영은 군대에서 소름끼치는 인종차별 대우를 경험하고 여생을 살아가면서 정신적 심리상태에 많은 충격을 받았던 까닭으로 많은 비평가들은 제대 후 Lester Young이 좋은 연주를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논평했다고 한다.

알콜에 의지하는 생활 때문에 건강상의 문제점들이 부상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40년대 중반에서 말까지가 연주자로서 전성기를 맞이했다고 할 수 있다.

1950년대의 그의 작품은 초기보다 정서적으로 심오하여 더욱더 그 질이 높아졌지만 그를 흉내 내는 백인들이 자신보다 더 많은 돈을 버는 것을 보고 고통스러워했으며 술로 자신을 달래는 생활을 하며 밥조차 먹지않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날이 허다했다고 한다. 예민한 예술가적 감성이 그에게 알코올에 중독되지 않을 수밖에 없는 현실을 제공했으리라, 짐작할 뿐이다.

그의 연주 실력을 인정했던 프로듀서 Norman Granz의 도움으로 일련의 성공적인 녹음을 했을 뿐만 아니라, Aladdin에서의 녹음도 칭찬을 받기도 한다.

오늘은 1946년에 레스터 영은 드러머 버디 리치와 보컬이 아닌 피아니스트로 출연한 냇킹 콜과 더불어 트리오로 녹음한 앨범으로 그 당시 냇킹 콜은 다른 레이블과의 계약 때문에 "Aye Guy"라는 예명으로만 녹음했다고 한다.



위키에서)
Lester Young Buddy Rich Trio 는 1946 년 3 월 ~ 4 월 Lester Young , Nat King Cole 및 Buddy Rich가 캘리포니아 할리우드에서 녹음한 재즈 트리오 앨범이다.

출시 이력
처음 4 트랙은 원래 Lester Young Trio 로 Mercury Records에서 출시되었다. 나머지 4 개의 트랙은 Norman Granz 의 Clef Records 레이블에서 The Lester Young Trio No. 2 로 발매된 것으로, 8 곡 모두 합해서 Granz의 Norgran Records 레이블에서 Lester Young Buddy Rich Trio 로 발매된 셈이다. Nat King Cole은 그 당시 다른 레코드 레이블과 계약을 맺었으므로 원래의 Mercury / Clef / Norgran 릴리즈에서 "Aye Guy"로만 녹음되었다.
1994 년 Verve Records는 The Lester Young Trio 의 CD 버전을 출시했으며, 1946 년 Hollywood 트리오 녹음에서 8 트랙을 모두 합한 "I Cover the Waterfront"와 "Back to the Land"의 다른 버전을 결합하여 냇 킹 콜 (Nat King Cole)과 함께 5 중주로 녹음된 4 개의 추가 트랙 (레스터 영 (Lester Young) 또는 버디 리치 (Buddy Rich) 제외)을 가지고 발매했다.




이 시대의 스윙 음악을 듣고 있노라면,
"인생이 뭐 별 거 있니?
그저 즐겁게, 즐겁게“
라고 속삭이는 것 같지 않나요?
인생이 별 거 라고 생각하면서 살아왔지요.
그런데,
이제 소풍을 마감할 날이 지척인 지금,
진짜,
인생 별 거 없더이다.

 무엇을 위해
그토록 애를 달면서 살아왔는지,
명예, 사랑, 돈이었을까요?

자문해보곤 하죠.

때론 돈이었을 때도 있었겠고
때론 사랑이었을 때도 물론 있었겠지만,
명예가 가장 중요하지 않았을까?

그러면서 드는 생각은
누굴 위해 명예를 사고 싶었을까?
남에게 잘 보이기 싶어서?
대접받고 싶어서,

어쩌면
사랑받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앞서네요.
받아도 받아도
부족한 것이
어쩌면 사랑이었을지도요.
이제
마지막 남은 내 인생은
무엇을 위해 살아야할까?

레스터 영의 혼이 들어간 연주에
새벽은 깊어가는데,
여전히 답할 길 없는 물음이네요.



Lester Young, Buddy Rich의 스튜디오 앨범
- The Lester Young Buddy Rich Trio(1955년)


레이블: Norgran
녹음일: 1946년 3월과 4월
발매일: 1955년
길이: 32:48
스타일: Swing
프로듀서: Norman Granz


Track listing
LP side A
"Back to the Land" (Young) – 3:52
"I've Found a New Baby" (Palmer, Williams) – 4:04
"I Cover the Waterfront" (Green, Heyman) – 4:03
"Somebody Loves Me" (MacDonald, DeSylva, Gershwin) – 3:54

LP side B
"I Want to Be Happy" (Caesar, Youmans) – 3:56
"The Man I Love" (Gershwin, Gershwin) – 4:48
"Mean to Me" (Ahlert, Turk) – 4:09
"Peg O' My Heart"[5] (Bryan, Fisher) – 4:02

Personnel
Lester Young – tenor saxophone
Buddy Rich – drums
Nat King Cole (credited as "Aye Guy" on the original releases) – piano






https://youtu.be/TnJWySUYx1U?list=PLrAFO88txWGoQlHaIvZ_FL_8rl_4QPKai
















1.

Lester Young/Lester Willis Young (1909827- 1959315)은 별명이 "Pres" 또는 "Prez"였던 미국의 재즈 테너 색소포니스트이자 때때로 클라리넷을 연주했던 음악가이다. 카운트 베이시의 오케스트라의 멤버였던 영은 그의 악기로 가장 영향력있는 연주자 중의 하나로 뛰어난 실력을 발휘했다. 그의 동료들이 딱딱한 연주로 몰아가는 것과 대조해 영은 좀 더 편안한 쿨 음색과 미묘한 하모니를 사용해서 "마치 춤추는 사람들과 듣는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한 낮고 펑키한 반복 악절을 쌓아 올리며 자유롭게 떠다니는 스타일, 마치 갈매기가 다이빙을 하고 선회하는 것과 같은이라는 비평을 받기도 했다.

 

Lester YoungColeman Hawkins의 강력한 연주법을 채택하기보다는 부드러운 음색으로 연주하는 완전히 새로 운 구상을 안출해 낸 재즈 거인중의 한 사람이다. Young은 일반 사회 규범에 따르지 않는 불순응주의자이며 프레스 PresBillie Holiday가 그에게 붙여준 예명이다. 1950년대에 수많은 젊은 테너 주자들이 그를 따라 흉내를 냈다. 그는 그의 어린 시절을 New Orleans 근처에서 보냈지만 그는 그의 가족 밴드에서 연주하면서 1920년까지 Minneapolis에서 살았다.

 

그는 violin, trumpet, drums 등을 배우고 나서 13살에 알토 색소폰을 불기 시작하였다. 그는 그의 가족 밴드가 남부로 순회공연 하는 것을 거절하고, 1927년 집에 머물러 있었다. 그 대신에 Art Bronson`s Bostonians와 순회공연을 하면서 알토를 테너로 바꾸었다. 1929년에 그는 그의 가족 밴드로 다시 돌아왔다. 그 후 몇 년 동안 자유계약자로 나섰는데 1930Walter Page`s Blue Devils, 1931Eddie Barefield, 1932-1933년 다시 Blue Devils, 1933Bennie MotenKing Oliver 등과 활동하였다.

 

그는 1934년 처음으로 Count Basie와 만났다. Coleman Hawkins가 교체되어 나가고 Fletcher Henderson이 들어왔다. 유감스럽게도 영 이 Hawk와 우열을 겨루어 보지도 못하고 그리고 그의 느긋한 연주가 사이드맨들의 마음에 들지 않아 결국 오래 있지 못 하였다. Andy Kirk와 투어를 하고 난 다음 1936Lester YoungBasie가 동부로 떠날 무렵 때맞추어 다시 그에게 돌아왔다. YoungBasie와 같이 있는 동안 그의 녹음에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Billie Holiday와 테디 윌슨 Teddy Wilson 등과 더불어 일련의 소규모 그룹 녹음에 출연하여 후세에 길이 남을 역사를 만들어 냈다. 게 다가 BasieKansas City Six 등과 좀처럼 보기 드문 클라리넷 연주를 녹음하면서 Young1950년대 알토 Paul Desmond와 거의 같은 음색으로 서부의 오리지날 Cool 사운드를 들여 주었다. 그가 1940Count의 밴드를 그 만 두고 나온 뒤, 재즈계에서 그의 명성을 이용할 데가 없어 앞날이 캄캄하였다. 그는 194312Basie와 재결합하기 전까지 그의 동생, 드럼어 Lee Young과 함께 Los Angeles에서 유명무실한 밴드를 공동으로 리더하였다. YoungBasie 밴드에 돌아와서 9개월 동안 베이스 주자 Slam Stewart와 같이 잊지 못 할 4인조 밴드로 녹음도 하고, 그가 군대에 징집되기 직전 `Jammin` the Blues` 단편 영화에 출연하는 등 즐거운 나날을 보냈다.

 

그가 군대에서 소름끼치는 인종차별 대우를 경험하고 나서 여생을 살아가면서 정신적 심리상태에 많은 충격을 받았다. 많은 비평가들은 제대 후 Lester Young이 좋은 연주를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논평하였다. 하지만 변덕스러운 건강에도 불구하고 40년대 중반에서 말까지가 사실상 그의 전성기였다. `40-`50년대 그는 때때로 J.A.T.P. (Jazz at the Philharmonic)와 투어를 하였는데 Norman Granz가 대우를 잘 해 주었다. 그리고 Aladdin에서 일련 의 멋진 녹음을 하였다. Young1930년대에 이미 익혀놓은 `비밥`을 자기 스타일에 맞게 잘 받아 들였다. 그러나 그는 정신적으로 고통을 많이 받고 있었고, 자기 자신과 외부 세계 사이에 높은 벽을 쌓고, 그의 다양한 어휘를 조용히 개발하였다. 1950년대의 그의 작품은 초기보다 정서적으로 심오하여 더욱더 그 질이 높아졌다. 그렇지만 그를 흉내내는 백인들이 장본인보다 더 많은 돈을 버는 것을 보고 마음이 몹시 아팠다. 그래서 그는 엄청나 게 많은 술을 마시고 거의 밥을 먹지 않고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1956년 작 Jazz GiantsWashington, D.C.에 서 그는 4인조 밴드와 1957Newport Jazz Festival에서 마지막으로 재결합한 Count Basie 밴드와 함께 최고의 콘디션을 보여 주었다.

 

1957The Sound of Jazz TV 방송에서 그가 Billie Holiday에게 정서적인 불루스 솔 로 한 곡을 연주하여 인기를 끌었지만 Young은 거의 앉아서 연주하였다. 1959년 초 Paris에서 병이 나서 결국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결정적인 술 때문에 결국 죽고 말았다. 그가 죽은 지 수 십 년이 지났지만 오늘날까지 아직도 Pres는 영원한 테너 색소폰 거장 Coleman Hawkins, John Coltrane 등과 함께 이들 3인중의 한 사람으로 손꼽히고 있다.

 

 


2.

전문적으로 Nat King Cole 로 알려진 Nathaniel Adams Coles (1919 3 17 - 1965 2 15 ) 는 미국 재즈 피아니스트이자 보컬리스트였다. 그는 팝 차트에 히트 곡인 100 곡을 녹음했다. 그의 트리오는 작은 재즈 앙상블의 모델이었다. 콜은 영화와 TV, 브로드웨이에서 공연을 했다. 그는 미국 텔레비전 시리즈를 주최 한 최초의 흑인이었다.

그는 처음에는 재즈 피아니스트로 역량을 발휘했으나 나중에는 따뜻하고 편안하며, 무기음(無氣音) 목소리로 부르는 발라드로 커다란 인기를 누렸다.

시카고에서 자랐으며 흑인 뮤지컬 극단과 함께 순회연주를 한 후 1937년에는 로스앤젤레스의 재즈 클럽에서 연주활동을 시작했다. 그곳에서 그는 기타 연주자인 오스카 무어와 베이스 연주자인 웨슬리 프린스와 함께 1939년 킹 콜 트리오를 결성했다.

자신이 편곡한 재즈 음악에서 콜은 엇박자로 간결하게 뒤를 받쳐주는 화음과 깨끗하고 절제된 선율을 사용하고 있으며 피아노의 역할을 리듬에 두기보다는 오히려 독주악기의 영역으로까지 확장시켰다. 그러나 그가 상업적으로 성공한 것은 피아니스트로서가 아니라 가수로서였다. 몸을 펴고 날아라 Straighten Up and Fly right(1943)를 발표한 이후 점차 대중가수로서의 길을 걷기 위해 재즈 피아노를 포기했다.

그가 부른 히트곡으로는 그밖에도 Nature Boy·모나 리자 Mona Lisa·투 영 Too Young·Unforgettable등이 있다. 세계 각지를 순회공연했으며 영화에도 출연했다







3.

Bernard " Buddy " Rich (1917 9 30 - 1987 4 2 )는 미국의 재즈 드러머이자 밴드 리더였다. Rich는 모든 시간에 가장 영향력 있는 드러머 중 한 명으로 널리 알려져 그의 거장 기술, 힘 및 속도로 유명했으며 Rich는 그의 경력 중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드러머"로 선정되었다. 그는 밴드 리더였던 Tommy Dorsey, Harry James, Count Basie뿐만 아니라 그 자신의 백 밴드를 이끌기도 했다.

재즈뿐만 아니라 드럼이라는 악기에 있어서 혁신적인 연주패턴을 제시한 버디 리치(Buddy Rich). 그는 스피드, 파워, 테크닉 등 모든 면에 탁월함을 드러냈으며, 생후 18개월 드럼 스틱을 잡기 시작한 날부터, '87년 심장발작으로 사망하기 전까지 드럼이라는 악기에 일생을 바친 전설적인 드러머이다.

1917730일 뉴욕에서 뮤지컬 대본 작가였던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리치는 불과 4세의 나이에 브로드웨이의 한 공연장에서 'Traps the Drum Wonder'라는 곡을 간단한 춤과 함께 선보일 정도로 어릴 적부터 타고난 엔터테이너로서의 재능을 보였다.

 

그리고 '37년 리치는 뉴욕의 힉코리 하우스(Hickory House)에서 조 마살라(Joe Marsala) 밴드와 함께 공연하면서, 공식적인 재즈의 첫발을 내딛게 된다. 이후 버니 버리건(Bunny Berigan) 오케스트라를 거쳐, '39년 아티 쇼(Artie Shaw, '30년대 가장 인기 있었던 클라리넷 주자), 그리고 이후 '45년까지 타미 돌시(Tommy Dorsey), 디지 길레스피(Dizzy Gillespie), 찰리 벤추라(Charlie Ventura), 루이 암스트롱(Louis Armstrong), 진 크루파(Gene Krupa)와 같은 재즈 명인들과 함께 연주하면서 실력과 명성에서, (베니 굿맨(Benny Goodman) 밴드 멤버로 드러머 최초의 수퍼스타였던) 진 크루파와 함께 '스윙 드러머'로서 최고의 위치에 올랐다. 한편 [Symphony of Swing]('39), [Ship Ahoy]('42), [How's About It]('43)와 같은 영화에까지 출현한 것은 그러한 그의 명성을 입증하는 것이다.

 

'50년대 들어서도 리치는 버브(Verve) 레이블 소속이었던 찰리 파커(Charlie Parker), 레스터 영(Lester Young), 아트 테이텀(Art Tatum), 라이오넬 햄턴(Lionel Hampton)과 함께 수많은 레코딩과 공연 활동을 계속했다.

리치의 드러밍은 이론적으로 즉흥연주 시, 테크닉과 리듬감에서 대단히 뛰어난 역량을 발휘했다. 특히 싱글 스트록의 스피드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하지만 리치는 연주뿐만 아니라 뮤지컬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West Side Story)의 음악을 담당한 것이라든지, 자니 카슨(Johnny Carson), 마이크 더글라스(Mike Douglas), 머브 그리핀(Merv Griffin) 등이 진행하는 토크쇼에 출연하여 특유의 신랄하고 독설적인 유모로 입담으로 대중적인 사랑 받은 국민적인 엔터테이너였다.

 

'8742, 악성 뇌종양으로 수술을 받던 도중 심장발작으로 세상을 떠난 리치는 사후, 다운 비트(Downbeat), 모던 드러머(Modern Drummer) 재즈 언리미티드(Jazz Unlimited) , 유수의 재즈 전문지에서 수여하는 명예의 전당(Hall of Fame)에 오르게되었고, 그의 일대기를 다룬 수많은 다큐멘터리와 서적들이 발간되었다.

한편 리치의 장례식에는 그의 오랜 친우인 프랭크 시나트라(Frank Sinatra)를 비롯, 수많은 유명인사들과 팬들이 운집했으며, 진 크루파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드러머가 숨을 거두었다"며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멜로디 중심의 악기가 밴드를 리드하고 조명을 받는 음악계에서 드럼이라는 타악기로 최고의 명성에 오른 리치는 지금까지도 드럼을 배우려는 이들뿐만 아니라 음악을 하려는 모든 이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