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와이키키 브라더스』: 무너진 꿈 위에서 걷는 자들의 철학
군산시 동네문화 카페 프로그램의 ‘영화와 철학’ 수업에서 임순례 감독의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함께 관람했다. 2001년 작품이라 그런지 영상미는 다소 촌스럽게 느껴졌고, 고전 영화처럼 낯익은 분위기도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이 담고 있는 주제 의식과 사유의 깊이, 그리고 스토리 전개의 밀도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영상의 외형을 넘어서는 내면적 울림이 강하게 다가왔고, 철학적 성찰을 이끌어 내는 힘이 있었다.
영화는 한때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뭉쳤던 밴드 멤버들이 세월의 흐름 속에서 점차 현실에 타협하고, 꿈을 잃어가는 과정을 담담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이 영화는 단순한 밴드 해체의 이야기가 아니라, 존재의 무게와 삶의 퇴행을 철학적으로 성찰하게 만드는 깊은 울림을 지닌다.
성우는 밴드의 리더로서, 음악을 통해 삶을 붙잡고자 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그가 고향 수안보로 돌아오며 마주하는 것은 과거의 이상이 아니라, 무너진 기억과 해체된 공동체다. 밴드 멤버들은 하나둘씩 떠나간다. 어현구는 떠돌이 생활에 지쳐 먼저 팀을 이탈하고, 최강수는 도박과 빚에 휘말려 음악보다 생존에 가까워진다. 정석은 여자 문제로 팀워크를 해치며 점차 중심에서 벗어난다. 이들의 이탈은 단순한 갈등이 아니라, 현실의 무게에 짓눌린 인간의 초상이다.
그들의 떠남은 하이데거의 실존 철학과 맞닿아 있다. 인간은 세계 속에 던져진 존재이며, 그 속에서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기란 쉽지 않다.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멤버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피한 삶’을 살아간다. 음악은 그들에게 존재의 본질이었지만, 현실은 그 본질을 부정하게 만든다. 결국 그들은 음악을 포기하고, 서로를 잃는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조용히 묻는다. “자신이 진짜로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 옳은가?”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해 단순한 성공과 실패의 이분법이 아닌, 삶의 태도와 존재의 진정성이라는 관점에서 응답한다. 성우와 멤버들은 음악을 사랑했지만, 그 사랑은 현실의 벽 앞에서 흔들린다. 생계는 불안정하고, 관계는 무너지고, 꿈은 점점 멀어진다. 대부분은 음악을 포기하고 떠나지만, 성우는 끝까지 기타를 놓지 않는다. 여수의 무대에서 그는 다시 노래한다. 그것은 성공을 위한 무대가 아니라, 자신이 누구인지 잊지 않기 위한 무대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에 따르면 인간은 본질이 아니라 선택을 통해 존재를 규정한다. 성우는 실패했지만, 그 실패조차 자신이 선택한 삶의 결과이며, 그 선택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것은 단지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윤리적 행위다.
영화 속 배경인 수안보라는 공간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미셸 푸코가 말한 ‘헤테로토피아’, 현실과 비현실이 교차하는 장소로 기능한다. 고향은 기억 속에서 이상화되지만, 현실의 고향은 낡고 무너져 있다. 성우는 그 공간에서 과거의 자신과 현재의 자신 사이에서 분열된다. 고향은 치유의 공간이 아니라, 상실을 재확인하는 장소다.
밴드의 음악은 더 이상 열정의 표현이 아니다. 그것은 생존을 위한 수단이며, 체제에 흡수된 상품이다. 아도르노는 예술이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자율성을 잃고, 소비의 대상이 된다고 비판했다.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음악은 그 비판을 체현한다. 그들의 연주는 저항이 아니라 체념이다. 그리고 그 체념 속에서 관객은 침묵한다. 침묵은 윤리적 질문을 던진다—우리는 이들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영화는 과거와 현재를 교차시키며, 기억의 왜곡과 재구성을 보여준다. 성우의 회상은 단순한 회고가 아니라, 앙리 베르그송이 말한 ‘지속(durée)’의 흐름이다. 시간은 선형적으로 흐르지 않고, 감정과 기억에 따라 뒤섞인다. 영화 속 시간은 과거의 이상과 현재의 현실이 충돌하는 장이다. 그리고 그 충돌 속에서 관객은 질문하게 된다—기억은 우리를 구원하는가, 아니면 더 깊은 상처를 남기는가.
임순례 감독은 실패한 자들, 주변부 인물들에 대한 깊은 연민을 보여준다. 이 영화는 성공 서사가 아닌, 실패 이후에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레비나스는 타자의 고통을 응시하는 것이 윤리의 시작이라고 말한다. 영화는 그 응시를 실천한다. 관객은 성우와 밴드 멤버들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다. 그들의 침묵, 그들의 체념, 그들의 눈빛은 윤리적 질문을 던진다—우리는 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성우는 여수의 나이트클럽에서 다시 무대에 선다. 그 곁에 선 사람은 강수연이다. 그녀는 성우가 고등학교 시절 짝사랑했던 인물이며,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다시 그의 삶에 들어온다. 과거에는 닿지 못했던 감정이었지만, 지금은 함께 노래할 수 있는 거리까지 다가왔다. 강수연의 목소리는 성우에게 위로이자 회복이다. 그녀는 성우의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존재이며, 무너진 꿈 위에 다시 피어난 가능성이다. 이 장면은 단절된 시간의 회복이며, 베르그송의 시간 철학처럼 감정과 기억이 이어지는 흐름 속에서 삶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결국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말한다. 실패자일지라도, 좋아하는 일을 끝까지 붙잡는 것이 옳다고. 그것이 삶의 윤리이며, 존재의 존엄이다. 이 영화는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무엇을 잃었고,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가. 그리고 그 질문은,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다.
그래서 나는 지금, 나 자신에게 묻고 있다. 나는 내가 진정으로 좋아하는 일을 계속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고 있는가? 타인의 비판 속에서도, 나는 나 자신의 색을 고수할 수 있을까? 아니면 그 시선에 맞추어 나를 조정하며 살아가야 하는가?
이런 질문들이 내 안에서 자꾸만 자라난다. 나는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나의 언어와 감각, 나의 세계를 어떻게 지켜낼 수 있을까? 무너진 꿈 위를 걷는 이들의 철학처럼, 나 역시 흔들리는 현실 속에서 나만의 리듬과 목소리를 끝까지 붙잡을 수 있을까?
그 질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어쩌면, 그 질문을 붙잡고 살아가는 것 자체가 나의 글쓰기이며, 나의 존재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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