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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즈

Ornette Coleman의 스튜디오 앨범 - Change of the Century(1960년)

by thetraveleroftheuniverse 2018. 5. 23.

         Ornette Coleman의 스튜디오 앨범 - Change of the Century(1960년)






                                                    오넷 콜맨





오늘의 앨범 Change of the Century는 재즈 색소포니스트 Ornette Coleman의 네 번째 앨범으로 1960년 레이블 Atlantic Records를 통해 발매하기에는 두 번째였다.

Ornette Coleman의 전설적인 4중주인, 찰리 헤이든, 빌리 히긴즈, 돈 체리의 기념비적인 앨범 The Shape of Jazz to Come (1959년)과 대등한 앨범으로 찬사를 받는 이 앨범은 같은 세션으로 1959년 10월 8일과 9일 캘리포니아 할리우드 Radio Recorders에서 녹음되었다.

트랙은 오넷 콜맨의 오리지널로 구성되었으며 이 세션의 "Music Always" 과 "The Circle with the Hole in the Middle," 두 트랙은 후에 1970년대 편집앨범 To Whom Who Keeps A Record 와 The Art of the Improvisers에 각각 발매되었다고 한다.

연주자들간의 인터 플레이가 강조되면서 멜로디 라인을 따라 즉흥 연주가 펼쳐지는 콜맨은 그의 가장 찬사를 받는 오리지널인, 스윙과 대담한 블루적 연주 "Ramblin'" 과 뒤죽박죽 어디서 멈추고 끝날지 모르는, 전혀 예상할 수 없는 곡의 전개를 들을 수 있는 "Una Muy Bonita"를 주목해서 들을 필요가 있다고 한다.

록 뮤지션이며 동시에 실험적 음악을 했던 미국의 음악가 Lou Reed(1942년 3월 2일 – 2013년 10월 27일)는 모든 시대를 통 털어 이 앨범을 최고의 앨범이라고 극찬했다.



Ornette Coleman의 스튜디오 앨범 - Change of the Century(1960년)

레이블: Atlantic Records
녹음일: 1959년 10월 8일과 9일
발매일: 1960년
길이: 40:55
스타일: Free jazz
프로듀서: Nesuhi Ertegün



Track listing(모든 곡은 Ornette Coleman 작곡)
Side one
1. "Ramblin'" October 9 6:39
2. "Free" October 9 6:24
3. "The Face of the Bass" October 8 6:59

Side two
1. "Forerunner" October 9 5:16
2. "Bird Food" October 8 5:31
3. "Una Muy Bonita" October 8 6:02
4. "Change of the Century" October 8 4:41

Personnel
Ornette Coleman — alto saxophone
Don Cherry — pocket trumpet
Charlie Haden — bass
Billy Higgins — drums




https://youtu.be/qe7UWzmExYo?list=PL-4gUxOUXx4iRy2Eh5psEmOympSimAc8T






오넷 콜맨은 1930년(혹은31년) 3월9일/ 2015년 6월 11일 (향년 85세)

리듬앤 블루스의 산실인 텍사스주 포트워쓰 태생이다. 이후 그의 음악파트너가 된 듀이 레드맨과 챨스 모펫과 는 고향친구가 되며, 그들과의 교류는 일찍 학교 밴드에서 부터였다고 한다. 14세경 아르바이트를 통해 모은 돈으로 알토색소폰을 구입 독학으로 배웠으며, 이후 테너 색소폰은 텍사스 로컬뮤지션인 토마스 코너스로부터 사사 받았다. 여기서 하나의 아이러니는 그가 조성에 대한 개념이 희박해 진 것은 독학으로 알토색소폰을 공부하던 도중 Eb조인 그 악기의 키를 이해 못해 C조 악보그대로 연주하면서 생긴 오류라는 설이 있다. 대편성의 오케스트라 곡까지 작곡하고 클래식에서 민속음악까지 연구한 그이기에 약간은 믿힘들지만 어쩌면 출발점에서의 오류를 자신의 음악으로 개조한 천재성을 엿볼 수있는 면이 아닌가 생각된다. 프로 데뷔한 49년 이후 주로 리듬 앤 블루스밴드에서 연주 하였으나, 잘 알려지다시피 혹독한 냉대를 받았으며 53년 로스앤젤레스로 활동 무대를 옮긴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 궁핍한 와중에 그는 자신의 음악을 가다듬고 독자성을 키워나갔으며, 이에 동조하는 파트너들을 만나게 되었다. 트럼펫의 돈 체리와 돈 체리의 고교친구 빌리 히긴스, 그리고 얼마 후 멤버에 참여하게 된 챨리 헤이든 등으로 이후 뉴욕에 진출 레이블 아틀랜틱과 계약 본격적으로 재즈계에 논란을 일으키게 한 문제의(?) 그 멤버들이다. 한편 그의 그룹에 정식으로 가입하지 않았지만 58년 힐크레스트란 클럽에서 공연한 폴 블레이는 상당한 음악적 공감대를 지니고 있었다. 59년 비정규 작 Lenox school of jazz(Royal jazz)이후 96년 버브 하모로딕에서 발표한 Sound museum연작이 있기 전까지 제리 앨런외 이정도 그와 잘 어울리는 피아니스트는 없었다.(피아니스트는 그의 정규 데뷔작 Something else 에서 월터 노리스와 Beauty is a rare thing이란 아틀란틱 전집 미발표트랙에서 발견된 빌 에반스정도뿐이다).

58년 돈 체리와 친분이 있던 레드 미쳴의 추천으로 당시 서해안 최고의 레이블 컨템퍼러리와 계약을 맺고 드디어 뮤지션으로서 제대로 된 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여기서 그는 2장의 앨범을 남겼는데(Something else, tomorrow is question) 당시 리듬섹션들은 빌리 히긴스외에는 컨템퍼러리 레이블 단골멤버들로 오넷 콜맨의 톤이 다소 불규칙적이고 변칙적인 블루스를 연주한다고 생각될 뿐 베이스의 워킹라인이나 드럼비트는 기존의 정상적인 패턴으로 리듬섹션들은 일단 곡이나 진행에 대한 아이디어만 듣고 자신의 플레이를 했음을 느낄 수가 있다. 이는 컨템퍼러리 오너인 레스터 퀘닉이 확실히 오넷 콜맨의 음악보다 작곡에 관심이 있었음을 증명한다. 그리고 59년 가을 드디어 뉴욕에 입성하여 11월 Five spot에 출연한 후 이전 Atlantic와 계약을 맺어 그해 5월에 녹음하였던 The shape of jazz to come을

발매하게 된다.(오리지날 쿼텟 최초의 정규 리더작). 당시 그는 죤 루이스, 귄터 쉴러등 그를 지지하는 뮤지션들과 마일스 데이비스(대단한 방법이란 건 인정하되 음악에 관해서는 탐탁치 않다는 의견을 나타내었음),덱스터 고던등의 반대파, 또한 네프 핸도프, 마틴 윌리암스등의 우호적인 평론가와 레나드 페더, 죤 타이넌 등 불쾌한 행위라고까지 비판한 평론가등으로 해서 극단적인 반응이 일어났다. 하여간 찬 반양론이 거세질수록 논란대상자의 이름은 자연적으로 알려지게 되어 있기에 오넷 콜맨은 뮤지션들뿐 아니라 재즈클럽에 출입하는 팬들의 입으로 전해 져 뉴욕예술계 전체에 까지 관심과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60년 더블

쿼텟에 의한 충격적인 앨범 Free Jazz의 앨범쟈켓이 현대미술가 잭슨 폴락 작품이란 것도 전위예술계에 까지 파급된 그 위상의 한 단면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클럽 출연료 인상문제가 시비로 되어 62년 12월 21일 피츠버그 출신으로 갓 뉴욕에 진출한 데이비드 아이젠즌과 고향친구 챨스 모펫등 새로운 멤버와 현악사중주단 과 함께 작곡에 큰 비중을 둔 타운홀 콘써트(부제:dedication to poets and writers)를 마지막으로 2년 반간 재즈계를 떠나게 되었다.

그는 잠정 은퇴할 동안 바이올린, 트럼펫등의 악기를 본격적으로 익히기 시작했으며, 취약하던 음악이론도 파고 들어가 65년 새롭게 무장한 모습으로 복귀했다. 65년 콘라드 룩스 감독의 영화 Chappaqua의 영화사운드트랙이 복귀 첫작 이나 실제 영화에서는 라비 샹카르의 음악으로 대체되었다.(앨범 라이너 노트에 쓰여진 감독의 변은 "너무도 위대한 오넷 콜맨의 음악이 자신의 영화로 인해 손상되지 않기 위해서"란 웃지못할 것이었다.) 그 외 복귀 초의 작품은 대부분 은퇴직전의 트리오로 행한 유럽투어도중 이루어졌으며 특히 Golden circle vol 1.2. (65.12.Blue Note)는 즉흥연주가로서 새로운 경지를 보여준 명반이었다. 그리고 66년 The empthy foxhole에서는 그의 아들 디나드 콜맨이 최초로 등장 했는데 당시 나이가 불과 10세였다.(프레디 허바드는 이 재즈레코딩사상 최연소 드러머에 종잡을 수 없는 난잡한 연주라고 혹평했다.). 또 하나 이색적인 작품은 68년 오노 요코의 앨범에 사상초유의 게런티를 받고 참여한 적이 있다 (Yoko ono Plastic ono Band,68,2.Apple). 한편 블루노트시절을 마감하는 중요 작으로 콜트레인 쿼텟 출신인 지미 개리슨과 엘빈 죤스의 리듬섹션과 오넷 콜맨과 가장 닮은 연주를 하는 듀이 레드맨이 최초로 참여한 New York is now와 Love Call은 뺄 수 없는 역작이기도 하다. 이후 68년과 70년 중반까지 대부분의 작품은(Impulse,Flying Duchman,CBS) 프랑스와 일본 등 일부지역에서만 시디화 되고 미 본국에서는 거의 묻힌 채로 있다. 빌 에반스, 스탄 게츠,오스카 피터슨 같은 인물들의 비정규작들과 미발표 집까지 발매되는 추세를 상기해본다면 아직 평가가 유보되어 있으며, 그가 행한 음악은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성질의 아닌 것이다. 특히 얼마 전 일본에서 시디로 재발매된 CBS데뷰작이자 그때까지 자신의 인맥을 총동원한 야심작 Science fiction과 런던 심포니와의 협연 작으로 Skies of America는 뺄 수없는 중요앨범이라 할 수있다. 한편 이보다 조금 앞서 69년 그는 뉴욕 소호에 아파트를 구입 이를 "Artist House"라 명명하고, 무용과 음악을 위한 스튜디오로 개방했으며, 여기서의 라이브 실황은 friends and neighbors(Flying Duchyman,70.2)란 타이틀로 발매하였다 이후 83년 극장,식당,댄스,뮤직스튜디오,나이트클럽등 대규모 문화오락시설을 구비한 Caravan of dreams란 건물의 오프닝 윅을 장식하고 당시 실황을 동 시설 레이블에서 "Opening the Caravan of dreams"의 제목으로 앨범을 발표했다. 이는 그가 재즈를 통해 다방면의 문화를 수용하고 그 교류 폭이 넓다는 점을 시사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73년 북아프리카 모로코로 직접건너가 현지뮤지션과 함께 토속적인 아프리카음악을 도입하기도 했다. 당시 녹음은 발매취소가 되고 이후 76년 펑크하모로딕의 효시 Dancing in your head(Horizon,76.12)에 1곡 (Midnight sunrise) 수록되어졌다. 이후 Prime time의 모체인 상기앨범 1,2번트랙의 이 펑크 하모로딕 밴드는 Free jazz에서 시도한 편성인 더블 쿼텟의 변형으로 2기타 2베이스 2드럼으로 편성

펑크의 반복적인 패턴과 락적인 요소를 한 곡 내에서 교차되게 하였다. 이 또한 편성이나 도입한 방법이 어떠하던 간에 자신이 지향하는 음악으로 이끌어가는 대가의 모습이었다. 여기서 벤 닉스,제임스 블러드 울머, 소니 샤록, 챨스 엘러비등의 기타리스트(87년 Virgin beauty에서는 그레이트펄 데드의제리 가라시아도 참가!)와, 쟈말라딘 타쿠마,알 맥도웰의 베이시스트,롤란드 새논 잭슨, 캘빈 웨스턴등의 드러머를 배출하였다. 대부분의 멤버들이 리듬 앤 블루스밴드 활동경력이 있으며, 그들은 오넷 콜맨에게서 이제까지의 개념을 초월하는 음악을 세례 받고 반면 오넷 콜맨에게는 새로운 감각과 자극을 주었다

87년 Virgin beauty이후 장기간 침묵을 지키다 92년 개봉된 윌리엄 바로우즈감독 의 Naked lunch의 영화 음악을 담당하여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으나, 그가 가장 왕성한 의욕을 보이고 활동한 것은 최근 3년 사이이다. 95년 Verve산하 독립 레이블로 Harmolodic을 발족시켜 바하, 랩, 펑크 하모로딕등 화려한 색채를 선보인 Tone Dialogue를 필두로, 제리 앨런의 경이로운 카운터멜로디와 분방한 연주가 돋보인 연작 Hidden Man, three woman 그리고 옛 동독출신 피아니스트 요하임 퀸 과의 듀오작 Colors까지 발표하였다. 97년 7월 8일에서 11일 사이 링컨센터에서 오넷 코울먼 특별프로그램이 4일간 열렸으며, 여기서 25년 만에 Skies of America 를 재현하기도 했다. 그리고 2004년 4월 3일 프랑스정부로부터 문화훈장을 받아 개인적인 위상이 말년 들어 더 높아지고 있다. 앞으로 얼마 더 연주를 지속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지만 재즈영웅들이 속속들이 타계하고 있는 현 시점에서 오넷 콜맨은 활동하는 그 자체로 상당한 상징을 지니게 된다. 더구나 초기성과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의 지론을 무수한 컨셉을 통해, 새롭게 포장하고 완벽하게 자신의 음악으로 승화 시켜왔으며 지금도 진행 중이기에 Something else로부터 40년 동안 오넷 콜맨은 매일 부활하는 전설이 되고 있다. 코드 체인지를 미리 짜지 않고 즉흥연주를 하는 프리 스타일의 선두주자로 그의 음악이 재즈와 현대음악에 미친 영향은 대단한 것이다. 프리재즈는 '집단 즉흥연주'라는 독특한 측면이 있다. 사전에 아무런 약속 없이 진정한 즉흥연주를 펼치는 것이다. 거기에는 미리 짜여 진 주제의 편곡이나 코드 체인지 또는 정해진 코러스의 길이가 없다. 베이스와 드럼은 리듬 섹션의 일환으로서 보다는 관악기 파트에 영감을 주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스타일이 충격적이긴 하지만 재즈에 새로운 재미를 더해 주는 것도 사실이다. 그 재미란 '추상 적인 체험'을 말한다. 그것은 극히 개인적인 것까지를 포함한 것이기도 하다. 그의 연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독창적인 프레이징과 리듬이다. 그의 출현의 중요성은 루이 암스트롱과 찰리 파커에 비견된다. 그가 펼쳐 보이는 무조(Atonal)의 즉흥연주에는 새로운 예술적 조화와 미개발의 가능성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신선하고 아이디어가 풍부한 작곡가로서의 그의 모습이 연주자로서의 그보다 우선한다. 특이한 리듬과 하모니, 그리고 즉흥연주는 밥 스타일에서 한 단계 도약한 자유로운 창작의지를 반영하고 있다. 그는 플라스틱 색소폰을 분다. 이는 그가 기존의 음색에서 탈피해 뭔가 다른 것을 추구하기 위한 의도에서 비롯된다.